기예르모 델 토로의 첫 느와르 영화 ‘나이트메어 앨리’는 1946년에 나온 동명 소설이 원작입니다. 이 소설은 에드워드 굴딩 감독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어 소설이 나온 이듬해인 1947년에 개봉했습니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초기 느와르 장르의 걸작으로 꼽히며 고전 느와르 영화 팬들에게 많이 회자되었습니다. 저는 소설도 읽지 않고 1947년에 나온 영화도 보지 않았지만 이번에 개봉한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을 보니 확실시 1940년대에 나온 작품다운 고전적인 플롯과 이야기 전개 스타일이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아주 고전적이고 단순한 플롯을 가진 영화입니다. 재능도 있고 야망도 넘치는 한 남자의 성공과 몰락의 이야기. 거기에 주인공 배우인 브래들리 쿠퍼가 워낙에 고전적인 스타일의 미남이라서 영화가 더욱 고전 명작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나더군요. 네, 이 영화는 단순히 고전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명작의 느낌까지 납니다.
사실 21세기에도 뛰어난 감독들이 20세기 느낌의 고전 스타일로 영화를 만든 적은 많습니다. 딱히 옛날 느낌을 내려 한 것도 아니고 21세기가 되어도 줄곧 같은 스타일로 영화를 만드는 거장 감독들도 있고요. 예를 들어 마틴 스콜세지 같은. 그리고 20세기라는 100년의 기간도 그 안에서 다양한 시대로 분화됩니다. ‘나이트메어 앨리’가 보여주는 20세기 고전의 느낌은 원작이 나온 시대인 1940년대까지 거슬러 갑니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고전 걸작 영화는 모두가 아는 대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입니다. 사실 저도 이 시대의 영화는 시민 케인 같이 압도적인 명성과 위상을 가진 영화를 제외하면 거의 본 게 없습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1939년에 공개되어 비슷한 시대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나이트메어 앨리는 확실히 시민 케인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느낌이 납니다. 영화의 주제나 플롯이 아니라 캐릭터의 서사를 쌓아나가고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방식이 비슷합니다. 시민 케인과는 주제 면에서 유사하기도 하고요.
나이트메어 앨리는 ‘욕망’과 ‘타락’이라는 아주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플롯은 단순한 편인데 스토리의 구조를 쌓아 올리는 빌드업은 대단히 섬세하면서도 우직합니다. 그래서 영화가 느리고 무겁습니다. 그리고 상영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져요. 실제로 상영시간이 150분으로 상당히 긴 편이고, 중반까지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순간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TV에 방영되는 옛날 영화들을 볼 때도 대체로 이런 느낌이었죠. 최근에는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가 만든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입니다. 아이리시맨은 상영시간이 무려 3시간이 넘습니다. 저는 아이리시맨을 보면서 영화가 굉장히 고전적인 걸작이다 라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지금 시대에는 확실히 극장보다는 넷플릭스 같은 OTT에 어울리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이트메어 앨리를 볼 때도 이런 영화를 OTT가 아니라 극장에서 보게 된 것이 색다르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어릴 때도 고전 영화들은 전부 TV로 봤었으니까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아이리시맨도 아마 극장에서 봤으면 더 재미있었을 거예요. 나이트메어 앨리도 고전 스타일로 느리고 무겁게 만들었지만, 확실히 명작이라고 느낄만한 탁월한 완성도와 흡입력 있는 내용 전개로 극장이라는 환경에서 더욱 몰입하여 즐길 수 있었습니다.
이 영화는 장르가 느와르입니다. 사실 우리가 익숙한 느와르 장르의 주된 내용은 갱스터나 살벌한 무법자들이 등장하는 범죄물입니다. 하지만 원래 느와르(Noir)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검다’라는 의미이고, 장르의 정체성도 갱과 같은 특정 소재가 아니라 영화의 스타일과 주제, 이야기 전개 방식에 의해 정해집니다. 애초에 ‘장르’라는 것이 명확하게 ‘정한다’고 할 수도 없는 개념이고요.
사실 갱 영화가 본격적으로 느와르 장르를 대표하게 된 것도 1970년대 이후부터라서, 1940년대의 원작과 분위기를 가져온 ‘나이트메어 앨리’가 현대의 영화 팬들에게 익숙한 느와르 장르와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이트메어 앨리가 보여주는 무거운 분위기와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깊게 해부하는 주제는 느와르 장르로서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부터가 느와르 장르에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나이트메어 앨리’에 딱 맞아떨어지는 한국어 번역이 마땅히 없는 것 같아요. 한 밤 중의 어두운 뒷골목 정도? 그냥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에 검은 욕망과 타락이 숨 쉬는 공간. 정말 칠흑 같은 어둠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느와르 그 자체.
고전적인 스타일의 작품이지만 영화의 내용 자체는 오히려 저에게 신선했습니다. 대중문화 소재에서 흔하게 경험할 수 있는 역설이죠. 예스러운 소재는 최근 작품일수록 거의 다루어지지 않으니 오히려 이런 소재가 더 새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니발이라는 문화는 한국에는 없기도 하고 서커스단도 요즘은 거의 보기가 힘드니까요.
이 작품의 주인공 ‘스탠턴 칼라일’은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짐꾼으로 고용되어 정착하게 된 카니발에서 ‘독심술’이라는 재주를 익혀 이 재주를 바탕으로 큰 돈을 벌 야심을 품게 된 인물입니다. 당연히 이 독심술은 실제로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아닌 속임수입니다. 카니발에서 만난 ‘피트’라는 이름의 베테랑 독심술사에게서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기술과 비법 노트를 얻게 된 스탠턴은 변두리 지역을 전전하는 카니발을 떠나 대도시에서 진짜 부자들과 거물들을 상대로 공연을 할 계획을 세웁니다. 독심술뿐 아니라 죽은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다는 영매의 능력까지 더해진 그의 사기술은 결국 도시의 부자들에게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합니다. 공연장에서 만난 ‘릴리스’라는 이름의 심리학자는 스탠턴에게 영매를 필요로 하는 거물 부자를 소개해주고 스탠턴은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욕심에 빠져 이 의심 많고 위험한 거물을 상대로 거대한 속임수를 꾸미게 됩니다.
플롯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고 고전적이지만 독심술과 영매로 거대한 사기를 벌인다는 내용은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사실 이런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요즘 시대에도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점쟁이’나 ‘무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흔하고 과거에도 흔했고 인류 역사 내내 이런 비슷한 직업은 늘 존재해왔을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정치가나 재벌같은 거물급 손님들을 상대하며 큰돈을 번 사람도 많을 겁니다.
대중문화에서는 코미디나 신랄한 풍자극에 등장할법한 소재인데요. 나이트메어 앨리 같은 묵직한 느와르 장르에서 이런 소재가 다루어지는 것은 역시 신선한 느낌입니다. ‘기괴함’이 가장 큰 특징이자 무기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이기에 특히 적합한 소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역시 이 감독의 작품은 느와르 장르라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영화 자체는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 치고는 의외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델 토로는 저에게는 좀 더 재기 넘치고 ‘튀는 성향’의 감독으로 줄곧 인식되어 왔거든요. 아무래도 처음에는 미믹, 블레이드2, 헬보이 같은 영화들로 알게 된 감독이니까요. 그랬던 델 토로 감독이 ‘셰이프 오브 워터’로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도 받고 이제는 완전한 거장의 풍모를 갖춘 감독이 되었습니다. ‘나이트메어 앨리’도 의외라고 했지만 정확히는 ‘기예르모 델 토로도 이제는 이런 영화가 어울리는 감독이 되었구나’라는 느낌이었어요.
좋은 작품입니다. 그저 고전적이라는 느낌 뿐 아니라 명작의 기품까지 느껴집니다. 주인공 브래들리 쿠퍼 뿐 아니라 케이트 블란쳇, 루니 마라, 윌렘 데포, 토니 콜렛, 데이빗 스트라탄, 론 펄먼 등 배우들도 모두 좋았고요. 귀신이나 괴물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기상천외한 것들을 수집하는 카니발을 배경으로 한 기괴한 분위기의 연출도 좋았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영화의 국내 홍보입니다. 국내 포스터에 이런 홍보 문구가 적혀 있네요. “지난 10년 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 이런 무리수는 제발 좀! 고전적인 플롯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영화의 초반부에 이미 엔딩이 뻔히 그려질 정도인데 저는 저 홍보 문구 때문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까? 라는 호기심과 기대를 쓸데없이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예상했던 엔딩 그대로더군요. 결말 자체만 놓고 보면 사실 뻔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영화의 초반에 확실한 복선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결말이 충격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10년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엔딩’이라니... 조금이라도 관심을 끌기 위해서 노력하는 홍보 담당자들의 고충과 고민은 알겠는데 이런 무리수는 자제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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