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키리시마가 동아리 그만둔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영화 중 하나입니다. 아마 제가 지금까지 본 일본영화 중에서 TOP5 안에... 아니 TOP3 안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너무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이기도 했습니다. 충격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인데, 영화가 예상을 뛰어넘게 너무 좋았기 때문인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영화의 결말 때문입니다. 결말에서 료야와 히로키가 나누었던 그 대화. 제가 본 모든 영화 속 대화 장면 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대화 장면이에요. 히로키가 던진 질문에 대한 료야의 대답.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히로키는 멍한 표정을 짓고, 저도 같은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어요. 이 영화는 내 인생 영화다, 하고 그 순간 확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키리시마가 동아리 그만둔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에게 인생영화 수준의 영화이지만 실상은 그다지 알려진 작품은 아닙니다. 뭐 대체로 일본영화들이 그렇습니다.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도 쉽지 않은 게 일본 영화니까요. 그래도 은근히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영화이고 이 영화의 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역시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야구치 시노부 정도로 유명하진 않더라도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영화 감독입니다. 이 감독의 작품 중 미야자와 리에가 출연 ‘종이달’은 국내 영화팬들 사이에서도 꽤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작품입니다. 저도 매우 재미있게 보았고요.
영화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데 원작 소설은 국내에서 청소년들이 꽤 읽기는 하는 거 같습니다. 이 책의 구글 연관 검색어로 ‘독후감’이 있더군요. 잘은 몰라도 학교의 독후감 수행평가용 책으로 권장되는 책 중 하나인가 봐요.
책의 국내 정식 번역 제목은 ‘내 친구 기리시마 동아리 그만둔대’입니다. 이 책은 서점에서 ‘청소년 도서’ 카테고리로 분류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영화의 내용만 놓고 본다면 청소년들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청소년 (교양)도서’로 분류하기에는 (부적절하다기 보다는)조금 이질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에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이 청소년 도서로 분류된 걸 보고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잠깐 생각해보고 쉽게 답은 나왔습니다. ‘책과 영화의 내용이 많이 다른가 보다’
그리고 책을 읽었습니다. 예상대로 영화와 많이 다르더군요. 내용 자체가 다르다기 보다는, 책에는 싱싱한 원재료들이 준비되어 있고 영화가 이 재료를 가지고 맛깔난 요리를 완성해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네, 책에는 이야기의 재료들이 잔뜩 준비되어 있었지만 정작 이 재료들로 하나의 유기적인 플롯이 완성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책은 여섯 명의 학생들(남학생3, 여학생3)이 각자의 시점에서 자신과 친구들의 학교 생활에 대해 일기를 쓰듯이 1인칭으로 서술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챕터는 총 일곱 개인데, 서술자가 되는 여섯 학생 중 야구부 히로키만이 처음의 짧은 프롤로그 챕터를 추가로 서술해서 총 2개 챕터의 화자가 되고 나머지 다섯 학생은 각각 한 개 챕터 씩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챕터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야구부, 기쿠치 히로키
배구부, 고이즈미 후스케
브라스밴드부, 사와지마 아야
영화부, 마에다 료야
소프트볼부, 미야베 미카
다시 야구부, 기쿠치 히로키
배드민턴부, 히가시하라 가스미(14세)
이렇게 여러 명의 화자가 챕터 별로 나눠서 서술하는 형식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주로 미스터리 장르에서 효과적으로 활용되는 방식입니다. 물론 이 소설은 미스터리 장르가 아니고 학교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과 그 사건이 미친 영향에 대해 다양한 학생들의 관점과 입장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 사건은 이미 작품의 제목에 명시해놓고 있습니다. ‘키리시마라는 학생이 동아리를 그만두었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건입니까? 별로 이게 무슨 의미인지 잘 와닿지가 않습니다. 고교 생활에서 동아리 활동의 비중이 일본만큼 크지 않은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더더욱 와닿지가 않겠죠. 최소한 ‘학교를 자퇴했다’ 정도는 돼야 사건이지. 학교 동아리를 그만두는 정도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잖아요?
물론 사람에 따라, 경우에 따라 다를 수는 있습니다. 예컨대 슬램덩크에서 지역 대회 예선을 앞두고 서태웅이나 채치수가 농구부를 그만두었다고 해봅시다. 이건 좀 와닿네요. 이 정도면 사건은 사건입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키리시마는? 슬램덩크의 채치수나 서태웅 정도의 존재인가요? 일단 배구부의 주장이고 리베로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는 선수입니다. 실력도 출중하다고 합니다. 키리시마가 그만둠으로써 배구부의 성적에 큰 영향이 있을 수도 있겠죠. 배구부의 성적이 안 나와서 누군가의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삶이란 언제나 그런 개연성의 연속이니까요.
그러니까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 걸로 엄청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면 충분히 만들 수는 있습니다. 실제 제가 소설보다 먼저 보게 된 영화에서는 그런 느낌으로 플롯이 전개됩니다. 그런데 소설은 영화와는 전혀 달라요. 프롤로그의 히로키 챕터를 제외하면 배구부 후스케의 이야기가 가장 먼저 나오는데, 이 챕터에서만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 것)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고 뒤로 갈수록 키리시마의 일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취급됩니다. 각 챕터의 화자들 중에서 키리시마와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이 대부분입니다. 영화와 소설의 분위기가 전혀 다르죠.
즉 키리시마 라는 학생과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 사건 자체가 그냥 맥거핀입니다. 영화에서는 맥거핀이고(플롯에 기능적으로 활용됨) 소설에서는 맥거핀 조차도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소설에서는 유기적으로 완성된 플롯 자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낼 재료는 있죠. 그것도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를 완성시킬 무척 흥미로운 재료들입니다. 실제로 영화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완성해 냈습니다. 재료가 좋았던 덕도 있지만 역시 영화를 상당히 잘 만든 겁니다. 소설을 읽고 영화에 대해 더욱 감탄할 수 밖에 없었어요.
영화 속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당연히 소설에 제시된 재료들을 그대로 쓸 수는 없습니다. 몇 가지 설정들이 변경되었습니다. 일단 프롤로그를 제외하고 소설의 첫 서술자로 등장하는 후스케는 영화에서 비중이 거의 없습니다. 배구부 자체가 그렇습니다. 제가 소설을 읽을 때 히로키의 프롤로그 챕터가 끝난 후 바로 등장한 후스케의 챕터를 보고 ‘후스케가 누구더라?’ 라고 생각할 정도로 영화에서는 거의 존재감이 없는 캐릭터입니다. 내용 상으로 키리시마와 가장 관련이 된 캐릭터가 후스케이고 키리시마의 동아리 퇴부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도 배구부인데 영화에서는 이 비중을 대폭 줄여버렸어요.
이는 영화가 소설 상에서 다루어진 청소년기의 삶과 다양한 고민들 중에서 특정한 주제 한 가지를 부각시키는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스쿨 카스트’입니다.
슬픈 현실이지만 현대 사회는 계급 사회입니다. 사실 인간 사회에서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역사상 거의 없었죠. 학교는 ‘작은 사회’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학교에도 계급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영화판에서 좀 더 직접적으로 스쿨 카스트라는 주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소설에서도 이런 학생들의 계급 의식에 대한 언급이 굉장히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여섯 명의 서술자 중에서 후스케가 그런 내용은 가장 적습니다. 반면 다른 서술자의 챕터에서는 이런 내용이 계속 등장하는데 특히 영화부의 료야와 야구부의 히로키는 계급의 최하층과 최상층이라는 대조적 입장으로 흥미로운 관점의 차이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브라스밴드부 아야와 소프트볼부 미카는 남학생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여학생들의 계급 구조에 대한 흥미로운 묘사를 보여주고요.
제가 영화를 먼저 봐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소설에 등장하는 여섯 학생들이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의 매력적인 재료들로 보이더군요. 물론 영화를 통해 이미 최상의 이야기가 완성된 걸 보았으니 더 이상 상상력이 발휘될 여지는 없었지만요.
그럼 이제 소설에 묘사된 각 학생들의 입장과 상황을 정리하고 영화에서 이 재료들을 어떻게 변형하고 엮어서 ‘스쿨 카스트’를 주제로 삼은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를 완성해 냈는지 순서대로 분석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후스케는 말했듯이 키리시마와 가장 연관된 점이 많은 학생입니다. 이건 별 상관없는 얘기이긴 한데 제가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구입한 책에는 챕터 목차에 후스케의 풀네임이 ‘이즈미 후스케’로 나오더군요. 그런데 이 학생의 진짜 이름은 고이즈미 후스케입니다. 제가 구입한 판본에 인쇄오류가 있었던 것인데 사실 이것 때문에 이 학생이 누구였는지 얼른 떠올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책에서는 배구부 아이들이 ‘후스케’라고 부르고 영화에서는 비중이 적어도 별로 언급은 안되지만 미카를 비롯한 반 학생들이 ‘고이즈미’라고 부르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본 후 책을 읽으면 얘가 누구였는지 헷갈리게 되는거죠. 별 상관 없는 얘기지만.
아무튼 후스케는 소설 상으로는 키리시마가 퇴부함으로써 삶에 가장 큰 변화가 생긴 캐릭터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후스케가 키리시마의 자리인 리베로의 보결 선수거든요. 팀의 주장이자 에이스인 키리시마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후스케는 주전으로 뛸 기회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둠으로써 후스케가 덜컥 주전 리베로로 발탁이 된 거예요.
이 작품이 배구부 중심의 이야기로 전개된다면 당연히 후스케는 주요 등장인물이겠죠. 그런데 이 작품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다양한 부 활동을 하는 여러 학생들의 이야기와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고 후스케의 사연도 그 중 하나일 뿐이에요. 특히 영화가 만들어낸 작품의 중심 플롯에서 후스케는 상당히 벗어나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굳이 후스케에게 한 가지 역할을 부여하기는 했습니다. 학교내 최상위 여학생 그룹인 리사 그룹에 미묘한 균열을 일으키는 역할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등장인물들이 바로 이 리사 그룹입니다. 영화에서는 이 아이들을 ‘리사 그룹’이라고 명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리사가 완전한 퀸비의 포지션으로 등장합니다. 대중문화 속 퀸비 캐릭터의 대명사인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레지나 조지 같은 캐릭터인 거죠. 그런데 소설에서는 딱히 리사가 명확하게 퀸비라고 밝혀지지는 않아요. 물론 소설에서도 리사는 사나와 함께 이 그룹에서 영향력이 꽤 강한 편으로 묘사되지만(명확하게 언급되기 보다는 행간을 보면 그렇습니다) 분명하게 퀸비 포지션인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룹 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라는 언급으로 1인자에 가까운 포지션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 정도예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좀 더 선명하게 학생들의 계급 구도를 잡아 놓았고 리사가 레지나 조지, 사나가 그레첸 위너스 같은 포지션으로 그려집니다.(그런데 리사와 사나는 우연히도 현재 케이팝 걸그룹으로 활동하는 외국인 멤버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두 명의 이름과 동일하네요)
리사 그룹의 학생은 모두 네 명인데 나머지 두 명은 미카와 카스미입니다. 책의 챕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리사 그룹 중에서는 미카와 카스미가 책에서 서술자 역할로 등장합니다.
아무튼 다시 후스케 이야기로 돌아가면 소설에서는 후스케가 리사 그룹 아이들과 그다지 접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리사 그룹의 미카가 후스케를 의식(?)하는 걸로 나옵니다. 물론 좋아하는 건 아니다 라고 언급하지만(이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 소설에서는 미카가 배구부의 다른 학생과 사귀는 사이입니다.) 키리시마의 그늘에 가려진 채로 아둥바둥 노력하는 후스케를 계속 의식하는 모습이 나와요. 이건 미카 본인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해서 보기 때문인데 미카도 리사 그룹이라는 상위 계급의 멤버이지만 부활동에서는 자기보다 뛰어난 재능들에 열등감을 느끼고 있거든요.
아무튼 키리시마의 퇴부 후 주전이 된 후스케가 당연히 키리시마 만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고전하는 모습에 리사와 사나가 비웃는 듯한 발언을 하게 대고 이에 평소 후스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던 미카가 발끈하게 되는 내용이 영화에 나옵니다.
책에서 후스케 다음의 챕터는 아야입니다. 아야도 당연히 소설과 영화판의 내용이 다릅니다. 그런데 후스케와 차이점이라면 아야는 영화판에서 비중이 상당히 큽니다. 후스케처럼 아야 역시 소설 상으로는 리사 그룹과 그다지 접점이 없는데 영화판에서는 꽤나 직접적으로 리사 그룹과 엮이게 돼요.
정확히는 리사 그룹의 사나와 충돌하게 되는데 다름이 아니라 사나의 남자친구인 히로키를 아야가 짝사랑하는 걸로 나오거든요. 아야는 소설 속에서도 짝사랑을 하는 소녀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걸로 뭔가 사건이 벌어지지는 않습니다. 짝사랑 상대도 히로키가 아니라 히로키의 친구인 류타라는 학생인데 류타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처음에는 모르다가 챕터 후반에 알게되고 충격을 받게 되는 내용이 나오지만 류타의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언급도 되지 않고 삼각 관계 갈등 구도 같은 내용도 당연히 없어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걸 어떻게 변형하면 흥미로울지 확실한 해답은 정해져 있고 그래서 짝사랑 상대를 리사 그룹의 2인자 격인 사나의 남자친구 히로키로 변경(1인자 리사의 남자친구는 작품 속 맥거핀으로 등장조차 하지 않는 키리시마 이기에 선택할 수 없고요)한 후 자극적인 삼각관계 갈등 구도를 만들어 버립니다.
아야가 사실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학교의 계급 구조 상에서 아야의 위치가 굉장히 특별하거든요. 영화에서는 오고 스즈카라는 예쁜 배우가 연기했지만 소설 상으로는 아야가 특별히 예쁘거나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닌 걸로 그려집니다. 물론 아야 본인의 서술에서 행간을 보고 파악하는 내용이지만 아야가 반에서 친한 친구 시노와 동아리에서 친한 친구인 시오리에게 외모에서 열등감을 느끼는 듯한 언급을 계속 하거든요. 이 두 사람을 계속 ‘예쁘다’고 언급하는데 좀 과하다 싶을만큼 이 두 사람의 외모에 대한 언급이 아야의 챕터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냥 예쁘다고만 하는 게 아니라 이런 예쁜 학생들은 승리자라고 단정짓기까지 합니다.(정확한 소설 문장은 ‘이긴 거다, 뭔가에’)
오고 스즈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영화 속 배우 이야기를 잠깐 먼저 다루어보겠습니다. 소설에서 아야와 미카의 챕터에 여학생의 외모가 가지는 영향력에 대해 많이 언급이 되는데 사실 실생활에서도 아주 와닿는 얘기들입니다. 아야는 외모가 예쁘면 이미 뭔가에 이긴 거라고 말합니다. 계급의 우열은 ‘가치’에 의해 결정이 되고 우리가 ‘외모 지상주의’라고 비판하기는 하지만 사실 인간이 가진 가치 중에서 외모 만큼 1차적이고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가치가 없습니다. 나이가 들면 재산이라든가 직업이라든가 다양한 가치들을 추가로 의식하게 되지만 학생 시절에는... 외모가 정말 절대적인 힘이자 가치이죠.
아무튼 소설의 아야 챕터와 미카 챕터의 행간에서 파악되는 내용으로 작품 속 주요 여자 캐릭터의 ‘외모 서열’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건 실제 영화에 캐스팅된 배우들의 외모를 보면 작품에서 규정된 외모 서열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여학생 캐릭터는 리사 그룹의 4인방에 아야까지 해서 총 5명입니니다. 아야의 친구인 시노와 시오리는 등장하지 않아요.(대신 아야의 동아리 후배 역할인 여학생이 등장하는데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아야 역할은 오고 스즈카이고, 리사 역은 야마모토 미즈키, 사나 역은 마츠오카 마유, 미카 역은 시미즈 쿠루미, 카스미 역은 하시모토 아이입니다. 이 다섯 배우 중에서 누가 가장 이쁜가 하고 따지고 들면 워낙 개인적인 취향의 영역이라 어차피 답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출연 당시에 배우들의 상황을 놓고 보면 확실히 하시모토 아이가 당시에 가장 잘나가는 배우였던 건 분명합니다. 예쁘기도 엄청 예쁘고요. 사실 카스미가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 격인 역할입니다. 카미키 류노스케가 연기한 영화부 료야가 남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그런데 이 남녀 주인공은 맺어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리사 그룹에서 카스미의 위치가 굉장히 독특한데 리사와 사나가 그룹의 1,2인자 포지션이지만 소설 상에서 카스미도 굉장히 예쁜 걸로 묘사가 되고 실제 영화에서도 단연 하시모토 아이의 외모가 빛납니다. 사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할 거 같은데 리사나 사나보다도 더 예쁘게 나와요. 당시에 ‘가장 잘나가는 배우’로서 아우라도 넘치고 ‘여주인공 포지션’이라는 버프 효과(?)까지 붙은 느낌입니다.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여주인공이 맞고 예쁘게 나와야 하는 역할도 맞기 때문에 캐스팅부터 스타일링, 화면에 담기는 구도까지 확실히 신경을 많이 쓴 캐릭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야와 미카의 경우는 사실 소설에 언급된 묘사와 행간 만으로는 어느 정도의 외모인지 분명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데 전부 화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 서술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까운지 확실히 알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라면 더더욱 그렇죠. 물론 미스터리 소설에 등장하는 ‘믿을 수 없는 화자’ 정도인 건 아니고 대체로 신뢰할만한 화자들이긴 하지만요.(서술 의도상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니까요)
소설에서 예쁜 애들은 예쁜 애들끼리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고 언급되는데(실제 현실도 대체로 그렇겠죠) 아야는 단짝 친구인 시노를 엄청 예쁘다고 묘사합니다. 재미있는 건 시노가 원래는 여학생 최상위 계급인 리사 그룹에 속해 있던 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리사 그룹 아이들과 갈등이 생겨서 결국 이탈하게 되었고 그 후 아야와 친해진 걸로 나옵니다. 시노가 리사 그룹을 이탈하게 된 사연은 미카의 파트에서 짧게 언급되는데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룹의 1인자인 리사가 시노를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되었고(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데 아마 성격이나 취향같은 사소한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1인자의 태도에 자연스럽게 순응하여 모두 시노를 멀리하게 되었다고 나옵니다. 심한 싸움 같은 게 있었던 건 아닌지 나중에 6인으로 조를 짜서 창작 무용 과제를 할 때는 리사 그룹 4인방과 아야, 시노가 함께 조를 짜기도 합니다.
얼굴이 예쁜 시노가 아야와 거의 둘이서만 어울리는 단짝친구인데 이걸로 아야가 어느 정도 외모를 가진 아이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습니다. 1인자 그룹이었다가 배제된 시노의 상황이 특별하기도 하고 이 두 사람이 은근히 반에서 (왕따까지는 아니어도)겉도는 부류가 돼버렸거든요.
아무튼 영화판에서는 시노라는 캐릭터 자체가 등장하지 않고 아야는 리사 그룹의 2인자 사나와 삼각관계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역할로 나옵니다. 배우로 놓고 보면 오고 스즈카와 마츠오카 마유. 둘 중 누가 더 예쁘다고 판단할 수 있나요? 이건 정말 사람에 따라 다를 겁니다.
그런데 애초에 이 ‘외모’라는 항목은 순수하게 본판의 생김새 만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한 반의 아이들을 모아 놓고 머리나 의상 등을 전부 동일한 스타일로 해 놓으면 그 중에서 특별하게 예쁜 아이와 그 반대의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비슷비슷한 느낌일 거예요. 비슷비슷하고 미묘한 가운데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스타일링이죠. 영화에서도 다섯 명의 주요 여학생들이 전부 예쁜 외모의 여배우들인데 스타일링으로 차이를 만들어서 계급 상황을 구분지어 놓습니다.
단연 가장 화려하게 꾸며 놓은 게 리사와 사나이고 미카와 카스미는 화려하지는 않아도 기본에 충실(?)한 꾸밈, 아야는 촌스러운 스타일링(이라고 해놓기는 했는데 배우가 예뻐서인지 그렇게까지 촌스럽게 보이지는 않네요)을 하고 나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모두 예쁜 배우들이기는 하지만 스타일링으로 적당한 차이를 주었고 결국 영화의 내용과 주제에 그럭저럭 부합하는 비주얼로 잘 표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외모 묘사의 측면이 이 영화에서는 특히 중요한 부분인데 캐스팅부터 해서 꽤나 신중하게 전체적으로 좋은 선택들이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개성 있고 매력적인 여배우들을 잘 선택해서 최선의 결과물이 완성된 것 같아요.
앞에서 말했듯 아야는 굉장히 중요하고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그 이유는 아야가 영화의 갈등 구도에서 상당히 많은 역할을 하기 때문인데 사나와의 삼각관계 갈등 외에도 또 다른 갈등 상황이 아야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아야의 계급 상황에서 특별하게 볼만한 요소가 한 가지 있는데 바로 아야가 브라스밴드부의 부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재료를 가지고 소설에서는 전혀 없는 내용이지만 영화에서는 굉장히 흥미로운 갈등 구도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로 영화부와의 갈등입니다.
고등학교의 동아리는 크게 운동부와 문화부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상위 계급의 학생은 대체로 운동부이거나 부 활동 자체가 없는 소위 ‘귀가부’이고 문화부 쪽은 대체로 계급이 떨어지는 학생들이 있는 편입니다.(특히 오타쿠 느낌의 동아리들이 그렇죠) 사실 이런 경향은 미국 하이틴 물에서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학교에서 제일 인기 많은 퀸비는 대부분 치어리더부이고 남자친구는 미식축구부 쿼터백인 게 거의 공식 수준입니다.
아무튼 작품 속 여학생 서술자 3명 중에서 상위 그룹인 미카와 카스미는 각각 소프트볼부와 배드민턴부이고 하위 그룹인 아야는 문화부인 브라스밴드부입니다. 그런데 아야는 사실 하위 계급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애매한 면은 있습니다. 일반 사회도 그렇지만 학교에서도 계급이 상위, 하위의 딱 두 가지로만 나눠지지는 않거든요. 물론 여학생 리사 그룹과 남학생 히로키 그룹(혹은 키리시마 그룹)이 최상위이고 영화부가 거의 바닥인 건 분명하지만, 아야의 경우는 그 중간 어디 즈음의 계급이에요. 확실히 상위보다는 하위 쪽에 가깝긴 하겠지만요.
그런 미묘한 계급 구도인 상황에서 아야는 영화부의 료야와 갈등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게 상황이 좀 골때리는데 아야가 짝사랑하는 히로키는 야구부 소속이지만 유령부원이라 사실상 부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동을 하지 않음에도 방과 후 계속 학교에 남아 있는데 이유는 친구인 키리시마의 부활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시간 때우기 용으로 같은 반 친구인 류타, 도모히로와 함께 농구를 즐깁니다. 키리시마도 그렇지만 히로키와 류타, 도모히로가 모두 인기 있는 남학생이라 당연히 이 농구 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여학생이 많았고(바로 옆에서 대놓고 보는 건 아니고 주로 학교 건물 안에서 창문을 통해서) 아야도 그중 하나예요. 그런데 아야는 악기 연습을 한다는 핑계로 히로키 등이 농구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학교 건물 옥상의 명당자리에 늘 자리를 잡습니다. 악기 연습을 하는 척 하면서(실제 연주를 하기는 합니다) 진짜 목적은 농구하는 히로키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죠. 물론 옥상에서 여학생이 혼자 악기 연주를 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 모습은 눈에 띄고 히로키도 옥상에 있는 아야의 존재를 알고는 있습니다. 당연히 이런 점도 아야의 노림수 중 하나일 테고요.
그런데 영화에서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새 작품을 촬영하게 된 영화부 아이들이 촬영 장소로 옥상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소설에는 전혀 없는 내용입니다. 옥상에서 촬영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악기 소리를 계속 내고 있는 아야의 존재로 당연히 촬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합니다. 이에 감독인 료야가 아야에게 양해를 구하게 되면서 둘의 논쟁이 시작됩니다.
아야는 당연히 히로키가 농구하는 모습을 봐야 하기 때문에 옥상을 떠날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유를 댈 수는 없으니 악기 연습을 이유로 료야의 양해 요구를 거절합니다. 료야 입장에서는 납득이 안되죠. 브라스밴드부가 연습하는 공간이 따로 있을 테고 아야 말고는 누구도 옥상에서 악기 연습을 하지 않거든요. 영화부는 반드시 지금 이 장소에서 촬영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지만 아야에게는 반드시 지금 이 장소에서 연습을 해야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논리로는 명백히 료야의 우위입니다.
그런데 료야는 결국 아야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야가 학교 계급론을 바탕으로 한 이상한 논리를 들고 나오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브라스밴드부 활동이 영화부 활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야는 브라스밴드부가 영화부보다 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야가 주장하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 영화는 소설에서 중요한 내용 한 가지를 변경 시켰습니다. 그것은 영화부의 수상 실적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아야의 다음 챕터의 서술자로 등장하는 료야의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사실 영화도 소설과 마찬가지로 같은 날 일어난 사건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반복해서 보여주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설처럼 서술자가 있는 건 아니지만 카메라가 중심적으로 담아내는 학생을 바꿔가며 같은 시간대의 이야기를 관점을 바꿔가며 보여주고 있죠. 물론 미묘하게 시간대의 차이는 있습니다.
료야의 이야기는 학교의 아침 전체 조회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료야는 단짝 친구이자 같은 영화부인 타케후미와 함께 아침 전체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 전교생들 앞에 서게 됩니다. 이유는 영화부 활동으로 성과를 냈기 때문에 조회 중 ‘동아리 활동 보고’ 시간에 그 성과를 학생들에게 소개하고 박수를 받기 위해서예요. 그런데 이 ‘성과’라는 게 어이가 없습니다. 고작 ‘1차 예전 통과’입니다. 2차는 탈락이기 때문에 ‘1차 예선 통과’가 최종 성적입니다. 하지만 이 성적이 이 학교 영화부 사상 최고의 성적이라서(이전에 한 번도 1차 예선을 통과한 적이 없었던 거죠) 단상에 올라 학생들의 박수를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전교생 앞에서 웃음거리가 된 꼴입니다. 사실 동아리 활동 보고 시간이라도 굳이 1차 예선 합격 정도의 소식으로 영화부 아이들을 단상에 올릴 이유는 없는데 료야와 타케후미 뒤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영화부 지도 교사의 모습을 보면 이 교사가 자기 나름대로 어거지를 써서 영화부 아이들을 챙겨준 거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전교생 앞에서 료야와 타케후미의 면을 세워주려는 의도였던 거죠.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이 의도와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아요. 또 하필이면 영화부가 만든 영화의 제목이 “그대여 닦아줘요 나의 뜨거운 눈물을” 이라는 요상한 제목이라서 전교생들이 빵 터지는 상황이 벌어집니다.(나중에 리사 그룹 아이들이 “영화 제목이 ‘나의 뜨거운 뭐시기를 닦아줘요’였나? AV야?”라고 뒷담화를 합니다) 결국 료야와 타케후미가 단상에 올라 얻게 된 것은 박수보다 더 큰 비웃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소설은 이런 영화의 내용과는 조금 다릅니다. 영화가 소설 보다 계급 갈등을 더욱 적나라하게 부각시키는 선택을 했기 때문에 계급의 최하층인 영화부 아이들을 소설보다 훨씬 비참한 꼴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소설에서는 상황이 훨씬 낫습니다. 영화처럼 고작 1차 예선 통과라는 초라한 성적이 아니라 무려 ‘특별상’을 수상하고 단상에 오른 거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영화부 아이들이 전교생들에게 깊은 인상을 준 건 아니에요. 우리 학교에 영화부가 있었나? 라는 반응부터 해서 역시 웃기는 제목 때문에 비웃음을 당하는 건 똑같고요.(소설에서는 영화 제목이 ‘아지랑이~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려~’입니다.) 부활동 실적과는 별개로 료야와 타케후미는 누가 봐도 학교 계급의 최하층스러운 모습(외모)을 하고 있기에 뭘하든 대체로 학생들에게 무시당할 뿐입니다.
다만 그래도 특별상 수상이라는 실적을 학생들이 기억하고 있기에 새 작품을 위해 (학교의 상위 계층 아이들이 가득한)체육관 부활동 모습을 촬영할 때도 무리 없이 교사와 학생들의 협조를 얻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챕터의 서술자인 미카와 히로키는 나름 영화부 아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게 돼요. 특히 히로키는 옆에서 여자친구인 사나가 내내 영화부 아이들을 비웃는 발언을 하는데 속으로는 전혀 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설의 내용을 영화에서는 더욱 확장시켜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제가 정말 좋아하는 히로키와 료야의 대화 장면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소설에서는 특별상도 받고 나름대로 상황이 괜찮은데, 영화에서는 그냥 애들을 완전 비참한 꼴로 만들어 버려서 학교 최하층 계급의 안타까운 처지를 더욱 강렬하게 부각시킵니다. 아야와의 논쟁에서도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아야를 도무지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영화의 조회 장면에서 곧 대회 예선을 앞둔 브라스밴드부를 소개하면서 ‘브라스밴드부는 이번에도 상위 입상을 노리고 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1차 예선을 통과한 영화부 ‘따위’와는 달리 브라스밴드부는 그동안 대회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어 왔던 것이죠. 아야는 료야를 완전히 눌러버리기 위해 좀 센 발언까지 하게 되는데요. ‘영화부는 어차피 노는 거잖아. 나는 진지한 부활동이다.’ 라고 말해버립니다. 당연히 료야는 ‘우리도 진지해’ 라고 반발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료야가 말하는 ‘진지함’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부활동의 진지함과는 조금은 다른 것입니다. 사실 고교 시절에 뭔가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것은 대부분 진로 선택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부활동도 마찬가지예요. 운동부만 하더라도 프로 스포츠 선수의 대부분은 학창 시절 부활동으로 운동을 시작했고 문화부 역시 학창 시절에 열정적으로 부활동을 하다가 자연스럽게 관련 분야의 직업이나 전공으로 빠지게 되는 케이스가 많거든요. 그런데 료야는 그게 아닙니다.
물론 이 내용은 소설과는 달라요. 소설에서는 그래도 특별상도 받고 상황이 나은 편이지만 영화에서 료야는 영화 찍는 걸 좋아하긴 해도 그다지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료야는 자기가 영화와 관련된 직업을 가질 거라는 생각도 않고 있고 그런 진로의 고민과는 무관하게 그저 영화를 찍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저. 그리고는 아야에게 ‘진지하게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영화가 단순하게 스쿨 카스트에 대해서만 다루는 게 아니라 이런 부분에 있어서 깊게 생각할만한 주제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료야는 사실상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섯 명의 서술자 중에서 키리시마와 가장 관련이 없는 학생이면서도 영화에서는 벌어지는 모든 사건의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야 외에도 다른 학생들과도 엮이게 되는데 바로 카스미와 히로키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카스미는 영화의 여주인공 격인 캐릭터예요. 남주인공인 료야와도 당연히 관련이 있습니다. 카스미는 학교의 최상위 계급인 리사 그룹의 멤버로 상당히 예쁜 여학생입니다. 그리고 료야는 학교의 최하위 계급입니다. 그럼 둘은 어떤 관계일까요. 네, 뻔하지만 료야가 카스미를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쭈뼛쭈뼛 곁눈질로 보거나 의식하는 정도만 나오지만, 소설에서는 료야의 서술 파트에서 꽤나 열정적으로 카스미에 대한 찬양적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동급생이 아니라 거의 다른 차원의 존재... 그야말로 ‘여신’으로 생각하는 수준이에요. 실제로 하시모토 아이가 연기하는 영화 속 카스미의 비주얼은 여신급이긴 합니다.
카스미는 소설의 마지막 챕터에 등장하는 서술자입니다. 다른 서술자와 달리 특이한 점이 있는데 카스미만이 현재 시점이 아닌 14세 중학교 시점에서 서술을 한다는 점입니다. 카스미의 중학교 시절에 대해서는 앞선 료야의 파트에서 떡밥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는 그야말로 계급의 최상층와 최하층으로서 같은 반 급우임에도 전혀 대화 조차 없는 사이이지만 중학교 때는 두 사람이 친한 사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료야 입장에서는 참 마음 아픈 일입니다. 짝사랑 하는 여자 아이와 중학생 때는 친했는데 지금은 말도 못하는 사이가 되다니. 물론 자신의 낮은 계급을 확실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료야는 이러한 사실에 큰 절망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원래 세상은 그런거야, 라는 인식입니다.
료야의 서술에 따르면 카스미는 물론 중학교 때부터 예쁘기는 했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 더욱 스타일도 좋아지고 미모가 꽃 피게 되었다고 합니다. 뭐 당연한 얘기입니다. 여학생과 남학생이 비교적 허물없이 어울리는 어린 시절과 달리 커갈수록 점점 여학생과 남학생은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의식하고 어릴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이성을 바라보게 되니까요.
카스미의 중학교 시절의 서술은 당연히 소설 전체에서 다소 분위기가 다른 파트이지만 그렇게 튀는 편은 아닙니다. 중학교 시절의 회상은 료야의 챕터에서도 등장하는데 카스미의 서술에서 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내용이기도 하고요. 카스미의 챕터는 현재 시점이 아닌 과거 시점의 서술을 보여줌으로써 작품 전체에서 묘하게 균형을 잡아 주는 캐릭터인 카스미의 내면에 대해 색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카스미의 현재가 아닌 과거를 보여주는 것으로 카스미의 현재에 대해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이 상상의 여지가 영화에서 제대로 꽃을 피게 되는 거고요.
그렇다고 영화에서 료야와 카스미의 관계가 무슨 큰 진전을 이루게 되는 건 아닙니다. 진전은 고사하고.. 이거 대놓고 밝히자면 NTR입니다.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인데 영화에서는 카스미가 남자친구가 있는 걸로 나옵니다. 바로 히로키 그룹에 속한 남학생인 류타입니다. 그런데 카스미와 류타가 사귀는 건 둘 만 아는 비밀입니다. 그런데 둘이 몰래 만나 꽁냥 거리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료야에게 들키게 됩니다.
그 전에 료야와 카스미가 우연히 만나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주말에 료야가 영화관에서 ‘철남 테츠오’라는 엄청나게 마니악한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영화가 끝난 후 우연히 같은 상영관에 카스미가 있는 걸 발견합니다. 이 때 상황이 참 재미있어요. 좌석에서 일어나다가 둘이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료야는 완전히 굳어 버리고 카스미 쪽이 먼저 반갑다는 듯 웃어 보이죠.
소설에서 료야가 짝사랑하는 카스미를 거의 여신 수준으로 찬양하는 언급을 많이 하는데 이 영화에서 카스미의 캐릭터는 료야의 주관이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정말 착하고 괜찮은 아이입니다. 다만 리사 그룹에 속해서 학교생활을 하다보니 결국 구분된 계급 체계에서 교우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고 최하층인 료야와는 중학교 때 친했음에도 현재는 전혀 대화조차 없는 사이가 된 것이죠. 그런데 주말에 학교 밖에서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는 굳이 무시하지 않고 다가와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착하니까요.
물론 그 시간이 길지는 않습니다. 평소 거의 대화도 없는 이성 급우와 주말에 우연히 마주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긴 대화를 이어갈 수 있겠습니까. 료야의 몸에 배다시피 한 ‘찐따 본능’도 제대로 발현되고 있으니까요.. 결국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지지만 그 후 다시 학교에서 마주쳤을 때 카스미가 료야에게 또 말을 겁니다. 이 부분은 주말에 우연히 마주친 일이 계기가 되기도 했을 테지만 본질은 리사 그룹에 발생한 균열이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를 그만둔 후 그 보결로 주전이 된 후스케를 리사와 사나가 계속 뒷담화하고 이에 미카가 강한 불만을 품게 되면서 그룹 내 균열이 발생하게 되거든요. 거기에 사나는 영화부까지 뒷담화를 하는데 이에 대해 카스미가 티는 안내지만 속으로 미카처럼 불만을 품게 되고요.
리사와 사나가 대놓고 조롱하는 존재인 최하층 계급 료야에게 카스미가 말을 걸고 친하게 대하는 것은 사실 리사 그룹의 분위기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는 행동입니다. 미카의 상황도 그렇고 리사와 사나가 후스케와 영화부를 비웃는 행동 때문에 사실 이 그룹은 거의 깨질 상황이 되었다고 봐야 합니다. 카스미가 학교에서 료야에게 말은 건 것은 분명 리사와 사나에 대한 반발심을 드러내는 행동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들이 벌어지다 보니 속으로 여신이라고 생각하며 열렬하게 카스미를 짝사랑 하는 료야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행복 폭발이죠. 다시 카스미와 중학교 때처럼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구나 라는 장미빛 희망에 부풀어 있는데... 우연히 잊은 물건을 찾으러 수업이 끝난 교실로 돌아갔을 때 카스미가 남자친구인 류타와 교실에서 단 둘이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짝사랑 NTR’의 아주 전형적인 전개죠.(카스미가 그 날 마니악한 영화를 보게 된 이유도 료야가 상상한 이유-‘카스미가 나와 비슷한 취미가 있구나’-가 아니라 류타와 데이트를 하다가 다투는 바람에 류타는 일찍 돌아가 버리고 카스미는 홧김에 혼자 아무 영화관이나 들어가서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 채 보게 된 것입니다.)
영화만 놓고 봐도 살짝 가슴이 쓰려오는 NTR 전개인데 이게 소설 내용과 더해지만 더욱 더 기가 찹니다. 영화에서 류타는 그렇게 무개념 학생은 아닌 걸로 나오는데요. 소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예요. 여학생 상위 계급인 리사 그룹의 사나와 마찬가지로 류타도 하위 계급의 학생들을 비웃는 발언을 자주 하고 남학생끼리 있을 때는 음담패설도 자주 하는 경박한 캐릭터로 나옵니다. 이런 애가 소설에서 아야의 짝사랑 상대인 것도 좀 이상하긴 해요. 뭐 아야는 대체로 류타의 외모에 반한 것 같긴 하지만요.
아무튼 더욱 심각한 건 소설에서 류타는 여자친구가 있는 걸로 언급되는데 내내 고무(콘돔) 타령을 하면서 여자친구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는 것으로 짐작되는 말들을 많이 하거든요. 하도 고무 타령을 많이 해서 히로키들 사이에서 별명이 고무인간일 정도니 뭐... 그런데 소설에서는 류타의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고 카스미 또한 남자친구가 있는지 밝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걸 역어서 둘을 커플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말했듯이 영화에서는 류타가 소설 만큼 무개념 학생은 아니기 때문에 영화만 봐서는 이 NTR이 그렇게 하드코어한(?) 느낌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소설의 캐릭터와 엮어 버리면 여자친구와 왕성한 성생활을 즐기는 별명이 고무(콘돔)인간인 류타가 료야에게는 여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인 카스미의 남자친구... 우와, 이거 꽤 셉니다. 금태양 정도는 아니더라도 NTR 강탈자 역으로 류타가 좀 세긴 해요. 소설 상으로는.
하지만 결국은 소설과 영화는 분리해서 봐야 합니다. 내용이나 설정이 다른 부분도 많고 소설에서 카스미는 남자친구가 있는지 나오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영화 속 류타는 소설 보다는 훨씬 양호한 캐릭터고요. 애초에 영화의 류타가 소설과 동일한 설정의 캐릭터라면 카스미가 이런 남자애랑 사귈 리가 없습니다. 소설과 달리 영화 속 류타에게서 경박한 속성을 많이 빼버린건 오로지 카스미의 남자친구로 설정하기 위한 목적일 겁니다. 그걸 위해서 류타도 나름 괜찮은 학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소설의 캐릭터 설정이 영화에서 변경됨으로써 큰 피해를 본 캐릭터가 있습니다. 바로 리사 그룹의 2인자인 사나입니다.
사나는 굳이 분류하자면 이 영화의 빌런 캐릭터입니다. 한 마디로 밉상이에요. 그리고 그룹에서 딜탱을 모두 담당합니다. 남들 뒷담화를 많이 하고 본인도 뒷담화를 많이 당하죠. 전형적인 골 빈 아이예요.
영화와 소설 모두에서 사나는 히로키의 여자친구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소설에서도 히로키는 잘 나가는 상위 계급의 남학생이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계급 구도를 더욱 선명하게 설정해서 아야를 비롯한 많은 여학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최고 인기의 남학생입니다. 키리시마와 함께 투톱... 아니면 키리시마를 1인자, 히로키를 2인자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히로키를 연기한 배우는 히가시데 마사히로입니다. 키도 크고 엄청 잘생긴 배우잖아요. 영화에서도 진짜 잘나가는 인기 남학생의 아우라가 제대로 느껴집니다.
그런 히로키가 잘나가는 자신의 삶에 대해 왠지 모를 회의와 염증을 느끼고 있는데 여자친구인 사나의 경박함도 히로키가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둘의 관계를 보면 명백히 사나가 매달리는 상황입니다. 스킨쉽도 사나 쪽이 훨씬 적극적이고요. 영화에서 히로키는 대체로 여자친구인 사나에게 시큰둥한 모습을 종종 보이고 소설에서는 사나에 대해 아무 생각 없는 아이라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소설에서 사나가 영화부 아이들을 비웃고 디스하는 발언을 자꾸 하는데 이것이 히로키의 심경에 은근히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연장되어서 영화에서 히로키와 료야의 대화 장면이 나오게 되는 거고요.
아무튼 영화에서 류타의 캐릭터가 변경된 것 때문에 사나가 피해를 봤다고 했는데 소설에서는 이런 경박하고 무개념인 학생이 사나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류타와 리사까지도 그런 부류예요. 네, 소설에서는 세 명의 학생이 담당하던 빌런 역할이 영화에서는 사나 혼자에게 몰빵이 되어버린 겁니다. 류타는 말했듯이 카스미의 남자친구로 나와야 하기 때문에 소설과 같은 경박함과 무개념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리사도 소설에 비해서는 많이 진중해진 모습으로 영화에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퀸비와 추종자 구도를 명확하게 그려 놓지 않은 소설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리사를 명백하게 퀸비의 위치로 설정해 놓았기 때문에 2인자인 사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는 게 필요했을 겁니다. 원래 1인자는 폼 잡고 있고 궂은일과 어그로 끄는 일은 2인자가 하는 거죠. 리사도 사실 내면은 사나와 큰 차이가 없을 테지만 퀸비 로서의 품위(?) 때문에 경박하게 나대지 않는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나를 연기한 배우는 마츠오카 마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혼자 독보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배우들도 다 괜찮아서...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반복해서 보다보면 여러 좋은 배우들 중에서 마츠오카 마유가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캐릭터의 특성상 유달리 열연을 하는 걸로 보인달까.
마츠오카 마유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배우입니다. 처음에 이 배우가 데뷔하고 조연 역할로 여러 작품에 등장할 때 배우로서 크게 대성하기는 어려운 타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전한 과소평가였죠. 조연은 물론이거니와 단역 출연작도 많은데 그런 작품들에 나오는 마츠오카 마유의 모습을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조연이나 단역에 어울리는 배우 같아 보이면서도 묘하게 눈길을 끄는 부분이 존재하더란 말이죠. 확고한 인기와 지명도를 가진 주연급 배우들처럼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매력이 스며드는 타입입니다. 배우로서 상당한 입지를 쌓은 현재에도 여전히 조연으로 출연하는 작품이 많지만 이제는 배우 자체가 상당한 무게감과 아우라가 느껴집니다.
아무튼 마츠오카 마유가 연기한 사나는 영화에서 제일 안습인 캐릭터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학교의 최하위 계급으로 온갖 굴욕과 멸시를 일상처럼 당하는 영화부의 료야와 타케후미가 제일 안습이긴 하지만, 영화가 그리는 관점으로는 사나를 명백하게 빌런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은근히 스토리 상에서 사나의 처지가 안습이에요. 사나가 ‘퀸카로 살아남는 법’의 그레첸 위너스와 비슷한 캐릭터인데 실제로 그레첸도 작품 내에서 가장 안습이라고 할만한 캐릭터죠.
우선 사나는 남자친구인 히로키를 짝사랑 하는 티를 팍팍 내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아야의 존재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이 때문에 영화의 후반부에 사나는 꽤나 필사적으로 남자친구 지키기 활동에 들어갑니다. 사나가 이것 때문에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애쓰고 있는데도 정작 남자친구인 히로키는 내내 사나에게 시큰둥하고 별로 반응이 없죠. 어찌되었든 ‘눈 앞에서 키스하기’ 작전의 성공으로 아야를 좌절시키기는 하지만 별로 사나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남자친구를 지키기 위해 아둥바둥 하는 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일 정도입니다.
물론 사나가 당하는 더 큰 수난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사나 입장에서는 수난이지만 전체 상황을 보면 인과응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바로 같은 최상위 그룹 내 다른 아이에게 따귀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사나는 키리시마의 보결로 리베로의 주전으로 들어가게 된 후스케를 비웃는 발언을 계속 하고 영화부에 대해서도 조롱하고 무시하는 발언을 합니다. 이런 사나의 언행에 남자친구인 히로키조차 불편한 심경을 가지게 되고 후스케를 의식하고 있던 미카도 속으로 단단히 뿔이 나게 됩니다. 결국 미카가 사나에게 은근히 반발하는 발언을 하게 되고 사나는 처음에는 (멍청해서)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미카가 자신에게 반발하고 있음을 알아채고는 전투 모드(?)로 돌입하게 돼요. 이때 싸움이 날 뻔했는데 때마침 리사가 나타나 주면서 상황이 흐지부지 됩니다.
그 후 영화의 최종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사나가 또 다시 후스케와 영화부 애들을 비웃자 미카가 즉시 발끈하며 사나에게 다가가지만... 정작 사나를 때린 것은 카스미였습니다! 뜬금없이 카스미에게 따귀를 맞고 벙쪄하는 사나의 표정이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학교의 여학생 최상위 계급인 리사 그룹의 4인방을 면밀히 따져보면 멤버들의 균형이 꽤나 아슬아슬합니다. 영화만 보면 왜 이 4인방이 같은 그룹으로 어울리는 친구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예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을 보더라도 플라스틱 3인방(레지나, 그레첸, 카렌)은 모두 비슷한 성격과 가치관을 가진 동일한 부류이고 나중에 합류하는 주인공 케이디 또한 그들과 어울리며 완전히 레지나의 복제품이 되어버립니다. 반면 리사 그룹은 서로 성격이나 가치관에서 차이가 있어요. 2명씩 짝을 지어 나눠진다고 볼 수 있는데 리사와 사나가 비슷한 부류이고 미카와 카스미가 비슷한 부류입니다. 심지어 소설에서는 미카가 소프트볼부, 카스미가 배드민턴부이지만 영화에서는 미카를 배드민턴부로 바꿔서 둘이 같은 부 활동을 하는 설정으로 변경하기까지 했습니다.
소설에서 미카의 서술 파트에는 여학생들의 계급 구조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과 묘사가 많이 등장합니다. 역시 가장 적나라한 건 아야의 파트에서도 강조되었듯 ‘가장 중요한 건 외모’라는 사실입니다. 본인의 외모 뿐 아니라 함께 어울리는 아이의 외모도 중요해요. 단순하게 말해서 ‘예쁜 여학생 그룹’에 속하는 것이 교내 카스트의 정점에 오르는 최고의 왕도인 것입니다.
미카가 리사 그룹에 속한 이유는 본인도 예쁘기 때문이에요. 학기 초에 교실 내 계급 구도가 자리 잡히기 전에 기민하게(?) 움직인 결과로 지금의 리사 그룹이 뭉치게 된 것이죠. 미카의 경우는 상당히 기민하게 움직였겠고, 카스미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상상의 여지가 있긴 합니다. 소설만 봐서는 카스미의 ‘현재’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쉽게 짐작하기가 어려워요. 다만 미카의 서술 파트의 행간으로 짐작을 해보자면 카스미는 퀸비인 리사에 필적할 정도로 원판이 예쁜 학생이지만 리사 처럼 주도적이거나 계급에 욕심을 부리는 타입이 아니라서 적당히 힘을 아끼고(?) 1인자 그룹에 대충 묻어가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그런 비슷한 느낌으로 그려지고요.
소설에서 미카는 리사와 사나에게 속으로 꽤나 반발을 하고 불만도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사실 누구라도 리사와 사나에 대해서는 속으로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퀸카로 살아남는 법’에서도 그랬지만 여학생들 쪽이 남학생보다는 상위계급 학생들에 대한 일반학생들의 반발과 혐오가 큰 것 같아요. 물론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런 갈등의 씨앗이 교실 계급 구조의 이면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이죠. 그게 터져 나오면 ‘퀸카로 살아남는 법’과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의 영화 내용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거고요.
소설에서는 미카 파트에서 영화의 주제인 스쿨 카스트에 대한 가장 흥미롭고 적나라한 고찰을 엿볼 수 있지만 영화에서는 미카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결국 사나의 따귀를 때리는 결정적인 역할도 카스미가 가져가 버렸고 소설부터 내내 이어진 미카의 리사와 사나에 대한 반발심은 영화에서도 이렇다 할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채 붕 떠버려요. 말했듯이 영화에서는 료야와 카스미, 히로키를 중심으로 삼고 이야기를 전개시키기 때문입니다.
히로키는 소설과 영화에서 모두 작품의 주제를 표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캐릭터입니다. 카스미가 과거 시점의 서술자로 등장하기 때문에 현재 시점의 서술자로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히로키인데, 히로키의 서술 파트는 뭔가 소설 전체에서 그려지던 학생들의 고민과 갈등에 아주 명확한 그림을 그려주며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겁니다. “What’s the point?”
‘의미 찾기’. 결국 가장 흔한 청소년의 고민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죠.
소설에서 히로키는 ‘사춘기의 고민’에 빠진 청소년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질문을 던지죠.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 굉장히 예민해져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들 하나하나에 계속 “What’s the point?” 라는 의문이 따라 붙는 거예요.
히로키의 가장 가까운 주변인물은 단짝 친구인 류타와 여자친구인 사나입니다. 소설에서 류타와 사나는 모두 경박한 성격에 별 생각 없이 인생을 살고 학교 내 계급 의식에도 강하게 쩌들어 있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히로키의 서술에서 대화 상대는 항상 사나와 류타이지만, 정작 히로키가 가장 의식하고 있는 학생은 바로 영화부의 료야입니다. 히로키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할 때 아침 전체 조회 시간에 단상에 올라 상을 받은 영화부 아이들의 모습이 확실히 각인이 된 것입니다.
히로키도 당연히 교내 계급 구조의 상황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모두의 선망이 되는 최상층 계급의 존재이고, 영화부 아이들은 급우들의 멸시를 일상적으로 당하는 최하층 계급이라는 걸 히로키도 잘 알고 있어요. 조회 시간에 상을 받은 이후로 영화부 아이들은 류타와 사나 같은 계급 의식에 찌든 경박한 아이들에게 실컷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뒷담화의 소재가 됩니다. 그 뒷담화를 다 듣고 있는 건 히로키고요.
앞선 미카의 서술 파트에서도 리사와 사나가 영화부 아이들을 뒷담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요. 이 때 미카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 애들은 영화 찍어서 상도 받고 대단하잖아. 적어도 너네(리사와 사나)보다는 나아.’
반면 히로키는 이 정도까지는 생각하지는 않고, 그저 심란해할 뿐입니다. 학교 내 계급 구조의 최상류층으로 잘난 척 하며 지내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류타와 사나(와 자신)와는 달리, 최하층 계급으로 멸시당하며 살아도 뭔가에 몰입해서 의미 있어 보이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영화부 아이들의 모습이 꾸준히 대조되며 히로키를 더욱더 깊은 청소년의 고민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죠.
히로키는 야구부 소속이지만 실제 부활동은 하지 않는 유령부원입니다. 히로키는 키도 크고 운동 신경이 뛰어납니다. 야구도 꽤 잘해요. 재능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현재 야구부 주전 선수들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입니다. 하지만 “What’s the point?” 라는 의문으로 가득 찬 붕 뜬 마음으로는 부활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히로키는 성숙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굉장히 현실적인 학생입니다. 야구를 열심히 해서 장차 프로 선수가 될 전망이 확실히 보이는 것이 아니라면 부활동을 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야구부 활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히로키의 의식에 계속 밟히는 것이 부활동을 전혀 하지 않는 자신에게 꾸준히 말을 걸고 시합 일정도 알려주는 야구부 주장과 같은 반에서 늘 주눅 들어 있지만 어딘가에서 항상 열심히 영화를 찍고 있는 영화부의 료야입니다.
영화에서는 이 내용을 더욱 확장시키는데, 히로키가 야구부 주장과 마주치는 장면이 많이 등장하고 그럴 때마다 히로키는 크게 거북해하며 심리적 동요를 겪게 돼요. 히로키는 3학년 여름이 지났음에도 은퇴하지 않고 계속 야구부 활동을 하는 주장에게 의문을 가집니다. 결국 왜 은퇴하지 않냐고 물어보는데 주장은 혹시라도 스카우트 될 수도 있으니 드래프트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계속 할 거라고 대답합니다. 주장은 큰 재능도 없고 그다지 뛰어난 선수가 아닙니다. 구단에 스카우트될 가능성도 거의 없어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매일 늦은 시간까지 야구 연습에 매진하는 겁니다. 해가 진 시간까지 운동장에서 열심히 연습하는 야구부 아이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히로키의 뒷모습이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영화부 료야와 관련해서는 영화에서 하이라이트 에피소드라고 할 만큼 중대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실 소설에서 내내 료야를 의식하고 료야에게 말을 거는 등의 내용이 나오는 건 히로키 뿐이지만, 영화에서는 이 역할이 히로키와 카스미에게 나뉘어집니다.
사실 소설에서는 히로키가 1인칭 서술을 하면서 료야에 대해 신경 쓰는 속마음이 계속 언급되지만 영화에서는 히로키가 딱히 독백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내용들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아요.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료야와 엮이는 학생은 아야와 카스미이고, 히로키는 영화의 마지막에 난데없이 훅 들어오는 느낌입니다.
이런 전개는 사실 영화의 형식 때문입니다. 소설처럼 1인칭 화자를 딱딱 구분지어서 챕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영화도 같은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을 구분 지어서 보여주는 챕터 진행의 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에서 챕터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건 인물이 아니라 시간대(요일)입니다. 그런데 같은 시간대가 몇 차례 반복되어 등장해서 같은 챕터 제목이 연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즉 동일한 시간대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챕터로 나눠서 보여주는 거예요.
후반부 하이라이트 에피소드 또한 두 개의 챕터로 나뉘어집니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사건의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사건의 중심인물인 료야의 관점을 중심으로 해서 보여주고 있고 두 번째 챕터는 이 사건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진 관찰자의 입장인 히로키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의 첫 번째 챕터의 마지막 장면이 히로키가 료야에게 말을 거는 장면입니다. 이 내용은 사실 소설에서도 나옵니다. 료야가 영화 촬영을 하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렌즈후드를 히로키가 주워서 료야에게 건내주는 장면이에요. 소설에서는 료야가 고맙다고 하는 걸로 끝나지만 영화에서는 뒤로 대화가 더 이어집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화가요.
우선 그 앞에 료야를 중심으로 해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지를 간략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료야는 절친 타케후미와 영화부 아이들과 함께 새 영화를 찍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를 찍을 것인가에서 영화부 지도 교사와 의견 충돌을 하게 돼요. 영화부 지도 교사는 지난 작품이 1차 예선에 통과한 것을 큰 성과라고 말하며 그 후속작을 찍어서 더 큰 성과를 노려보자고 합니다. 심지어 지난 작품의 각본은 지도 교사 본인이 쓴 것입니다. 이 교사에게 있어서 영화부 아이들을 올바로 ‘지도’하는 것은 영화제에서 상을 탈 만한 작품을 만들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료야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료야는 교사가 각본을 써준 하이틴 멜로물이 아니라 좀비영화를 찍고 싶어 합니다. 교사는 그런 영화로는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청소년의 현실적인 삶과 고민이 담긴 영화가 상을 받기에 유리하다고 말하죠. 하지만 료야는 그런 데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교사의 말대로 찍었는데도 고작 1차 예선만 통과했을 뿐이고 애초에 료야는 자기가 영화에 별로 재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료야는 상을 받고 어떤 성과를 내려고 영화를 찍는 게 아니에요.
결국 료야는 지도 교사의 의견을 묵살하고 좀비영화를 찍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 영화를 찍을 때마다 근처에서 악기 연습을 하는 브라스밴드부의 아야 때문에 방해를 받습니다. 옥상에서 찍을 때는 아야가 옥상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고, 학교의 다른 장소에서 찍을 때는 또 그 장소에 아야가 나타나서 연습을 합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아야의 목적은 악기 연습이 아니라 짝사랑 하는 히로키를 보는 것이었고 히로키가 방과 후에 학교의 어떤 장소에 있을거다 라는 정보를 입수할 때마다 그 장소 근처에서 연습을 했던 것입니다. 그게 매번 공교롭게도 영화부 아이들의 촬영 장소와 겹쳤던 거고요.
지난 번에 아야 때문에 옥상 촬영을 못했던 영화부 아이들은 이번에는 다른 장소에서 아야에게 또 다시 방해받게 되는데 이번에도 료야는 지난 번처럼 아야에게 다른 곳에서 연습해달라고 양해를 구합니다. 하지만 진짜 이유를 밝힐 수도 없고 더이상 댈 핑계도 없는 아야가 울상이 되어 가며 물러서지 않자 료야는 이번에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촬영 장소를 이동하게 됩니다. 그 이동한 장소가 바로 옥상입니다.
그 시점에 혼자 농구를 하던 도모히로는(히로키와 류타는 더이상 농구를 하지 않습니다) 옥상에 키리시마가 있는 걸 발견합니다. 키리시마는 영화에 딱 두 번 등장하는데 이 장면과 이후 옥상에서 내려가면서 마침 영화 촬영하러 옥상으로 올라가는 영화부 아이들과 지나치는 장면으로 등장해요. 다만 두 번 다 얼굴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튼 도모히로는 키리시마가 옥상에 있다고 친구들에게 퍼트리고 다니고 이 소식을 들은 배구부 아이들과 히로키 그룹, 리사 그룹의 아이들이 모두 옥상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옥상에는 키리시마는 없고 영화부 아이들이 좀비 분장을 한 채 좀비영화를 찍고 있었죠.
키리시마를 만나지 못해 답답해 하던 배구부 아이 중 하나가 마침 바닥에 있던 영화부 촬영 소품인 운석(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에서 좀비 바이러스가 발생한다는 설정인듯 합니다)을 발로 차버리는데 이에 료야가 발끈하며 사과를 요구하면서 영화의 클라이막스 소동(?)이 시작됩니다. 학교의 최하층 계급인 영화부 아이들이 일종의 계급 반란(?)을 일으킨 거예요.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며 낄낄 거리던 사나는 결국 카스미에게 따귀를 맞게 되고, 짝 하는 따귀 소리를 슬레이트 소리 같은 신호로 받아들인 료야는 좀비 분장을 한 영화부 부원들에게 ‘이 녀석들을 모두 잡아먹어!’ 라고 소리칩니다. 한바탕 좀비 학살극이 벌어지고 료야는 이 모습을 열심히 촬영하죠. 배구부와 히로키 그룹, 리사 그룹의 아이들은 모두 좀비들에게 잡아 먹힙니다.
물론 이건 료야가 카메라로 담아 낸 영화의 내용일 뿐입니다. 결국 촬영이 제대로 되었는지도 알 수 없고 촬영된 분량을 어떻게든 영화로 써먹을 수 있게 적절히 편집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 료야의 카메라에 담긴 장면은 배구부의 덩치들에게 일방적으로 간단히 제압당하는 영화부 아이들의 처절한 모습이었을 겁니다. 소동이 정리된 후 영화부 아이들은 모두 침울해진 채 주저 앉아 있고 나머지 학생들은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하나둘씩 옥상을 떠납니다.
모두 떠나고 영화부만 남게 된 옥상에서 료야가 뒷정리를 하고 있는데, 뜻밖에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겁니다. 옥상을 떠나려다가 다시 돌아온 히로키입니다.
소설과 마찬가지로 히로키는 땅에 떨어진 렌즈후드를 주워들고 료야에게 다가갑니다. 렌즈후드를 건내주자 료야는 고맙다고 말합니다. 히로키는 돌아서서 옥상문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되는데 물론 히로키가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한 대화는 아닙니다. 소설의 내용을 보면 히로키는 그저 료야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 뿐이에요. 교실의 최하층 그룹으로 멸시당하고 있고 특히 자신과 가까운 류타와 사나에게 뒷담화를 당하는 료야에게 조금은 학교생활 힘내라고 자상하게 말을 걸어보고 싶은 심리였습니다. 소설에서는 결국 렌즈후드를 주워준 것 외에는 다른 말은 한마디도 못했지만요.
영화에서는 결국 대화를 하지만 시작은 그냥 내용이 없는 대화예요. 사실 학교에서 굳이 안 친한 급우와 대화를 하는 경우에는 뭔가 대화의 소재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히로키는 료야가 들고 있는 카메라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자기가 사용하는 8미리 필름 카메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료야는 신나서 카메라에 대해 설명합니다. 히로키는 흥미로운 태도로 설명을 듣다가 카메라를 만져봐도 되냐고 묻습니다. 물론이라고 하며 카메라를 건내주는 료야. 히로키는 카메라를 눈에 갖다 대며 렌즈를 통해 료야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반은 농담 삼아서 이런 질문을 던지죠.
“앞으로 영화감독이 되는 거니? 여배우와 결혼도 하고?”
료야는 농담을 들은 사람의 반응대로 일단 웃음을 터트린 후, 뭔가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건 무리”라고 말합니다. 히로키는 전혀 뜻밖의 대답을 들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럼 왜 영화를 찍는 거니?”
이에 대해 료야는 영화를 찍다 보면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간단히 말해 그냥 영화를 좋아하니까 찍는다는 거예요. 이 대답에 히로키는 정말 큰 충격을 받습니다. 거의 하늘이 무너진 거 같은 암울한 표정을 지어요. 결국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자리를 뜨는 히로키.
학교 건물 밖으로 나온 히로키의 눈에는 해가 지는 시간까지도 운동장에서 열심히 연습 중인 야구부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히로키는 휴대폰을 꺼내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걸고, 키리시마가 전화 받기를 기다리며 야구부의 훈련 모습을 멍하니 바라봅니다. 그런 히로키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영화가 끝납니다.
히로키가 료야와의 대화에서 충격을 받은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히로키는 일종의 가치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중요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What’s the point? 이런 질문들에 대해 스스로 생각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도 하면서 계속 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어요.
히로키는 학교 계급 구조의 최상위 계층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히로키의 의식에 학교의 최하위 계층인 영화부 아이들이 영화를 열심히 찍는 모습이 계속 신경이 쓰입니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예쁜 여자친구도 있는 자신보다도 이 모든 것들을 하나도 가지지 못했음에도 무언가 열중할만한 한 가지를 발견하고 거기에 빠져 있는 아이들이 사실은 더 빛나고 가치 있는 고교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거죠.
영화부 아이들이 열심히 영화를 찍어봐야 다른 학생들에게 비웃음을 당할 뿐이지만 히로키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너희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저 아이들이 나중에 영화감독도 되고 정말 멋진 인생을 살 거라고. 이게 히로키가 내린 일차적인 해답이에요. 하지만 료야는 히로키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하죠.
히로키가 처음에 가치 혼돈을 느낀 이유는 결국 학창 시절에 좇아야 하는 가치란 당장의 멋진 스타일 관리와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는 일 같은 게 아니라 미래의 진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몰입할 수 있는 분야를 발견하는 것이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길을 가고 있는 줄 알았던 료야는 실상은 전혀 영화감독이 될 생각도 없으면서 그저 좋아서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영화의 이런 내용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라틴어 격언인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 안에서 청소년기의 가치는 언제나 미래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고 미래를 위해 열심히 적성을 발굴해야 하며 미래를 위해 진로를 고민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겁니다. 특히 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더더욱 이런 경향이 강하죠.
하지만 지나고 보면 청소년기가 굉장히 가치 있고 빛나고 즐거운 시기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무언가에 열정을 바치고 몰입할 수 있는 자유는 성인이 된 현재보다 청소년 때가 훨씬 컸다는 게 어느 순간 명백해지거든요. 또한 그런 몰입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결국 히로키가 어떤 대답에 도달하는 게 옳은 것인지는 명확한 답이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 청소년들에게 정말 중요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고, 류타와 사나 처럼 사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카르페 디엠에 충실한 삶일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소설에서 가장 즐겁게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는 캐릭터가 바로 사나거든요.(영화에서는 꽤나 수난을 당하지만)
결국 명확한 답이 없는 질문을 늘 던지며 살게 되는 시기가 청소년기인 것입니다. 사실 인생의 대부분의 시기가 그렇습니다. 의문과 불확실성이야말로 인생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히로키는 여전히 큰 고민에 빠진 채 친구인 키리시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야구부가 훈련 중인 운동장을 향한 채 멍하니 서 있는 히로키의 뒷모습은 청소년기와 인생 전반의 불확실성을 담은 상징적인 이미지 그 자체입니다.
소설에서 제공된 매력적인 소재들로 이토록 흥미로운 이야기의 영화를 완성한 것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를 본 후 소설을 읽게 되면 영화 내용의 완성도에 더욱 감탄하게 됩니다. 소설에서 파편화 되어 있던 여섯 아이들의 흥미로운 사연들과 소재를 하나의 유기적인 플롯으로 완성도 높게 잘 엮었고 그 이야기를 통해 원작에서 표현된 주제를 더욱 심도 깊은 영역으로 까지 확장시켰습니다. 같은 시간대를 다양한 관점으로 보여주는 입체적인 스토리 구성과 흔들리는 청소년들의 정서를 절묘하게 포착하는 카메라의 구도까지 요시다 다이하치 감독의 연출력은 모든 장면에서 최선의 선택만을 보여줍니다. 캐스팅도 잘 되었고 출연한 모든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와 표현되는 주제에 부합하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키리시마가 동아리 활동 그만둔대’는 확실히 한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좋은 영화는 결국 소문이 나게 되어 있고 이 영화가 나온지 8년에 되어가는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히 예전보다는 꽤 인지도가 생긴 느낌입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 영화를 추천하는 글이 종종 올라오더군요. 몇 번을 다시 보고 곱씹어 볼수록 다양한 매력과 재미가 가득한 작품이라 저처럼 이 영화를 인생영화로 삼고 깊이 빠져드는 사람들도 앞으로 점점 늘어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에서 인생영화를 찾게 되는 경험은 영화광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 중 하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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