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테니스 만화 ‘Happy!’(해피)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쵸코는 굉장히 클래식한 빌런입니다. 뭐 해피 자체가 이제는 클래식 반열에 들어가는 만화이기는 합니다. 1990년대 중반에 연재되었던 만화니까요. 이 만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부모 없이 어린 동생을 셋이나 키우고 있는 가난한 소녀가장인 주인공 미유키가 집 나간 오빠가 빌린 사채빚 2억 5천만엔을 갚기 위해서 테니스에 매진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쵸코는 이런 미유키를 엄청나게 괴롭히는 부잣집 딸내미이고(뻔한 설정이죠) 테니스 선수이기도 해서 미유키와 라이벌 구도를 이루기도 합니다. 전형적인 클래식 타입의 빌런 답게 인성이 그야말로 개차반이고 온갖 비열한 방법과 수단으로 미유키를 죽어라고 괴롭힙니다. 만화를 읽는 독자들을 정말 제대로 혈압 오르게 만드는, 매우 완성도가 높은 악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는 만화 Happy!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인 미유키는 원래 테니스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녀였는데 아무래도 테니스가 부자들이 즐기는 귀족 스포츠라서 결국 테니스를 계속 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취직을 목표로 하는 고교생으로 지내게 되는데요. 졸업 후 백화점 판매직으로 취업이 내정되었지만 오빠가 사채 빚 2억 5천만 엔을 남기고 잠적해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인생이 꼬이게 되죠. 백화점 월급으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으니 돈을 더 벌 수 있는 성매매 업소로 팔려 갈 상황이었는데 어찌어찌 프로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테니스로 빚을 갚아 나가는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만화에 대해서 제목과는 정반대의 매우 암울한 만화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주인공에게 행복은 고사하고 불행과 고난이 끝도 없이 이어지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고난 끝에 낙은 옵니다. 결말은 꽤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이고 스포츠 만화로서 그야말로 감동적인 인간 승리의 드라마를 보여주기도 해요.
쵸코는 악역으로서 주인공을 고난에 빠뜨리는 데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최종 결말이 미유키에게 상당히 만족스러운 해피엔딩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쵸코의 괴롭힘도 미유키의 행복을 이끌어주는 과정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실제로 쵸코 때문에 미유키가 덕을 본 상황도 꽤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게 봉황 테니스 클럽의 회장인 우다코 여사가 미유키에게 프로 선수가 될 기회를 제공해 준 이유가 바로 쵸코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봉황과 대등한 수준의 재벌이자 라이벌 테니스 클럽인 드래곤의 회장 딸인 쵸코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테니스 스타로 대성할 것 같은 상황이 되자 이런 쵸코의 기세를 막기 위해 봉황의 회장이 미유키를 고용하게 된 것이죠. 사실 봉황의 회장은 과거에 자신의 테니스 코치였던 미유키의 아버지를 짝사랑했지만 고백도 못 해보고 일방적으로 실연당하는 바람에(미유키의 아버지에게 피앙세가 있다는 걸 알게 됨) 이 집안에 엄청난 증오심을 품게 되고 미유키에 대해서도 절대 테니스 선수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 라이벌 클럽인 드래곤에서 쵸코라는 거물급 스타가 등장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쵸코를 막기 위해 미유키를 프로 선수로 데뷔 시킨 거예요. 쵸코가 없었다면 미유키는 결국 테니스 선수가 되지도 못한 채 성매매 업소로 팔려가게 되었을 겁니다.
쵸코 입장에서는 드래곤 클럽의 라이벌인 봉황 클럽에서 자기를 막겠다고 데뷔시킨 선수이니 미유키를 미워하게 된 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성질도 더러우니까요. 거기에 추가적인 이유가 또 있습니다. 봉황의 회장 우다코 여사에게 이찌로 라는 아들이 있는데 이찌로와 미유키가 학교에서 테니스부 선후배 사이로 지내던 시절부터 내내 굉장히 사이가 좋거든요. 고백만 안했을 뿐 거의 서로 좋아하는 사이예요. 그런데 쵸코도 이찌로를 좋아합니다. 당연히 이찌로와 사이가 좋은 미유키를 미워하지 않을 수가 없죠.
결국 쵸코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에 미유키가 큰 장해물이 되고 있는 겁니다. 바로 ‘테니스 선수로서의 성공’과 ‘사랑’이죠.
쵸코는 미유키를 내내 쓰레기에 바퀴벌레 취급하지만 미유키의 테니스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절대 표현은 안합니다. 사실 의식적으로도 미유키가 라이벌 이라거나 뛰어난 선수라거나 하는 생각을 안 하는 거 같아요. 하지만 당연히 무의식에는 미유키와 시합했던 상황의 그 힘겨웠던 순간들이 제대로 박혀 있죠. 쵸코가 그렇게 필사적으로 미유키를 나락으로 빠뜨리려고 노력한 데는 분명 자신이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을 가로막을 수 있는 미유키의 실력과 재능에 대한 경계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이찌로에 대한 사랑도 있습니다. 사실 쵸코는 처음에는 이찌로에게 진지한 사랑의 감정은 품지 않았습니다. 그저 드래곤과 대등한 재벌 가문인 봉황 가문의 아들인데다 얼굴도 잘 생겼고 테니스도 잘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많은 이찌로를 본인에게 가장 어울리는 상대로 낙점한 것 뿐이에요. 그리고 미유키와 이찌로의 사이를 방해한 것도 이찌로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기 보다는 미유키가 실연 당해서 고통받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미유키를 실연 당하게 할 목적으로 이찌로를 자기 남자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유혹하지만 생각보다 이찌로가 잘 넘어오지 않자 점점 오기가 발동하고 그러는 과정에서 쵸코는 진심으로 이찌로를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찌로가 사랑하는 건 미유키였고 때문에 쵸코는 이찌로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더욱 더 미유키를 증오하게 되죠.
하지만 이렇게 충분히 미워할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쵸코가 미유키에게 저지른 짓거리들은 절대 참작이 될 수 없는 것들이긴 합니다. 쵸코는 정말 비열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미유키를 괴롭혔습니다.
시작은 미유키가 다니던 봉황 테니스 클럽의 다른 선수들을 부추겨서 미유키를 왕따시키게 한 것입니다. 그저 따돌리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지시하기까지 하는데 미유키의 라커에 생선을 넣어서 옷에 냄새가 배게 하거나 신발에 날계란을 넣어두기도 하고 속옷을 감춰버려서 미유키가 짧은 스커트에 노팬티인 상태로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 등 매우 저열한 방식으로 괴롭히죠. 본인이 직접 봉황 클럽의 라커룸에 숨어 들어 다른 사람의 테니스 라켓을 미유키의 라커에 넣어두어서 미유키가 도둑으로 몰리게 만들기도 하고요.
미유키와 쵸코는 나이도 동갑이라 같은 해, 같은 대회에서 프로 데뷔를 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인 괴롭힘이 시작돼요. 쵸코의 방식이 정말 악랄한 건 본인이 직접 미유키를 괴롭힌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자기의 유명세를 이용해 적극적인 여론 조작과 언론 플레이를 펼쳐 미유키를 일본의 ‘국민 밉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쵸코는 미유키에 대한 온갖 루머와 악평을 다 퍼트리고 다니는데 이게 작품 내내 미유키를 괴롭히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이에요. 쵸코의 이런 여론 공작의 결과로 미유키는 가는 곳마다 야유와 비난을 듣는 처지가 됩니다.
쵸코는 결국 미유키를 나락의 궁지까지 몰아 넣습니다. 국민 밉상이 되어 일본의 전 국민에게 미움받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미유키에게는 사랑하는 이찌로와 봉황 클럽에서 알게 된 절친 기쿠코라는 마음을 지탱해주는 주변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쵸코가 교묘히 상황을 조작해 이찌로와 자기가 이미 연인 사이라고 미유키에게 믿게 만들고 기쿠코는 사실 레즈비언으로 몰래 미유키를 좋아하고 있었는데 이걸 또 쵸코가 미유키에게 알려주는 바람에 미유키가 큰 상처를 받게 만들죠.
거기에 미유키가 가난한 월세방에서 월세를 밀리면서 근근히 살고 있는 걸 알게 된 후 집주인에게 찾아가 더 많은 월세를 제시하며 자기에게 방을 내달라고 하죠. 미유키는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쵸코는 꾸준히 방해 공작을 펼쳤고 결국 미유키는 어린 동생 세 명과 함께 집에서 쫓겨납니다. 쵸코는 비 오는 날 집에서 쫓겨나 흠뻑 젖은 채 거리를 떠돌게 된 미유키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아주 행복해 합니다. 악마네요, 악마.
이게 끝이 아닙니다. 쵸코는 미유키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자질마저 끝장내버리려고 합니다. 우선 쵸코는 홈리스가 된 미유키 형제들에게 접근해 자기가 알고 있는 부잣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갈 수 있도록 소개를 시켜줍니다. 그런데 그 부잣집은 유명한 쌍둥이 테니스 선수가 사는 곳인데 이 곳에서 미유키는 그 쌍둥이 선수들의 히팅파트너 역할을 해주게 돼요. 히팅파트너 역할을 오래 하면 상대가 치기 쉬운 코스로 샷을 날리는 버릇이 들게 돼서 테니스 선수에게는 굉장히 치명적이라고 하는데요. 이렇게 미유키의 테니스 선수로서의 자질을 박살내 버리는 게 쵸코의 악랄한 계획이었습니다.
이 내용까지가 대략 만화의 전체 내용의 1/3 정도입니다. 나머지 2/3 분량에서도 쵸코는 비슷한 수준의 괴롭힘을 계속 이어나가요. 그런데 앞에서 밝혔듯이 이 만화의 결말은 해피엔딩이고, 미유키는 저런 악랄하고 지독한 쵸코의 괴롭힘과 그에 따른 수많은 위기 상황들을 모두 극복해냅니다. 그렇다면 미유키를 끝장내려고 한 계획이 끝끝내 실패하고만 쵸코의 결말은 어떨까요?
해피는 성장만화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성장하는 게 없어요. 주인공 미유키는 그냥 시작부터 완전체예요. 굳이 성장한 게 있다면 주력 기술인 라이징 타법을 익힌 정도고 그외 테니스 실력은 ‘성장’이라기 보다는 그냥 잠자고 있던 실력이 눈을 뜨고 ‘각성’해나가는 양상으로 그려집니다. 그럼 누가 성장하느냐? 주인공이 아닌 주변사람들입니다. 만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비교해보면 주인공만 그대로이고 주변사람들은 모두 달라져 있습니다. 물론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한 모습입니다.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이찌로는 당당히 스스로의 앞길을 개척해나가는 멋진 남자가 되었고 기쿠코도 여러 어려운 상황과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훌륭한 테니스 선수로 탈바꿈하죠. 초반에는 미유키를 괴롭히는 또 다른 빌런으로 등장하는 준지라는 사채업자 캐릭터가 있는데 이 캐릭터가 나중에는 미유키가 가장 마음을 의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됩니다. 자기 목적을 위해 미유키를 무자비하게 이용하는 입장이었던 봉황 회장 역시 점점 미유키를 순수한 의도로 지원해주게 되고요.
그렇다면 쵸코는? 쵸코 역시 성장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쵸코를 끝까지 개과천선 시켜주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악역이 마지막에 잘못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하는 전개는 생각보다 굉장히 호불호가 갈리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악역이 어느 정도의 악한 행동을 했느냐에 따라서 평가는 달라집니다. 쵸코 정도의 악역이라면 분명히 개과천선 시켰을 때 독자들의 불만이 꽤 터져 나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쵸코는 끝까지 악역으로 있어 주는 게(최소한 선역은 되지 않는 게) 캐릭터와 작품 전체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분명 옳은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쵸코는 개과천선 까지는 아니어도 분명히 성장은 했습니다. 어쩌면 개과천선 했을지도 몰라요. 이게 살짝 열린 결말입니다.
이 작품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내용은 세계 최고 권위의 테니스 대회인 윔블던입니다. 이 대회에서 미유키는 4강에서 쵸코를 이기고, 결승에서 작중 최종보스 캐릭터인 사브리너 니코리치를 꺾고 우승을 차지합니다. 쵸코는 4강에서 미유키에게 패했을 때와 결승에서 미유키가 니코리치를 상대로 최선을 다해 선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두 번의 큰 심경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우선 미유키에게 패배한 직후에 기존의 가식과 위선을 완전히 벗어던지게 됩니다. 그 동안은 ‘쵸코 스마일’로 대표되는 철저한 가식적 이미지로 팬과 여론 관리에 정말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러나 4강 패배 이후 얼굴에 웃음이 싹 사라지고 성질 더러운 걸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더 이상 가식을 부리지 않게 돼요. 착한 척이라도 하던 과거에서 착한 척조차 안 하게 된 지금이 오히려 성장이 아니라 퇴행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쵸코의 그런 착한 척은 뒤에서 몰래 악랄한 짓거리를 하기 위한 속임수였음을 생각하면 결국 가식이 사라진 건 확실히 인간적인 성장이 맞습니다. 쵸코의 악행 대부분이 뒤에서 몰래 꾸민 음모였기 때문에 그걸 감추는 가식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악행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죠.
그 후 쵸코는 미유키와 니코리치의 결승 시합을 TV로 보면서 미유키의 기적 같은 선전에 마음이 동해 눈물을 흘립니다. 이 눈물은 정말 순수한 감동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이 눈물에 그 동안 자신이 미유키에게 했던 악행에 대한 뉘우침과 반성이 들어 있다면 이것으로 ‘쵸코는 개과천선 했다’고 결론 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후일담에서 끝끝내 쵸코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결국 쵸코가 개과천선을 했는지는 열린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일담에서 쵸코는 기쿠코와의 시합에서 심판 판정을 두고 기쿠코와 인! 아웃! 하면서 말싸움 하는 모습으로만 등장할 뿐입니다. 쵸코와 미유키와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타당성 있는 상상을 해보자면 쵸코와 미유키 사이에서 결국 모든 앙금은 사라지고 둘이 무난한 관계가 되거나 더 나아가서는 꽤 친한 사이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건 미유키가 작품 내내 쵸코가 자기를 그렇게 괴롭힌 사실을 몰랐다는 겁니다. 가식 대마왕이었던 쵸코는 자기가 제일 싫어하는 미유키에게 그 누구보다도 더한 가식(착한 척)을 부렸고 그 결과 표면적으로 둘은 ‘친한 사이’였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히는 상대를 미유키는 ‘친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좀 개연성이 없기는 한데, 미유키의 주변사람들은 모두 쵸코의 악랄한 실체를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미유키에게 쵸코의 실체를 알려주지 않았는지 굳이 이유를 찾자면 없지는 않아요. 주변사람들은 미유키가 심리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테니스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방침이었고 때문에 쵸코에 대해서도 괜히 미유키를 심란하게 할까봐 말해주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좀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리 심리적인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미유키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쵸코에 대해서 끝까지 그 실체를 말해주지 않은 건 역시 무리수인 내용입니다.
아무튼 미유키는 쵸코가 자기를 그렇게 괴롭힌 걸 몰랐기 때문에 여전히 쵸코를 만나면 친한 사이로서 다가갔을 테고, 중요한 건 가식을 버린 쵸코의 반응인데 물론 예전처럼 착한 척, 친한 척은 안 할 테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예전에 한 나쁜 짓을 다 고백하면서 너는 나를 미워해야 한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사실 쵸코의 가장 큰 성장은 테니스 선수로서 테니스에 대한 진지한 마음을 먹게 된 데 있습니다. 그래서 쵸코는 오로지 순수하게 미유키를 강력한 라이벌이자 꺾어야 할 상대로 보게 되었을 거고 그런 기본적인 마인드로 미유키를 대할 것입니다. 그 외에는 미유키에 대한 악감정은 거의 사라졌을 테니 친한 사이로 다가오는 미유키를 굳이 나쁜 태도로 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사실 미유키와 쵸코 사이에 앙금은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는 건 후일담에서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미유키의 주변사람인 기쿠코와 준지를 통해서입니다. 기쿠코와 준지는 똑같이 미유키를 엄청나게 좋아하고 그런 미유키를 괴롭히는 쵸코에 대해서는 당연히 강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후일담에서 쵸코와 기쿠코가 시합 중 말싸움 하는 모습을 보면 그냥 테니스 선수로서의 승부욕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지 오히려 사적인 감정은 전혀 없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거기에 둘이 싸우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준지가 “그 두 사람은 대체 왜 그 모양이지?” 라고 언급하는데(준지가 미유키에게 쓴 편지내용에서) 이 말투도 뭔가 한심한 친구들을 가볍게 핀잔주는 것 같은 말투죠. 즉 과거에 그렇게 쵸코를 증오하던 기쿠코와 준지가 지금은 쵸코에게 거의 앙금이 없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인 겁니다. 기쿠코와 준지가 이럴 정도면 다른 미유키의 주변사람들과 미유키 본인 역시 쵸코와는 어떤 나쁜 감정도 없을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쵸코는 매우 악랄한 빌런이지만 동시에 상당한 매력을 가진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사실 악역이 주인공 못지않은, 아니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끄는 작품들도 흔하게 있기는 한데 물론 쵸코는 그 도가 지나친 악랄함을 생각하면 결코 인기를 끌만 한 캐릭터는 아니지만(쵸코는 철저히 독자의 미움을 받도록 설계된 캐릭터입니다) 확실히 눈에 띄는 매력적인 면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모도 예쁘고 머리도 좋고 이찌로에 대한 사랑으로 설레고 괴로워하는 모습들은 나름 귀엽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미유키 못지않은 엄청난 재능을 가진 훌륭한 테니스 선수입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Happy! 또한 엄청난 걸작인데 이 작품이 이런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쵸코라는 매력적인 악역의 활약이 매우 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쵸코는 이 작품에서 비중만 놓고 보면 거의 투톱 주연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작품의 거의 모든 내용에 다 관여하면서 재미와 긴장을 계속 만들어내거든요. 이런 쵸코야 말로 거장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창조해낸 최고의 악역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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