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이 (녹정기)
녹정기는 최고의 무협 소설 작가인 신필 김용이 쓴 15작품(단편인 월녀검 포함) 중에서 가장 독특한 작품입니다. 무협 소설의 거장 작가가 쓴 작품이니만큼 녹정기도 당연히 무협 소설입니다. 하지만 평범한 무협 소설과는 너무도 차별화되는 특별한 개성을 이 작품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특별한 것은 무려 무협 소설의 주인공이 무공을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무공을 못하는 무협지 주인공이라니! 물론 요즘은 별의별 퓨전 하이브리드 이세계 짬뽕 판타지 무협물이 난무하는 시대이니 무공을 못하는 무협지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그다지 특이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녹정기가 1970년대에 나온 작품임을 생각하면 확실히 매우 비범한 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용의 작품들은 무협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역사 소설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사조삼부곡(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은 정강의 변으로 시작된 송나라와 금나라의 대립부터 몽골의 성장과 금나라의 멸망,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송나라의 대몽 항전, 결국 멸망하는 남송과 원나라의 건국, 이후 시작된 한족의 반격과 명나라의 건국까지의 중국 역사의 큰 흐름에 무림 영웅호걸들의 일대기를 자연스럽게 녹여내어 무협지이면서 동시에 역사 소설로도 뛰어난 재미와 완성도를 보여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녹정기 또한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강희제가 비중 있는 등장인물로서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그 외 오삼계, 이자성, 진원원, 대만 정씨 왕조의 인물들 등 실제 역사의 유명 인물들이 다수 작품에 등장하는 역사 소설로서의 성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공을 못하는 주인공에 상당수 실제 역사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작품이다보니 김용 소설 중에서도 가장 무협지 스럽지 않은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별한 개성은 바로 히로인이 일곱 명이나 등장하는 하렘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렘물이라는 장르 역시 현대의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에서는 매우 흔하기는 하지만 녹정기가 발표된 시기의 무협물로서는 역시 독특한 설정이었고 특히 일곱 히로인의 개성적인 면모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신박하고 흥미롭습니다.
이 일곱 히로인은 모두 주인공 위소보와 맺어지게 되어 ‘위소보의 일곱 부인’이 됩니다. 무공도 못하는 주인공이 일곱 명의 여인을 만나 그들을 모두 부인으로 거두게 되는 스토리 라고 요약하기만 해도 녹정기라는 작품이 얼마나 무협지로서 범상치 않은 작품인지 바로 느낌이 올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소개할 캐릭터인 ‘방이’는 바로 그 일곱 히로인 중의 한 명입니다.
히로인이 일곱 명이라고 해서 이 일곱 명이 모두 작품 내에서 동등한 비중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 위소보와 엮이게 되는 스토리도 제각각이고 위소보와의 관계에서 형성된 애정의 크기도 각각 달라요. 비중으로 따지면 거의 단독 혹은 투톱 여주인공으로 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비중 있는 캐릭터도 있고 그냥 일곱 명 숫자 채우기 느낌으로 거의 비중이 없는 캐릭터도 있습니다. 그런데 ‘방이’는 비중이 엄청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적은 것도 아닌, 조금은 어중간한 캐릭터입니다.
녹정기가 김용 소설 중에서 가장 분량이 방대한 내용이라서 작품이 전개될수록 주요 스토리와 중심 인물들이 계속 달라집니다. 방이는 녹정기의 초반부에 꽤 비중 있게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입니다. 반면 중반부가 넘어가면 거의 비중이 없어집니다.
제가 녹정기의 그 많은 등장인물 중에서 굳이 방이의 캐릭터 포스팅을 쓰게 된 이유는 초반부에 반짝 비중 있게 등장하는 방이의 모습이 너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녹정기에서 명실공히 압도적으로 인기 원톱인 히로인은 위소보의 전속 보디가드이자 위소보와의 애정 및 신뢰 관계도 가장 두터운 ‘쌍아’이고 저 역시 이 작품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를 한 명 꼽으면 쌍아이지만 그래도 왠지 글을 쓴다면 방이에 대한 글을 먼저 쓰고 싶은 생각이 내내 있었습니다.
일곱 히로인 중에서 방이의 등장 순서 두 번째입니다. 하지만 첫 번째인 목검병과 사실상 세트로 묶여서 짧은 시차를 두고 등장하기에 거의 처음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목검병과 방이는 동문 사형제로 두 사람이 함께 위소보로부터 도움을 받고 인연을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참 재미있습니다.
위소보는 청나라 황제(강희제)의 총애를 받는 관리이면서 동시에 청나라에 반역하는 세력인 반청복명 ‘천지회’의 간부 신분으로, 쉽게 말해 대립하는 두 세력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어느 날 황궁에 있는 위소보의 처소로 천지회의 부하가 목검병을 데려오게 됩니다. 목검병은 천지회와 마찬가지로 청나라에 반역하는 세력인 ‘목왕부’의 소군주입니다. 천지회와 목왕부는 청나라에 반역한다는 입장은 같지만 서로 다른 주군을 모시는 입장이라 대립하기도 하는데, 최근 두 세력간 충돌이 발생하여 천지회 측에서 목검병을 납치하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즉 위소보는 목검병을 인질로서 데리고 있게 된거죠. 그런데 이 가운데 위소보를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의 자객이 위소보의 처소를 공격해오고 자객에게 대항하는 과정에서 목검병이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인질이라는 입장도 있지만 부상으로 꼼짝못하게 된 목검병은 위소보의 처소에서 계속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되죠.
또 그러다가 얼마 후 목왕부의 자객들이 황제 암살을 목적으로 황궁에 침입하는데 결국 암살은 실패하고 경비대에게 모두 격퇴당합니다. 대부분 죽거나 도망쳤는데 그 중 자객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은 채 황궁을 떠돌다 우연히 위소보의 처소로 오게 돼요. 이 자객이 바로 방이입니다. 목검병은 방이를 알아보고 위소보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결국 위소보는 부상 당한 방이를 구해주게 됩니다.
즉, 부상 당한 두 여인을 위소보가 돌보게 된 상황입니다. 한 지붕 아래에 같이 살면서 말이죠. 그런데 위소보와 이 두 여인의 관계가 참으로 미묘합니다. 목검병은 처음부터 인질로 잡혀온 상황이었고 위소보가 처음에는 협박도 하고 짓궂은 장난으로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방이는 황제를 죽이기 위해서 온 자객인데 위소보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심복이라는 걸 알고 경계하는 마음을 품게 되죠. 뭐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부상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여자가 남자와 같은 방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경계심은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목검병의 경우는 나이도 어리고 남녀 사이의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천연이라 그런 방향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었지만요. 목검병의 이러한 천연 속성은 좀 심각한데, 나중에 위소보와 맺어지고 동침하게 된 이후에도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모를 정도예요.
아무튼 한 집에서 지내게 된 세 남녀가 서로 미묘하게 대립하고 경계하면서도 동시에 의지하게 되는 상황에서 차츰 흥미로운 관계성이 성립되어 갑니다. 특히 이 상황에서 정말 빛을 발하는 것이 방이의 츤데레 속성입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는 아직 방이는 위소보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었기 때문에 츤데레가 아니라 진짜로 위소보에게 성질을 내는 것이었지만, 그걸 위소보가 재치있게 받아치고 말장난으로 희롱하면서 정말 재미있는 상황들이 계속 벌어집니다. 이 상황에서 방이의 츤데레도 매력있지만 목검병의 천연 속성과 조합되어 더욱 더 두 여인의 매력을 극대화시켜요.
위소보라는 캐릭터는 ‘무공을 못하는 무협지 주인공’이라고 앞에서 소개를 했는데요. 그런 무공을 못하는 주인공이 작품 내에서 황제의 총애를 받는 고위 관리가 되고 동시에 청나라에 반역하는 세력의 간부가 되기도 했다가 결국 일곱 명의 아름다운 부인을 거느리는 성공한 인생을 이루게 된 것은 무공 대신 다른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처세술(더 정확히는 인맥 쌓기 기술/ 사람 다루는 기술)과 말빨입니다.
특히 온갖 허풍과 거짓말이 위소보의 말빨의 핵심인데 목검병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천연이라서 위소보가 하는 거짓말을 죄다 믿어버리는 순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옆에서 방이가 이런 헛소리나 하는 나쁜 놈 말 믿지 말라고 딴지를 걸고 그렇게 위소보와 티격태격 말싸움을 시작해요. 그 옆에서 목검병은 안절부절하며 구경하게 되고요.
이 그림이 참 귀엽지 않나요? 소설에서도 가장 재미있게 읽게 되는 파트이고 실사 드라마에서도 이 장면들이 정말 재미있어요. 저는 녹정기 드라마는 황효명 주연의 2008년 판만 봤는데 이 드라마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딱히 다른 연도 버전을 볼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가장 최근작인 2020년 판은 시간이 나면 한번 볼 생각은 있지만요.
아무튼 이 2008년 판 녹정기에서 방이와 목검병의 캐스팅도 아주 잘 되어서 정말 볼만한 그림이 나옵니다. 뭐 2008년 판 녹정기는 모든 여배우 캐스팅이 다 완벽했지만요.
이 장면의 재미를 완성시키는 건 역시 방이의 츤데레 속성입니다. 싸우다가 미운 정 든다고 위소보와 함께 지내고 도움을 받으면서 두 여인이 위소보에게 마음을 열고 이성적으로도 점점 끌리게 되는데 이 상황에서 물론 목검병도 귀엽지만 방이가 정말 끝내주게 매력적입니다. 늘 위소보를 핀잔 주고 위소보의 희롱에 화를 내면서도 점점 싫은 티가 사라져가고 위소보를 보는 눈이 차츰 따뜻한 눈빛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과의 간질간질 설레는 장면들이 계속 나오니 주인공이 무공을 전혀 못하는데도 녹정기가 최고의 남성 판타지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곱 히로인이 등장하는 하렘물이라서가 아니라 그 여인들의 매력이나 인연이 맺어지는 내용들이 너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거든요.
이렇게 초반에만 활약(?)하고 중반부 이후 쩌리가 되지만 방이는 위소보에게 있어 굉장히 특별한 여인인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실상 방이가 위소보의 첫 사랑이거든요.
위소보는 기녀인 어머니에게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로 태어났고 기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여자에게는 매우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과의 진지한 사랑에 눈을 뜬 것은 방이와의 만남 이후였습니다. 그런데 방이, 목검병과 처음 만나 한 집에서 같이 지내던 시기에는 아직 사랑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 여인은 결국 부상이 회복한 후 위소보의 도움을 받아 황궁을 나가게 되는데 이때 어떤 사건에 휘말리면서 위소보와 헤어지게 돼요. 그 후 시간이 흘러 다시 재회를 하게 되는데 이때 방이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위소보를 대하게 되고 이에 위소보는 방이에게 완전히 홀려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방이의 책략이었습니다. 방이는 목검병과 함께 신룡교 라는 또 다른 세력에게 납치되고 결국 신룡교에 입교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주로부터 위소보를 신룡교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방이는 미인계를 써서 위소보를 유혹하고 결국 위소보를 신룡교로 데려가는 데 성공하게 돼요. 비록 방이의 책략이긴 했지만 신룡교까지 가는 여정에서 두 사람이 알콩달콩 사랑을 속삭이는 모습은 이 작품에서 가장 핑크빛 분위기가 충만한 닭살 돋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소보는 예전에 자기에게 성질만 부리던 방이가 갑자기 열정적으로 사랑을 어필하며 상냥하게 다가오는 모습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고 진심으로 방이에게 격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이 위소보가 생애 처음으로 느낀 진지한 사랑의 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방이의 책략이긴 했지만 이 사랑이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방이 역시 줄곧 위소보를 좋아하는 감정이었고 방이에게 속아서 신룡교에 끌려가진 했지만 위소보는 여기서도 또 특유의 말빨과 기지를 발휘하여 신룡교 교주와 교주 부인 '소전'의 신뢰를 얻고 간부 자리까지 얻게 되거든요.(이 교주 부인도 결국 나중에 위소보의 부인이 됩니다) 방이에게 속았지만 결과적으로 신룡교에서도 일이 잘 풀렸으니 위소보는 방이를 용서하게 돼요. 물론 정신 못차리고 헤롱거리는 상태에서는 벗어났지만 방이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았고 결국 나중에 부부로 맺어지게 됩니다.
이 파트가 지나가면 방이의 비중은 작품 내에서 거의 없어집니다. 일곱 히로인 중에서 위소보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역할로 언제나 옆에 붙어서 수행하는 시종이자 보디가드 역할인 쌍아가 내내 제일 큰 비중을 가져가고, 히로인 중 가장 아름답다고 공인된 ‘아가’가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위소보가 ‘내 생애 가장 사랑한 여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엄청난 구애를 보내면서 쌍아 다음의 비중을 가져갑니다.(참고로 아가는 작품 속 등장하는 실제 역사의 인물인 이자성과 진원원의 딸로 설정된 캐릭터입니다. 진원원이 실존했던 경국지색의 여인이라서 작중 최고 미녀 타이틀은 아가가 아닌 진원원이 가져가 버립니다.)
작품의 중반부에는 엽기적인 SM 변태 플레이를 보여주는 황제의 동생 ‘건녕공주’의 비중이 굉장히 높고(건녕공주가 바로 위소보의 첫 경험 상대입니다) 후반부는 신룡교 교주의 부인인 ‘소전’이 비중 있게 등장해요. 일곱 히로인 중에서 제일 쩌리(?)인 ‘증유’는 뭔가 중간에 간단한 에피소드 하나로 위소보와 인연을 맺은 후 나중에 얼렁뚱땅 위소보의 여자가 돼버리고요.
아무튼 이렇게 뒤로 갈수록 방이의 비중은 거의 없어지지만 그래도 초반부 방이의 임팩트와 매력이 너무 커서 저로서는 일곱 히로인 중 쌍아 다음으로 좋아하는 캐릭터로 방이를 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일곱 명의 히로인이 각자의 스토리와 매력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아직 첫사랑도 해보기 전의 나름 순진했던(?) 위소보와 티격태격 하는 츤데레로 서로 정을 쌓아가고 이후 명령 수행을 위한 책략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남자의 혼을 빼놓는(?) 미인계로 위소보로 하여금 진정한 여성의 매력에 눈을 뜨게 만드는 등 방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준 매력적인 모습들은 녹정기를 무협소설이자 역사소설이면서 동시에 애정소설로도 정말 훌륭하고 재미있는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과 이런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김용이 얼마나 위대한 작가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서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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