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국 이후 한국 영화 기대작의 가뭄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습니다. 저도 2021년에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가 ‘모가디슈’와 ‘화이트데이: 부서진 결계’ 두 편 뿐입니다. 올해는 3월 현재까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와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두 편을 봤는데 남은 한 해 동안 볼만한 한국 영화 기대작이 더 많이 개봉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극장에서 예고편을 보자마자 참으로 오랜만에 ‘이건 진짜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한국 영화입니다. 핵심적인 이유는 이런 장르의 한국 영화가 생각보다 보기 드물다는 것입니다. 한국 영화뿐 아니라 해외 영화에서도 최근에는 잘 안 나오는 장르입니다.
감동적인 휴먼드라마 장르의 영화인데요. 한국에서는 보통 이런 감동 코드의 영화는 이른바 ‘K-신파’라는 장르로 특화되어 있습니다. 저는 신파라는 장르가 한국 영화의 중요한 특색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굉장히 한국적인 코드를 담고 있는데 의외로 해외에서 매우 반응이 좋아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부산행’이나 ‘오징어 게임’같이 해외에서 인기를 끈 한국 콘텐츠에서 ‘K-신파’의 맛을 본 외국인들이 엄청 눈물을 쏟았다고 하죠. 눈물이 나오는 슬픈 신파도 그렇고, 한국 콘텐츠는 뭔가 격정적으로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서사와 연출을 만드는 데 능합니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이긴 하지만 신파 장르와는 명백히 다른 방향성의 영화입니다. 제목에도 썼듯이 ‘신파와는 다르다, 신파와는!’ 하고 강조를 하고 싶을 정도예요. 내용이나 인물 관계 등을 봤을 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199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르와 유사합니다. 중년 멘토와 청소년의 마음의 교감을 다룬 버디 무비 형식의 휴먼 드라마 장르죠. 이 장르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유명한 작품이라면 ‘굿 윌 헌팅’과 ‘여인의 향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버디 무비는 아니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와 ‘홀랜드 오퍼스’ 같은 영화도 비슷한 점이 있고요. 이 네 작품은 모두 1990년대에 나왔죠. 그리고 2002년에 나온 ‘뷰티풀 마인드’도 천재 수학자나 이념 대립의 시대적 상황 등의 소재 면에서 닮았다고 할만한 작품입니다.
말했듯이 한국 영화에서도 드물고, 최근에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이런 영화는 보기가 좀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문화 콘텐츠에서 감동의 코드라도 점점 복잡해지고 심오해지고 있거든요. 그나마 최근 작품 중에서는 2019년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그린북’ 정도가 덜 복잡하게 직관적인 감동의 코드를 담아낸 작품이라 1990년대 영화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본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도 마찬가지였고요.
저는 제목에서 이런 감동을 신파와는 다른, ‘착하고 쉬운 감동’이라고 썼습니다. 좀 더 풀어서 쓰면 영화 자체가 일단 착하다는 느낌이고(보통 ‘무해하다’는 표현을 쓰죠) 감동 코드도 쉽게 잘 ‘삼켜’ 지는 데다 ‘소화’도 잘 됩니다. 뭔가 이해하기 복잡하거나 정치적, 철학적으로 골치 아픈 요소를 담고 있어서 내면으로 소화하는데 어려움을 느낄만한 요소가 없는 영화입니다. 정말 쉽게 이해되고, 쉽게 감동을 느끼게 되는 영화입니다. 전혀 목이 막히거나 탈 날 일이 없죠.
전형적으로 ‘관람객 평점이 아주 잘 나오는’ 스타일의 영화예요.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고, 극장에서 선택했을 때 후회할 확률이 매우 낮은 영화.
그런데 사실 예고편을 봤을 때 ‘이 영화가 정말 그런 영화일까?’라는 의심은 들었습니다. 말했듯이 한국 영화에서는 이런 스타일의 영화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장르를 만들더라도 한국 영화에서는 어째서인지 쓸데없이 자극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거나 감정을 요동치게 만드는 신파 코드 같은 게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이유는 단순한데 이런 영화들이 흥행이 잘 되기 때문입니다. 입소문도 빠르게 퍼지고요. 반대로 마냥 착하고 훈훈한 분위기로 잔잔하게 감동을 주는 스타일의 영화는 생각보다 흥행이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가 마냥 착하고 쉬운 감동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무엇보다 주인공이 탈북자니까요. 한국 영화는 북한과 관련된 내용에서는 괘나 자극적이고 감정을 뒤흔드는 전개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주연배우가 최민식인데, ‘최민식’과 ‘북한’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영화가 ‘쉬리’입니다. 사실 최민식이라는 배우 자체가 한국 영화의 세고 자극적인 면모를 상징하는 배우이기도 합니다.(‘올드보이’의 오대수와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 같은 캐릭터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의심이 무색하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1990년대에 나왔던 할리우드의 ‘착한’ 휴먼 드라마 장르의 대표작들과 똑 닮은 영화였습니다. 최민식도 오대수나 장경철이 아니라 ‘굿 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 느낌이었고요. 방금 쓴 문장은 제가 쓰고도 놀랐습니다. 최민식이 로빈 윌리엄스라니! 사실 악역 캐릭터를 잘하던 배우가 나이가 들면서 정반대의 유순한 이미지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흔하게 있습니다. 게리 올드만이 대표적이죠.(반대로 선한 이미지의 로빈 윌리엄스도 악역을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최민식이 완전히 굿 윌 헌팅의 로빈 윌리엄스 느낌이 나는 캐릭터에 이렇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모습을 본 건 정말 신기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민식의 대표작 ‘올드보이’도 나온 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네요.
확실히 이 영화를 보면서 1990년대 할리우드 영화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심지어 영화의 스코어마저도 1990년대 가족 영화에 나올 법한 존 윌리엄스의 음악들과 유사한 느낌이더군요.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강당 연설 장면은 그냥 ‘여인의 향기’의 오마주 수준이었습니다.
‘굿 윌 헌팅’과 ‘여인의 향기’는 휴먼 드라마 장르를 대표하는 명작 영화들입니다. 재미와 감동뿐 아니라 뛰어난 작품성까지 갖추고 있죠. 하지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는 관람객들에게는 높은 평점을 받더라도 평론가들에게까지 높은 평점을 받기는 부족한 영화입니다. 이렇게 착하고 쉬운 감동을 주는 영화는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독보적으로 뛰어나지 않을 경우 내용 전개가 다소 작위적으로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갈등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후반부의 전개가 그렇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도 여인의 향기의 오마주 느낌이 나는 후반부 내용 전개가 꽤나 작위적입니다. 조금 오글거리기도 하고요. 물론 그렇다고 관객이 느끼는 감동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작위적인 전개는 역시 비평적으로는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두 주인공의 관계성 설정에도 작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굿 윌 헌팅’과 ‘여인의 향기’와 마찬가지로 두 남자의 정서적 관계성을 그려낸 버디 무비이기도 한데, 이 버디 무비로서의 관계성 설정에서 굉장히 한국적인 변형이 들어가 있습니다. 중년 남자와 청소년. 이런 관계를 할리우드에서는 쿨하게 우정처럼 그릴 수 있지만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서는 분명하게 ‘유사 부자’의 관계성으로 그려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유사 부자로 느끼게 만드는 설정이 너무 뚜렷하게 들어가 있어서 이것도 꽤나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확실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두 남자가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는 장면이 한국인의 정서에 부담 없이 받아들여지려면 ‘부자 관계’가 가장 자연스러운 그림이기는 하죠.
이런 작위적인 요소들로 완성된 이 영화의 ‘착하고 쉬운 감동’은 마치 영화가 관객의 입을 벌리고 감동을 직접 떠먹여 주는 듯한 방식으로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말했듯이 비평적으로는 높은 점수를 받기는 어렵지만, 관객에게는 전혀 나쁜 체험이 아닙니다. 영화가 떠먹여 주는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이 감동은 목구멍을 자연스럽게 넘어가 관객의 내면에서 아주 쉽게 소화가 되는 것이거든요. 훌륭한 명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높은 관람객 평점이 증명하듯이 관객을 만족시켜주는 것이야말로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의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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