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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사이

[소설과 영화 사이] 라플라스의 마녀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실사화 작품 리뷰)

by 대서즐라 2021. 1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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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세 편을 몰아서 읽었습니다. 이전에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전혀 읽은 게 없었어요. 특별히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세 편을 몰아서 읽은 것은 아닙니다. 작품마다 제각각 이유가 있었습니다. ‘라플라스의 마녀’의 경우는 히로세 스즈가 출연한 실사 영화를 보기 위해서 소설을 먼저 읽은 거고요. 나머지 두 작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인어가 잠든 집’도 읽게 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라플라스의-마녀-영화-포스터

 

사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 작가죠. 작품이 너무 많으니까요. 유명한 대표작들만 추려도 수가 어마어마해서 시간과 전자책 구입 비용 등 부담이 너무 큽니다. 물론 이번에 읽은 세 작품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면 대표작 몇 편을 더 추가로 읽을 마음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그다지 재미있지 않았거든요.

 

엄청나게 다작을 하는 작가라면 모든 작품이 걸작이거나 수작이기는 힘듭니다. 몇몇 작품들은 태작이거나 범작, 어쩌면 졸작도 있을 수 있겠죠.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는 수작 이상 급을 뽑아주는 타율이 괜찮기 때문에 지금처럼 유명한 인기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겁니다.

 

제가 읽은 세 작품을 통해 발견한 이 작가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소재의 참신함’입니다. 솔직히 이렇게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생경한 소재들에 대한 연구와 조사를 언제 다 하고 사는 것인지 신기할 지경입니다. 소재가 참신하면서 다양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소재를 다루는 방식까지도 유니크해요.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기 작품들이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개성과 특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뭔가 눈에 띄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요소들이 이 작가의 작품에는 반드시 들어가 있습니다.

 

라플라스의-마녀-책

 

하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의 재미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대표작들 중에서는 제가 미친 듯이 몰입해서 읽을만한 엄청 재미있는 작품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단 제가 읽은 세 작품은 깊이 몰입할 만큼의 재미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재미없지는 않았지만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실사화 작업이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드라마, 영화로 제작되었죠.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 같은 작품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실사화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너무 많이 실사화되다 보니 그냥 처음부터 실사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쓰는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입니다. 초기 작품들은 모르겠지만 비교적 최근 작품들은 분명 어느 정도는 실사화에 대한 고려가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만 보더라도 확실히 그런 면모가 엿보이는 작품입니다.

 

아오에와-마도카

 

소설을 읽기 전에 영화를 미리 본 것은 아니지만, 영화화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영화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그려지더군요. 물론 어떤 소설을 읽든 문장으로 묘사된 이미지들을 머릿속에 실사로 상상해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아주 구체적으로 ‘영화의 장면’ 같은 이미지들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의 주연 배우가 히로세 스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구체적인 이미지들이 그려졌죠. 주인공 마도카의 이미지가 히로세 스즈와 너무 찰떡이었기 때문에 마도카가 나오는 모든 장면들은 문장을 읽는 데도 생생하게 이미지가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소설 자체도 처음부터 영화화까지 계획된 상업 자본의 기획 콘텐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히로세 스즈가 신비한 능력을 가진 소녀로 등장하는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 테니 그 원작이 될 소설을 써 주시오~’라는 의뢰를 받고 쓴 소설 같달까요.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죠. 다만 확실히 워낙에 많은 작품들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다 보니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이 점차 그런 대중 친화적인 매체 콘텐츠들의 톤과 접근법을 따라가는 경향은 가지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라플라스의 마녀’의 영화판은 더욱더 기획 콘텐츠스러운 작품으로 나왔습니다. 감독이 미이케 다카시인데, 저에게 요즘 미이케 다카시는 ‘기복의 대명사’인 감독입니다. 그의 작품 중 엄청난 만족감을 준 작품도 있고 큰 실망을 안겨준 작품도 있습니다. 작품의 완성도가 아주 요동칩니다. 그런데 갈수록 실망스러운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에 진출해서 ‘커넥트’라는 한국 드라마를 연출 중이라고 하는데요. 솔직히 큰 기대는 안됩니다.

 

후쿠시-소타-히로세-스즈

 

라플라스의 마녀도 만족보다는 실망 쪽인 작품입니다. 역시 가장 실망스럽게 느껴졌던 점은 철저히 자본의 기획에 맞춰서 크리에이터로서 어떤 야심이나 도전도 없이 틀에 박힌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창의성보다는 기획성이 더 드러나는 작품. 원작도 그랬지만 영화에서는 더 심해집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일 테지만요.

 

역시 가장 심한 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아오에 역으로 사쿠라이 쇼가 캐스팅된 점이겠죠. 물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는 중년의 대학 교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많고 이런 작품들이 실사화 되었을 때 원작의 설정보다 다소 젊은 이미지의 배우들이 캐스팅된 적은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쿠라이 쇼는 권위 있는 중년의 지구과학 교수 역을 하기에는 역시 너무 어려 보입니다. 2006년에 나온 ‘허니와 클로버’에서 풋내기 대학생으로 나오던 모습과 지금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사쿠라이 쇼가 영화를 망쳐버린 건 아닙니다. 애초에 아오에 교수의 역할이 주인공인데도 별로 큰 활약은 없고 그저 관찰자+해설자(상식)+리액션(비상식)+운전사 역할만 하는 거라 특히 오랜 세월 일본의 ‘국민 예능돌’ 아라시의 멤버로 활동하며 단련해온 사쿠라이 쇼의 리액션 스킬이 아오에 교수 역에는 적절히 부합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교수가 너무 어리고 권위가 없어 보이는 모습이 딱히 거슬리는 순간은 없고 히로세 스즈와 케미도 좋더군요. 남매 케미 정도랄까.

 

아오에역-사쿠라이-쇼

 

저는 오히려 히로세 스즈가 조금은 기대 이하였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마도카의 이미지가 정말 히로세 스즈와 찰떡이라고 생각했고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장면들이 그려졌는데요. 막상 실제 영화에서 히로세 스즈의 마도카 캐릭터를 보니까 생각했던 것과 느낌이 많이 달라서 당황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도카의 비중이 소설에 비해서 꽤 많이 줄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마도카의 비중이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 자체가 많이 축소되었습니다. 생략된 내용도 많고 급하게 넘겨버리는 내용도 많습니다.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의 초반부 진행이 너무 빨라서 조금은 어리둥절할 거예요. 그런데 저는 영화가 이렇게 급하게 진행되면서도 작품의 핵심 설정과 내용들을 빠짐없이 잘 전달하고 미스터리의 흥미를 효과적으로 유지시키는 걸 보고 미이케 다카시가 확실히 능력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작정 대책 없이 내용을 줄인 게 아니라 아주 경제적으로 효율 좋게 영화를 뽑아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미이케 다카시는 초중반까지 이럭저럭 유지되던 균형을 중반 이후까지 유지시키지 못합니다. 결국 과하다 싶을 만큼 축소된 내용과 빠른 전개는 스토리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망쳐버리고 캐릭터의 매력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중에서 마도카의 매력이 원작만큼 살지 못한 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고요.

 

마도카역-히로세-스즈

 

사실 원작 소설부터가 주인공 다운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스토리 상의 진짜 주인공은 영화에서 토요카와 에츠시와 후쿠시 소타가 연기한 아마카스 부자라고 할 수 있는데 정작 이들이 작품에 등장하는 비중은 크지 않고 이들의 관계 바깥에 존재하는 외부인인 마도카와 아오에가 더 큰 비중으로 아마카스 부자의 갈등에 끼어드는 인물 구도를 가지고 있거든요. 아오에는 대놓고 관찰자이자 리액션 담당으로 치부한다고 하더라도 마도카의 역할은 영화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굉장히 애매합니다. 주인공인데도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뭔가 어중간하게 핵심 인물들의 관계성에 발을 걸치고 있는 캐릭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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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설에서는 마도카의 캐릭터성과 매력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지만 그런 내용들이 많이 축소된 영화 판에서는 너무 어중간하게 붕 떠 있는 캐릭터로만 인식돼버리는 거죠. 그나마 히로세 스즈처럼 존재감이 큰 배우가 연기했기에 어중간함이 조금은 덜해졌을 수 있지만요. 하지만 마도카 캐릭터의 역할과 한계는 분명히 정해져 있는데 그 선을 불쑥불쑥 넘나드는 히로세 스즈 특유의 에고 넘치는 연기가 영화의 균형을 깨뜨린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영화의 무게중심을 자꾸 어긋나게 만들었달까요.

 

주인공-마도카

 

일본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대체로 일본 영화는 상영시간이 긴 편입니다. 어떤 장르의 영화든 2시간을 꽉 채우는 경우가 많고 소설이나 만화 등 원작이 있는 작품은 2시간이 넘는 긴 러닝타임도 굉장히 흔합니다. ‘라플라스의 마녀’는 2시간이 넘지 않는데 저는 역시 좀 더 완성도 높은 결과를 위해서 러닝타임이 10분~15분 정도는 더 길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기획 콘텐츠스럽게 틀에 꽉꽉 맞춰서 만들어졌어요. 이미 기획 단계에서부터 여러 가지 조건들이 다 정해진 채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느낌입니다. 주인공은 히로세 스즈와 사쿠라이 쇼, 러닝타임은 2시간 이내일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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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미이케 다카시가 수많은 조건들에 발이 묶인 채 이 영화를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개입되는 만큼 창의성을 제한하는 틀이 함께 따라오는 것이야 창작 분야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특히 일본의 실사 콘텐츠들이 경쟁력을 갈수록 잃어가는 큰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일본의 문화 콘텐츠 업계가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등 거대한 성과를 내고 있는 한국에 비해 너무 뒤처진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 틀을 깨부수는 과감한 시도가 없이는 한국과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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