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책을 거의 전자책으로 읽다 보니 읽고 있는 책의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안 될 때가 많습니다. 종이책으로 읽을 때는 당장 손에 잡히는 책의 무게와 두께, 한 페이지에 들어가는 텍스트의 빼곡함 정도로 쉽게 파악이 가능한데 전자책으로는 이게 참 애매하더란 말이죠. 사실 역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전자책이 종이의 차이도 없고 자간, 장평, 줄간격이 모두 동일하게 사용자가 지정해놓은 설정대로 적용되기에 작품마다 딱 페이지 수만 가지고도 분량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을 텐데요. 그래도 몸에 기억된 책의 분량을 계산하는 메커니즘은 종이책을 기준으로 되어 있기에 이런 인식 기준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저는 누마타 마호카루의 ‘유리고코로’를 읽고 이 책의 내용이 굉장히 짧다고 느꼈습니다. 내용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르게 읽기도 했지만 그와 별개로 정말 내용 자체가 짧다는 느낌이 계속 드는 거예요. 실제로 페이지 수로 보면 제 리디북스 서재에 보관된 책들 중에서 거의 가장 짧은 축이기는 합니다. 그래도 이 책을 종이책으로 손에 들었을 때 어느 정도 얇은 책일지 여전히 감은 안 옵니다.
아무튼 저에게 유리고코로는 ‘재미있고 내용이 짧은 책’으로 일단 인식에 박혔습니다. 그리고 내용이 짧은 경우라면 대체로 실사 영화를 만들 때는 상당히 유리한 조건입니다. 보통의 경우 책 한 권에 담기는 분량이 영화 한 편 분량보다는 많기 때문에 소설을 실사 영화화할 때 소설 내용에서 많은 부분을 쳐내게 됩니다. 그러니 소설 내용이 짧을수록 쳐낼 내용이 줄어드니 원작의 내용과 재미를 최대한 온전히 실사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유리고코로의 소설 원작이 너무 재미있었기 때문에 이 내용이 온전히 모두 실사 영화에서도 옮겨지길 바랬고, 그런 기대를 품고 영화를 봤는데 결과는 좀 난감했습니다.
(이 글에는 본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작 내용의 거의 절반 정도를 날려버렸더군요. 그와 함께 원작의 내용이 가진 재미와 캐릭터의 완성도도 절반 이상 날아가 버렸습니다. 단언컨대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물입니다. 원작 소설은 제가 최근 읽은 책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었는데, 영화는 이렇게 실망스럽게 나오다니!
유리고코로의 원작 소설 작가인 누마타 마호카루는 여성입니다.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책의 맨 마지막의 옮긴이 후기를 읽고 알았는데, 저는 이 사실 자체가 책을 읽은 전체 감상에서 일종의 '마무리 해답'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아! 작가가 여자였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이 작품에 이런 내용과 이런 캐릭터가 나올 수 있었던 거구나!’
여성 크리에이터의 일반적인 특성이란 쉽게 정의 내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수의 작가들마다 모두 각자의 개성과 특성이 있는데 딱 둘로 나누어지는 ‘성별’을 기준으로 간단하게 일반화된 특성을 정의 내리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애초에 해서도 안되는 일입니다. 사실 여자 작가의 작품이라도 딱히 남자 작가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면모를 발견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가끔씩은 있더란 말이죠. 딱 보고 나서 ‘이건 백 프로 여자가 만든 내용이야’ 스러운 작품들이. 당장 떠오르는 작품 중에서는 조던 스콧 감독의 영화 ‘크랙’이 있습니다. 조던 스콧은 거장 감독 리들리 스콧의 딸이에요. ‘크랙’은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인데 보고 나서 ‘이건 정말 여성 감독이 아니면 못 만들 영화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제니퍼 켄트 감독의 공포 영화 ‘바바둑’도 그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요.
유리고코로는 읽을 때는 작가의 성별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제가 읽은 다른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소설과는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죠. 그리고 끝에 옮긴이 후기에서 작가가 여성이라는 걸 알게 되고, 아아 어쩐지... 하고 손바닥을 쳤습니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 소설입니다. 그런데 연쇄살인마가 끔찍한 살인들을 벌이는 내용인데도 전혀 무섭거나 혐오스러운 느낌이 없습니다.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책이 굉장히 ‘따뜻하다’는 느낌이었어요. 마음의 어딘가가 고장 나서(유리고코로가 없어서)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 주인공 미사코. 당장 사형대에 올려야 할 이런 범죄자를 어찌 이렇게 따뜻한 연민으로 감싸줄 수 있단 말입니까. 살인마가 주인공인 애절한 로맨스물이자 가족 드라마? 이런 모순된 장르적 특성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황스럽지만, 독자로서 상당히 몰입되고 재미있게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애절하게 와닿았던 내용이 미사코가 끔찍한 연쇄살인마라는 진실이 드러난 후 가족들이 내린 결단입니다. 물론 그 전에 미사코는 가족들이 진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선택을 했습니다. 하지만 강에 뛰어든 미사코는 결국 구조되었고 이때 미사코의 아들 료스케(소설의 화자입니다)까지도 죽을 위기를 겪게 됩니다. 가족들(미사코의 부모, 여동생, 남편)은 큰 충격에 빠지고 미사코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 회의에 들어갑니다.
보통은 두 가지 선택 중 하나죠. 미사코의 죄를 묻어두고 온 가족이 죄의식을 짊어진 채 살아가는 것. 굉장히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가족 하나하나의 양심의 문제도 있고 무엇보다 끔찍한 살인자의 본성을 지닌 미사코를 한 가족의 아내이자 엄마로서 살아가게 하는 위험성은 매우 크니까요. 그렇다면 아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대처로서 미사코를 자수하도록 만드는 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미사코는 생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미사코에게 감옥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것은 죽는 것 이상의 고통임을 가족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결국 미사코를 살려둘 수가 없다는 결단을 내린 가족들은 수면제를 먹이고 몸에 돌을 매달아 호수에 미사코를 던져 버립니다.
그리고 미사코의 아들 료스케를 위해 미사코의 동생인 에미코가 미사코가 됩니다. 즉 죽은 미사코는 살아 있는 것으로 하고 여동생인 에미코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버린 거예요.(그냥 간단하게 실종되었다고 해버립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처음 등장하는 미스터리는 화자이자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료스케의 어린 시절 기억입니다. “엄마가 바뀌었다.”
료스케는 어린 시절에 몸이 크게 아파서 병원에 길게 입원한 적이 있는데 퇴원하고 집에 와보니 엄마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 나이도 어렸고 주변에서 전부 이 ‘새로운 엄마(에미코)’를 ‘이전 엄마(미사코)’와 동일한 사람으로 대우하니 어린 료스케도 그 흐름대로 새로운 엄마를 진짜 엄마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애초에 자매이니 외모도 닮았을 테고요.
이런 내용 전개는 굉장히 흥미롭고 충격적입니다. 단순히 미사코를 위해 가족들이 정말 뼈아픈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형부를 사랑하는 동생이 언니를 죽이고 형부의 아내 자리를 빼앗았다는 상황으로 보일 수 있는 내용이 되거든요. 물론 미사코를 죽이는 계획이 순전히 에미코의 그런 의도 때문에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가족들이 가슴이 무너지는 고민 끝에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린 것이고, 이 과정에서 에미코가 그런 마음을 진지하게 품고 의견을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에미코는 무의식 중에 ‘언니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실제로 형부를 사랑한 건 사실이거든요) 이후 내내 죄책감에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최후반부에 알고 보니 미사코가 살아 있었다 라는 놀라운 반전이 드러납니다. 이 반전도 정말 좋았습니다. 정말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나 할까요. 미사코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 작품에 존재하는 모든 미스터리를 한 방에 풀어주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거든요. 딱 미사코가 살아 있다는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모든 안개와 의문에 사르르 걷히면서 완벽하게 내용이 정리가 되고 작품의 주제와 가치가 온전하게 독자의 심장으로 전달이 됩니다. 반전이 나오는 작품들은 많이 봤지만 이런 경험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반전이 밝혀진 후에도 의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거나 떡밥성 내용들이 정리가 안 되는 작품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유리고코로는 그런 게 정말 1도 없이... 마음의 찝찝함이 조금도 남지 않고 완벽하게 정리되어 버립니다.
물론 처음에 말한 대로 이 작품의 내용이 별로 길지 않고 크게 복잡한 내용도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잡한 미스터리는 아니어도 이렇게 심장에 절절히 와닿는 센 한방이 있기 때문에 유리고코로는 갬-성 미스터리 작품으로 정말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옮긴이 후기에서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읽고 손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독특한 느낌의 미스터리는 여성 작가이기에 창조해낼 수 있는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전반적인 미스터리의 내용 말고도 전체적으로 여성 작가니까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묘사나 표현이 작품에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미사코 라는 주인공 캐릭터의 설정 자체가 그런데, 이 작품은 화자인 료스케가 엄마(미사코)가 쓴 수기를 읽게 되는 내용의 액자식 구성으로, 미사코 또한 작중 1인칭 화자로서 등장하거든요. 남자인 료스케의 1인칭 서술과 여자인 미사코의 1인칭 서술이 확실히 느낌이 달라요. 미사코의 1인칭 서술 파트에서 여성 작가의 특성이 담긴 묘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성관계를 ‘해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성관계를 해체당하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여성 작가가 아니라면 나오기 힘든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영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영화는 원작 내용의 절반 정도를 삭제해버렸습니다. 원작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입장에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료스케의 동생인 요헤이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뭐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작에서도 내용상 요헤이의 역할은 별로 크지 않거든요.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단순한 이유로 요헤이가 삭제된 것이 아닙니다. 요헤이는 료스케의 동생이지만 미사코의 아들이 아니라 미사코가 ‘처분’된 후 가짜 미사코가 된 에미코의 아들입니다. 즉, 애초에 영화에는 에미코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요헤이도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화에는 남편을 제외하고 미사코의 다른 가족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남편보다는 부모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결단을 내리는 게 더욱 애절하고 가슴 아픈 내용인데, 이런 내용이 다 빠져버린 거예요.
영화에서는 남편이 혼자 이 결단을 내리고 미사코를 죽이려는 상황도 둘만의 애절한 상황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소설 보다 좀 더 로맨스물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점은 영화 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 스릴러 ‘로맨스’ 장르로서의 성격이 소설보다 더 선명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이 점을 소설과는 다른 영화만의 장점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심지어 배우가 마츠야마 켄이치와 요시타카 유리코니까요. 이런 선남선녀 배우가 연기하니 더더욱 애틋한 로맨스물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리는 거죠.
하지만 역시 내용적으로 봤을 때 소설의 완성도가 영화보다는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살인마인 미사코를 연민으로 따뜻하게 감싸주는 상황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와닿느냐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 내용을 진행함에 있어서 로맨스물의 가슴 아픈 이별 같은 분위기는 왠지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그보다 훨씬 무겁고 절망적인 분위기의 가족회의가 되어야 맞고, 당연히 부모님도 등장해야 합니다. 이런 끔찍한 존재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절망감과 죄책감을 가진 채로 말이죠.
그리고 요시타카 유리코는 정말 미스캐스팅입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배우이고 이 영화에서도 너무너무 예쁘게 등장하지만,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미사코가 너무 예쁘게 나오다 보니 그 자체로 이 캐릭터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지장이 생기는 거예요. 마츠야마 켄이치랑 아주 그냥 꽃미남 꽃미녀 둘이서 아름다운 로맨스물을 찍고 있잖아요! 소설과 가장 느낌이 달랐던 점이 이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결코 이런 분위기의 작품이 아니거든요.
심지어 미사코의 중학생 시절 배우는 키요하라 카야라니! 음침하고 사회성 없고 마음이 심하게 고장난 미사코라는 캐릭터에 너무도 맞지 않는 캐스팅이었습니다. 이 배우들이 딴에는 음침한 분위기를 내려고 하는데 조금만 방심해도 미모가 펑펑 뿜어져 나오니(?) 말랑말랑한 로맨스물 같은 느낌이 돼버리는 거예요.
미사코는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그만둔 후 매춘부가 되어 거리를 돌아다니게 되는데 요시타카 유리코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매혹적인) 모습으로 나오는 게 이 매춘부 시절 모습입니다. 원래 내용대로라면 반쯤은 노숙자 같은 분위기에 거리에서 아무한테나 몸을 파는 망가진 여자라는 느낌이 팍팍 나야 하는데 완전히 최상류층만 상대하는 멀끔한 고급 창부의 비주얼로 나오는 거예요. 아니면 ‘레드스패로’에 나왔던 제니퍼 로렌스가 연기한 섹시한 여자 스파이 같은 느낌이랄까.
물론 보통은 이런 작품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되는 여배우는 당연히 외모가 예쁘고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연급 여배우란 원래 그런 존재니까요. 사실 요시타카 유리코는 이미 예전에 ‘뱀에게 피어싱’같은 작품에서 퇴폐적이고 과감한 노출 연기도 보여주었고 이런 망가진 여주인공 캐릭터에 적합한 여배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배우보다는 감독이나 영화 제작위원회의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배우의 본래 외모가 어떠하든 영화에 어떤 느낌과 분위기로 등장하는지는 감독의 연출에 따라 달라지는 거니까요. 왜 좀 더 망가진 느낌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걸까요? 뭔가 감독이 전체적으로 영화를 예쁘고 아름답게 찍으려고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예쁘고 아름답다고 좋은 건 아니거든요.
거기에 요시타카 유리코가 탑 급의 여배우 중에서는 다소 과감한 연기도 적극적으로 소화 한다는 점을 감독이 최대한 활용(?)하려 한 것인지, 불필요한 야한 장면들이 영화에 꽤 많이 나옵니다. 꽤나 본격적인 정사 장면도 있는 데다가(물론 이건 내용상 필요한 장면이긴 합니다), 미사코가 전 직장 동료와 있는 장면에서 가슴이 주물러지거나 팬티가 벗겨지는 장면 같은 건 소설에는 나오지도 않는 내용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자극적인 장면들을 굳이 넣는 것은 지극히 영화적인 각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등장인물과 내용이 상당 부분 축소되어 후반부 전개의 개연성이 엉망으로 무너집니다. 특히 료스케의 연인인 치에를 협박하는 남자의 설정을 야쿠자로 바꿔버린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무리수입니다. 도대체 뭔 수로 네댓 명의 야쿠자를 중년 여인인 미사코가 혼자서 몰살시켜 버린 것인지 납득이 안되죠. 엄마인 미사코가 살아 있었다는 진실과 그 정체가 밝혀지는 내용도 원작에 비해 너무 어정쩡하고요. 결말도 상당히 찝찝해요.
다만 결말의 찝찝함은 소설도 동일하기는 합니다. 끔찍한 범죄자를 따뜻한 연민으로 감싸주는 내용이 마지막까지 이어진다는 건 확실히 당황스러운 결말이었거든요. 영화는 이런 결말의 내용마저 다소 축소되었기 때문에 범죄자에 대한 연민 자체도 축소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것도 사실 좀 애매합니다. 기본적인 내용 자체는 동일하니까요. 그래도 소설과 같이 말도 안 되는 훈훈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결말을 내지 않은 것만은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소설에 대한 저의 평가도 조금은 오락가락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런 훈훈한 결말이 어이없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꽤 마음에 들기도 했거든요. 하여튼 여러모로 굉장히 독특하게 좋은 작품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확실하게 실망스러웠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뭐 원작을 생각하지 않고 본다면 요시타카 유리코가 너무 예쁘고 매력적으로 나왔다는 점만은 높게 평가할 수 있을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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