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약 (의천도룡기)
무협 소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소설은 김용 작가의 영웅문 3부작입니다. 영웅문은 국내에 정식 계약 없이 발매된 해적판의 발매명이고(그런데 이 해적판이 국내에서 무려 800만 부가 팔렸죠) 원래는 ‘사조삼부곡’이 정식 명칭입니다. 1부 사조영웅전, 2부 신조협려, 3부 의천도룡기의 연작으로 구성된 시리즈이죠. 이 3부작 중에서 또 굳이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는다면 3부인 의천도룡기입니다. 김용의 작품은 드라마나 영화로 많이 제작되었고 지금도 제작되고 있는데 이 김용 소설 실사화 작품 중에서 양조위가 출연한 1986년 드라마판과 이연걸, 구숙정이 출연했던 영화판 의천도룡기가 가장 유명합니다.(물론 영화판에서는 동방불패가 좀 더 유명하긴 합니다) 그리고 게임판 의천도룡기도 유명하고 김용의 모든 작품(월녀검 제외)을 다룬 후속작 김용군협전의 경우는 국내에 ‘의천도룡기 외전’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되기도 했죠.
의천도룡기는 재미있어요. 물론 김용의 모든 소설이 다 재미있지만 그 중에서 특히 의천도룡기가 진행이 빠르고 시원시원한 전개를 보여주기에 김용 소설의 입문작으로(아예 무협 장르의 입문작으로) 많은 추천을 받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비교적 작품의 초반부에 세계관 최강급 고수로 올라서는데다 그 후 광명정에서의 육대문파와의 대결, 무당파에서 태극권을 배운 후 조민의 부하들과 대결하는 내용이 그야말로 김용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흥미진진하거든요. 시원시원한 사이다 전개로 무협지를 읽는 독자가 추구하는 대리만족의 재미를 충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의천도룡기의 전반부 내용이고 또 비슷한 분량의 후반부 내용이 남아 있지만 전반부 만큼 재미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 전반부 내용이 너무 재미있어서 의천도룡기가 김용 소설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연걸 주연의 의천도룡기 영화도 딱 이 전반부 진행까지만 나오고 영화가 끝납니다.(마지막 장면에서 후속편 예고를 하기는 하지만 결국 후속편이 제작되지는 못했습니다.) 사실 의천도룡기의 재미를 맛보려면 딱 이 전반부 내용까지만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작품 자체는 이렇게 재미있고 인기 있고 유명하지만 정작 주인공인 장무기는 다른 김용 소설 주인공들에 비해 별로 인기 있는 느낌은 아닙니다. 당장 사조삼부곡 1부와 2부의 주인공 곽정, 양과와 비교를 해 봐도... 영웅 대협의 이미지로 남성 독자층에 인기가 많은 곽정, 소용녀와의 애절한 로맨스로(거기에 미남!) 여성 독자층에 인기가 많은 양과와 비교하면 뭔가 장무기는 어중간한 느낌이 들죠. 장무기의 이미지를 한 단어로 정리하면 ‘우유부단’입니다. 제가 앞 문단에서 의천도룡기 후반부 내용이 전반부만큼 재미있지는 않다고 했는데, 바로 주인공 장무기의 우유부단한 면모로 인해 은근히 답답한 고구마 전개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우유부단한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장무기의 여자관계입니다. 김용 소설은 제가 ‘무협지의 탈을 쓴 연애 소설’이라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연애 스토리의 비중이 큽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무협지 주인공은 대부분 잘생기거나 남자답거나 영웅다운 면모가 있고 무공 실력도 출중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대상이고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죠. 그래서 작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 캐릭터들이 주인공에게 연심을 품게 되는데 그래도 김용 작품의 경우 대체로 원톱 히로인이 정해져 있는 편이고 나머지는 쩌리급 비중이라 딱히 히로인 쟁탈전 같은 게 벌어지지는 않아요. 하지만 의천도룡기에서는 김용의 모든 소설 통틀어서 가장 치열한 히로인 쟁탈전이 벌어집니다. 심지어 결말도 열린 결말입니다! 물론 히로인 쟁탈전의 승패가 결국 가려지긴 하지만 마지막에 패배한 쪽이 크게 한 방 먹이면서 소설이 열린 결말로 끝나 버립니다.
이 히로인 쟁탈전의 패배자가 바로 주지약입니다. 주지약은 김용 소설 캐릭터 중에서 가장 복잡한 평가를 받는 캐릭터입니다. 이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고 싫어하는 독자도 많습니다. 싫어하는 독자는 주지약을 천룡팔부의 아자나 강민처럼 희대의 악녀 취급을 합니다. 하지만 주지약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많습니다. 그녀가 충분한 히로인의 자질과 자격이 있으며 본의 아니게 나쁜 길로 빠져서 악행을 저지르고 히로인 쟁탈전에서 패배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입장이죠. 저도 그녀를 좋아하는 독자 중 한 명입니다.
의천도룡기에서 최종적으로 히로인으로 등극한 것은 원나라 공주인 조민입니다. 원래는 ‘민민 특목이(민민테무르)’라는 몽고식 이름인데 조민이라는 한족식 이름을 새로 지어서 작중 그 이름을 쓰고 다닙니다. 김용 팬덤에서는 의천도룡기 히로인 쟁탈전의 지지층이 나뉘어서 조민파 vs 주지약파로 갈라지며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둘 다 좋아! 라는 입장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반대 쪽을 비토하는 식이죠. 물론 확정 히로인이 조민이니 당연히 조민파가 좀 더 세력(?)이 크고, 반대쪽 입장으로부터 미움받는 정도도 주지약이 조민보다 훨씬 큽니다. 조민은 딱히 미움받는 캐릭터는 아니에요. 주지약을 히로인 자리에서 밀어낸 게 얄밉다 소리 듣는 정도죠. 주지약파 입장에서는 밉다기 보다는 별로 정이 안간다, 정도랄까. 반면 주지약은 그냥 악녀 취급하며 미움받는 경우가 꽤 있는 편이고요.
주지약은 억울합니다! 라고 많은 주지약파들은 주장합니다. 물론 그녀가 나쁜 짓을 저지른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조영웅전의 구천인 빙의를 해서.. “너희는 살인해 본 적도 없고, 죄를 지은 적도 없단 말이냐” 이러한 악당 구천인의 항변에 사조영웅전의 곽정, 황용 거기에 주백통, 일등대사 같은 쟁쟁한 인물들이 찍소리도 못합니다. 홍칠공이 나서기 전까지는. 네... 사실 그렇습니다. 무협지 세계의 윤리관을 깊숙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복잡한 논쟁이 벌어질 겁니다. 법을 무시한 폭력적인 행위들이 정의로 포장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죠. 김용의 또 다른 소설 녹정기에 등장하는 정의로운 집단 ‘천지회’가 알고 보면 오늘날 세계 최악의 범죄집단 중 하나인 삼합회의 기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 김용 소설 여자 캐릭터들 중에서 성격 이상한 애들이 원래 좀 많습니다. 히로인이나 히로인급의 비중 있는 여자 캐릭터라도 얄짤 없어요. 진짜 심각한 수준으로는 녹정기의 건녕공주가 있고 그보다는 덜 하더라도 천룡팔부의 목완청, 소오강호의 임영영도 얘네들의 꼬장(?)으로 신세 망친 강호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당장 주지약과 히로인 쟁탈전을 벌인 조민만 하더라도 장무기한테 홀리기(?) 전까지 원나라 공주 신분으로 나쁜 짓 많이 하고 다녔죠. 김용 소설이 이런 성격 이상한 캐릭터들의 악행들을 대충 눈감아 주기도 하고 대놓고 악역으로 포지셔닝된 캐릭터를 개과천선 시킨 후 선역으로 바꾸기까지 해요. 그러니 주지약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그것만으로 히로인 자격이 박탈될 건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주지약의 흑화에는 어느 정도 참작할만한 사연이 있기도 합니다. 사실 주지약파인 독자들이 의천도룡기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물이 주지약의 사부인 멸절사태입니다. 어리석은 편견으로 무림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장무기를 ‘사악한 대마두’로 낙인찍어 버리고 그 오판을 죽을 때까지 수정하지 않습니다. 장무기가 선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수 차례 있었는데도 본인의 고집으로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고 결국 주지약에게도 평생 장무기를 사랑하거나 그와 부부가 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강요해 버립니다. 또 그래 놓고는 의천검과 도룡도를 얻기 위해 주지약의 미모(!)를 활용해서 장무기를 유혹하라는 계략을 지시하기까지 하죠!
이런 상황이 되면 주지약은 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주지약은 광명정 때부터 장무기에게 연심을 품었고 어린 시절에 만났던 인연까지 있는데다 만안사에서 장무기의 도움을 받은 이후로는 명백히 사랑에 푹 빠진 상태였어요. 그런 상태에서 사부에게 장무기를 사랑하지 말라는 맹세를 강요받고 그 얼마 뒤에 사부는 죽어버렸으니 온전한 정신일 리가 없죠.
이후의 주지약의 행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아주 나쁘게 해석할 수도 있어요. 일단 주지약은 사부에게 한 맹세를 씹어버립니다. 장무기와 결혼까지 하려고 했으니까요. 이게 단지 사부의 명령대로 의천검과 도룡도를 얻기 위한 계략의 차원일 수도 있지만 주지약이 장무기를 사랑한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결국 사부에게 한 맹세를 씹고 진심으로 장무기와 맺어지려 했다는 게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장무기와 혼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이미 장무기의 뒤통수를 쳐서 의천검과 도룡도를 탈취하고 구음진경을 습득을 해버립니다. 결과적으로 사부와의 맹세, 장무기와의 관계에서 본인에게 가장 유리한 부분들만 취사선택을 한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가장 이기적인 선택을 한 것이죠.
이걸 보고 주지약이 정말 악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런 짓을 그냥 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해치면서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행보들로 주지약의 본성이 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의 영악한 면모는 김용 소설의 여자 캐릭터들에게 흔하게 발견되는 속성이고 주지약을 악녀라고 비난하는 쪽도 사실 그녀가 ‘흑화’했다고 말하지 원래 본성이 악하다는 주장은 거의 없거든요. 사부와의 맹세, 그리고 장무기의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사실 장무기에 대한 마음도 내내 혼란스러운 상태였을 거고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무림 명문정파인 아미파의 장문인 지위에 올라버리니 그에 걸맞는 실력을 가지기 위해 구음진경에 대한 탐욕을 가지는 것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녀로서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눈앞의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주지약에 의해 죽은 줄 알았던 은리가 마지막에 살아서 돌아옵니다! 여기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은리가 살아 돌아온 건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죠.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고 땅에 매장까지 했는데 멀쩡히 살아서 돌아오다니?? 결국 은리가 살아 돌아 온 것은 작가로서도 주지약을 완전히 버리는 캐릭터로 생각한 게 아니라는 증거가 됩니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죠. 주지약은 처음부터 작가가 히로인으로 생각하고 만들어낸 캐릭터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실 만화든 소설이든 장편 연재를 하면 이런 경우가 많은데 연재를 하면서 처음에 구상했던 내용이나 설정들이 자꾸 수정이 되는 거예요. 애초에 주지약의 신분 부터가 연재분과 단행본의 설정이 다르거든요. 처음 연재분에서는 원나라에 대항해 거병한 명교 인물 ‘주자왕’의 딸로 나오는데 단행본에서는 주자왕이나 명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뱃사공의 딸로 설정이 수정되죠.
저는 주지약이 처음에 히로인으로 설정되었다가 작가의 마음에 바뀌어서 조민에게 히로인 자리를 빼앗긴 거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유사한 사례로는 만화 ‘딸기 100%’의 토죠 아야를 들 수 있죠. 물론 작가는 아야보다 츠카사가 인기가 많아서 결국 츠카사가 최종 히로인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저를 비롯한 아야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죠.(우리 아야짱이 츠카사보다 인기가 떨어질 리가 없다능!) 저는 이런 히로인 결정 문제에서는 처음에 잡아 놓은 설정대로 뚝심 있게 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딸기 100%에서 주인공 마나카가 처음 반하게 된 딸기 팬티의 주인공은 아야였습니다. 의천도룡기에서도 히로인 후보 4인 중 장무기가 가장 처음 만난 인물이 주지약이에요. 어린 시절에 만난, 그것도 매우 좋은 인연이었죠. 저는 원래 이런 식으로 어린 시절에 알았던 상대와 커서 다시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를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제가 조민 보다는 주지약을 지지하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사실 이거예요. 물론 장무기와 어린 시절에 만난 건 은리도 있는데 이 경우는 주지약과는 상반되게 별로 좋은 만남이 아니었죠.
소설 설정상 주지약은 굉장한 미녀이고 캐릭터 자체가 매력 있습니다. 흑화한 이후의 모습까지 다 종합해서 평가하더라도 그녀의 복잡하고 변화무쌍한 캐릭터성이 매력 있다고 느끼는 독자가 많아요. 결국 매력 있는 캐릭터라서 그녀의 지지층이 형성되는 것이고, 그에 따라 평가가 갈리는 행보들도 좋은 쪽으로 평가하는 의견들이 다수 나올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의천도룡기 드라마판에서도 사실상 주지약은 조민과 함께 투톱 히로인으로 대우합니다. 김용 소설 드라마판의 여주인공은 당연히 당대 잘 나가거나 유망주인 미녀 여배우를 캐스팅하는데 의천도룡기의 경우는 조민과 함께 주지약도 거의 동급의 배우를 캐스팅 해서 대놓고 투톱 히로인의 대등한 경쟁 구도로 만들어 버리죠. 2003년 판에서 조민의 가정문, 주지약의 고원원 배우가 유명했고 최근작인 2019년 판에서도 조민의 진옥기와 주지약의 축서단이 비주얼 쌍벽을 이루며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의천도룡기는 김용 소설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고 유명한 작품입니다. 김용의 모든 작품들은 김용 작가가 가진 고유의 스타일과 특성을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작품마다 차별화된 개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의천도룡기 또한 다른 김용 작품에서는 보기 힘든 개성과 특색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의천도룡기만이 가진 특색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바로 주지약입니다. 히로인 쟁탈전에서 패배한 캐릭터. 선역이고 히로인 포지션이었으나 흑화하고 악역이 된 캐릭터. 하지만 그럼에도 복잡한 평가의 여지가 있고 히로인 못지 않은 매력이 있으며 최종적으로는 작품을 열린 결말로 끝내버린 캐릭터. 이런 캐릭터는 김용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지약이야 말로 신필 김용이 창조해낸 가장 특별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트위터 @dszlife
'캐릭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릭터 이야기] 쵸코 (Happy!) (0) | 2021.08.18 |
---|---|
[캐릭터 이야기] 방이 (녹정기) (0) | 2021.08.03 |
[캐릭터 이야기] 이사장 (감옥학원) (0) | 2021.07.04 |
[캐릭터 이야기] 몽념 (킹덤) (0) | 2021.06.18 |
[캐릭터 이야기] 존 스노우 (왕좌의 게임) (0) | 2021.06.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