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원작영화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푸르고 아프고 여린 /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靑くて痛くてもろい
‘푸르고 아프고 여린’은 스미노 요루의 소설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위의 첫 문장에서 바로 부연설명을 붙여야 하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단 스미노 요루 라는 작가에 대해서. 바로 저 유명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쓴 작가입니다. ‘너의 췌장’은 스미노 요루가 ‘소설가가 되자’라는 일본의 소설 투고 사이트에 올렸던 작품으로, 유명해지고 인기를 끌자 정식 출간 되었고 어마어마한 대히트를 치게 됩니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고요. 한국에서도 상당히 유명한데, 일본 영화가 정식 개봉하기가 쉽지 않고 흥행은 더더욱 어려운 한국에도 정식 개봉해서 46만 명이라는 상당히 좋은 흥행 성적을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스미노 요루의 소설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를 읽은 이유는 ‘너의 췌장’을 쓴 작가의 새로운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저는 사실 ‘너의 췌장’을 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알고 있죠. 영화를 봤으니까요. 저는 영화광이지 소설광은 아닙니다. 소설을 읽기는 하는데 최근 몇 년간 읽은 소설의 90%는 영화를 재미있게 본 후 그 영화의 원작이 궁금해서 찾아 읽은 경우입니다. ‘너의 췌장’은 영화는 봤지만 소설은 안 읽었습니다. 이 경우는 소설이 영화보다 훨씬 유명했는데도 그랬어요. 심지어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를 아주 재미있게 읽고 난 후인 지금 시점에서도 그다지 ‘너의 췌장’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솔직히 영화를 보고 나서도 ‘이게 왜 이렇게 히트를 친거지?’ 라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물론 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너의 췌장’ 이야기는 잠깐 뒤로 미루고, 이 포스트의 첫 문장에서 바로 부연설명을 붙여야 하는 두 번째 내용에 대해서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바로 원작 소설과 영화의 제목을 다르게 표기한 부분에 대해서 입니다.
국내에 정식 출간된 이 소설의 번역 제목은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입니다. 저는 이 정식 번역 판본을 E북으로 구매해서 읽었고요.(요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저도 이제는 거의 모든 종류의 책을 E북으로 구매해서 읽는 종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포스트에서 영화의 제목을 ‘푸르고 아프고 여린’ 이라고 적었습니다. 사실 소설과 영화의 제목은 같습니다. 그리고 원본의 일본어 제목을 뉘앙스나 의미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푸르고 아프고 여린’이 더 맞는 번역이 됩니다.
‘푸르다’라는 단어. 일본어로는 ‘아오이(青い)’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 쓰인 한자 ‘청(青)’은 ‘젊다’, ‘어리다’ 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한자가 포함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의 예로는 ‘청춘(靑春)’을 들 수 있겠죠.
하지만 순우리말 ‘푸르다’는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쓰일 때 ‘어리다’와 동의어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할 경우 일상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시적이거나 은유적인 표현이 되죠. 그것도 쉽게 와닿지는 않을 거예요. ‘그때는 나도 참 푸른 시절이었다’ 같은 문장을 예로 들면 이런 표현이 전하려는 뉘앙스는 매우 복합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일본어 전문가가 아닙니다. 전문가가 아닐 뿐더러 잘 알지도 못합니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배운 내용에 더해 게임, 만화, 영화, 드라마를 통해 자주 접한 익숙한 일본어 표현과 단어, 문장들에 대해서만 조금 아는 정도입니다. 때문에 일본어 ‘아오이(青い)’가 한국어 ‘푸르다’와 어느 정도로 비슷한 의미와 뉘앙스를 가진 표현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본 여러 일본어 표현과 문장에서 ‘아오이(青い)’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과 뉘앙스를 봤을 때 한국어 ‘푸르다’와는 달리 어리다, 젊다는 뜻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표현인 듯 합니다. 즉, 한국어로 번역할 때 ‘어리다’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한 단어라는 것이죠. 물론 정확한 건 아닙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아오이를 한국어로 푸르다 라고 번역합니다. IMDB 같은 영어 사이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봐도 ‘Blue, Painful and Brittle’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영화판은 아직 한국에 정식 수입되지 않아서 한국 정식 제목이 없습니다. 적어도 이 포스팅을 작성하고 있는 지금 시점 기준으로는요.(2021년 6월) 일본 영화가 한국에 극장 개봉은 잘 하지 않아도 요즘은 극장 외에 수입 영화의 유통 채널이 다양해졌고 대부분의 유명한 일본 영화들도 정식 수입되어 한국에서 쉽게 감상이 가능합니다. 이 영화도 아마 조만간, 이 포스트를 작성하고 몇 달도 안 되서 한국에서 정식 수입판이 들어올 수도 있고 그러면 이런 논의들이 다 무의미해지긴 할 테지만요. 아무튼, 아직 정식 수입이 안 된 시점에서 포털 사이트나 국내 영화 정보 매체에 이 영화의 제목은 대부분 ‘푸르고 아프고 여린’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보았고, 바로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푸르고 아프고 여린’이라는 제목의 책은 없고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라는 책이 나오더군요. 한국 번역본이 왜 이런 제목이 되었는가는 금방 이해했지만 저는 그냥 ‘푸르고’ 라고 번역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습니다. 사실 문학 작품의 제목이라면 아주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책 내용 중에 제목의 표현이 그대로 포함되는 문장이 나오는데 그 앞뒤 문맥 상으로는 ‘어리고’가 적합한 번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케이스가 한 가지 떠올랐습니다. 코맥 맥카시의 소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이 작품은 소설 원작보다 영화가 더 유명합니다. 코엔 형제가 감독했고 아카데미 작품상 까지 받았으니까요. 아무튼 이 작품은 영화도 소설도 국내 정식 번역 제목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원제는 No Country For Old Men 인데, 이걸 하나의 문장으로 해석한다면 국내 번역 제목이 적절합니다. 하지만 원작 소설에서 이 문장은 사실 예이츠의 시의 인용으로 등장하는데, 그 시에 등장하는 온전한 문장은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이고 이 문장에서 ‘no country for old men’ 만 떼서 번역한다면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가 더 적절한 번역이 됩니다.(국내 정식 출간본에서는 ‘늙은 사람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원문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한국어로 번역할 경우 이런 미묘한 차이가 생겨버리는 거죠.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푸르고 아프고 여린’과 유사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푸르고 아프고 여린’의 국내 소설 정식 출간본은 제목을 소설 내용에 있는 문장의 맥락을 그대로 적용해서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로 번역했습니다. 사실 제목으로 더 적합한 쪽은 역시 좀 더 은유적이고 중의적인 표현인 ‘푸르고’인 것 같지만, 소설의 내용에서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생각하면, 그리고 ‘어리고’라는 표현 자체도 나쁘지는 않기에 이 제목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어느 쪽이든 다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영화가 정식 수입되었을 때 제목은 정말 어느 쪽이 되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이제 다시 이 소설의 작가 스미노 요루와 그의 대표작 ‘너의 췌장을 먹고싶어’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저는 영화만 보고 소설은 안 읽었는데, 이유는 작품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게 왜 이렇게 히트한 거지?’ 하고 의아함을 느낄 정도였고, 역시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제목이죠.
‘미안하다, 이거 보여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딱 여기에 해당하는 제목입니다. 어그로성 끝판왕 제목이라고나 할까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라니. 정말 대담하고, 황당한 제목입니다.
물론 작품의 제목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목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관심도와 주목도를 확 끌어올릴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오로지 관심을 끌기 위한 목적만으로 제목을 짓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어찌되었든 제목이란 작품의 내용이나 캐릭터, 주제의식 등 작품의 기본적인 정체성의 요소가 반영이 되어야 하고 지나치게 불쾌하거나 자극적인 단어와 표현의 사용도 자제해야 합니다. 작정하고 어그로만 끌겠다는 목적이라면 진짜 별의별 해괴한 제목들이 다 나올 수 있겠죠.
어그로를 끄는데 성공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죠. 막상 제목에 흥미를 느껴 읽게 되더라도 작품의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욕만 먹거나 소리 소문 없이 관심은 사라지게 됩니다. 둘 다 안 좋지만 후자 쪽이 더 안 좋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죠.
‘너의 췌장’은 모두가 아는 대로 그런 안 좋은 케이스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목으로 어그로를 끄는데 성공했고 이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소설을 읽었는데, 반응이 괜찮았던 것이죠. 물론 앞에서 말한 대로 영화만 본 입장에서는 그렇게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소설을 읽지 않고 이런 의견을 계속 피력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네요. 원래는 읽을 마음이 없었는데, 이 포스트를 쓰면서 역시 읽어야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혀지게 됩니다. 아마 조만간 책을 읽고 ‘너의 췌장’의 포스트도 작성하게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영화 얘기는 조금 할게요. 책도 히트했지만 영화도 상당한 대박을 쳤습니다. 요즘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젊은 여배우 중 하나인 하마베 미나미가 이 영화로 스타가 되었죠. 다만 제 감상으로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 하이틴 로맨스 영화를 꽤 많이 보는 편이데 그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작품은 아니었어요. 저는 차라리 비슷한 내용의 ‘4월은 너의 거짓말’이 훨씬 괜찮더라고요. 영화의 만듦새도 그렇지만 내용이... 사실 ‘4월은 너의 거짓말’도 ‘너의 췌장’ 정도는 아니지만 상당한 히트작이긴 하죠. 제 입장에서 ‘너의 췌장’의 경우는 워낙에 소문 자자한 작품이라 기대치가 높았던 데다가, 비슷한 내용의 ‘4월은 너의 거짓말’을 훨씬 재미있게 봤기에 두 작품이 비교가 되다 보니 평가를 더 박하게 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너의 췌장’이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푸르고 아프고 여린’을 보게 된 이유도 스미노 요루의 소설이 원작이라서가 아닙니다. 사실 원작 소설이 있다는 것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영화가 너무 괜찮아서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 보니 알게 된 것이죠.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당연히 소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히려 스미노 요루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소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정도였어요. 또 다시 언급하지만 ‘너의 췌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소설을 읽지도 않아 놓고!) 스미노 요루의 작품을 돈 주고 사서(책을 대여해서 읽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저는 어지간해서는 E북으로 구매해서 읽는 타입이니까요) 읽는다는데 망설임을 가지게 된 거죠.
하지만 결국 영화가 너무너무 괜찮았기 때문에 다른 방도는 없었습니다. 책을 사서(E북이지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책도 좋았습니다. 물론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영화 쪽이 더 마음이 듭니다. 하지만 책도 매우 훌륭하고, 대부분의 좋은 원작 소설과 영화의 관계가 그렇듯이 상호 보완적으로 영화와 소설 모두 만족스러운 감상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더군요.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또 보고, 그러고 소설도 다시 읽고 하면서 몇 주간 이 작품에 푹 빠져서 지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영화를 보게 된 이유는 배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의 주연 배우는 스기사키 하나입니다.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여배우 중 한 명이죠. 하지만 이 배우 때문에 이 영화를 본 건 아니에요. 물론 스기사키 하나의 작품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봤을 테지만, 적어도 지금 시점에 이 작품을 본 이유는 다른 이유(다른 배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저는 극장에 가서 한 편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코로나가 터지고 전혀 극장에 가지 않다가(2020년에 극장에서 본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습니다) 올해부터 슬슬 극장 영화 관람을 다시 시작했는데 이와이 슌지의 ‘라스트 레터’가 극장에 개봉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때마침 통신사 VIP 요금제로 영화를 공짜로 볼 수 있어서(이 놈의 통신사 멤버십 포인트는 영화를 보는 것 외에는 쓸데가 없습니다. 끽해야 편의점이나 파리바게뜨 정도? 2020년에는 극장에 전혀 가지 않았기에 포인트가 엄청 많이 남아버렸고 올해는 이 놈의 포인트 때문에라도 극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코로나 시국임에도 결국 극장 관람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히로세 스즈를 극장 큰 스크린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기에 영화를 보러 가게 된 것입니다.
사실 ‘푸르고 아프고 여린’을 거의 제 인생영화 수준으로 만족스럽게 봤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여러 우연들이 작용한 결과라는 점에서 마치 운명론 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스기사키 하나의 작품인데다 원래 일본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라 언젠가 분명히 보긴 했을 테지만, 아무튼 지금 시점에 보게 된 과정은 확실히 운명론 적인 우연들이 겹친 결과였습니다.
예컨대, ‘라스트 레터’가 롯데시네마에 단독 개봉한 것도 매우 결정적인 우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가입한 통신사의 VIP 혜택은 오직 공짜 영화 관람이 롯데시네마에서만 가능합니다.(2021년 기준) 다른 극장에서는 가격 할인만 될 뿐이고요. 그러니까 라스트 레터가 롯데시네마가 아닌 다른 극장 체인에서 단독 개봉을 했다면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테고, 그럼 ‘푸르고 아프고 여린’도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볼 일이 없었을 겁니다.
사실 코로나 이후 극장에 전혀 가지 않다가 다시 극장에 가기 시작한 후 라스트 레터는 두 번째로 보게 된 영화입니다. 첫 번째는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였고요. 그보다 더 빨리, ‘소울’이나 아니면 2020년 연말에 ‘원더우먼 1984’로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1년 이상 가지 않았던 극장에 다시 가게 만드는 영화로는 소울과 원더우먼이 조금은 부족했던 듯 싶습니다. 물론 ‘소울’이 굉장히 평가가 좋았기에 계속 갈까 말까 간을 보기는 했는데요. ‘귀멸의 칼날’이 개봉하지 않았다면 아마 소울을 보러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뛰어 넘어 일본 역대 흥행 1위에 오른 귀멸의 칼날이 결국 한국 극장에도 개봉을 했고, 이 작품의 임팩트는 워낙 대단하기에 결국 2019년의 ‘겨울왕국2’ 이후 처음으로 극장으로 가게 만든 영화로 선택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라스트 레터인데.... 감독은 이와이 슌지이고 주연배우는 히로세 스즈. 히로세 스즈 외에도 여러 좋은 배우들이 출연 했지만 일단 저의 관심을 가장 끄는 배우는 히로세 스즈였습니다. 제일 비중이 큰 주인공 역할이기도 하고요.(마츠 다카코와 함께 투톱 주연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와이 슌지가 제가 아주 좋아하는 감독인가 하면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히로세 스즈가 제가 아주 좋아하는 배우인가 하면 역시 그렇지는 않아요. 하지만 굳이 극장에 이 영화를 보러 간 이유는 역시 ‘러브 레터’의 후속작이라는 이유가 큰 것 같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후속작은 아니죠. 아니, 엄밀히 말 안 해도 후속작이 아닙니다. 다만 감독의 이름과 제목만 본다면 오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저도 사실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고 결정을 한 이후에도 이 영화가 러브 레터의 후속작인가보다,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었으니까요. 제가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에는 영화를 보기 전에 되도록 아무 정보가 없이 보려고 하는 편인데요. 라스트 레터의 경우는 그래도 궁금해서 인터넷에 검색해 시놉시스를 조금 훑어봤어요. 대충 봤지만 러브 레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내용은 아닌 것 같고, 다만 러브레터의 주연배우인 나카야마 미호와 토요카와 에츠시가 출연한다는 건 알았는데 러브 레터의 캐릭터 그대로 나오는지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은 채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결과는 전혀 후속작도 아니고 관련이 아예 없는 작품이더군요. 적어도 내용과 캐릭터 상으로는.
물론 아예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제목도 그렇고 영화의 형식도 그렇고 러브 레터와 상당히 닮은 작품이죠. 이런 경우는 후속작이 아니라 ‘정신적 계승작’ 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다만 이 경우는 감독마저도 같기 때문에 ‘후속작’보다는 멀고 ‘정신적 계승작’ 보다는 가까운, 그 중간 즈음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라스트 레터에 대한 저의 평가는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평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러브 레터 보다는 못하지만 흥미롭고 좋은 작품이라는 것. 어차피 통신사 포인트로 공짜로 봤으니까요 뭐... 물론 돈 주고 봤다고 해도 돈 아깝다는 생각은 안들었을 거 같습니다.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꽤나 만족스러운 관람이었습니다.
절대로 러브레터 보다 나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죠. 아주 비슷하지만 전반적으로 부족한 작품. ‘하위호환’ 이라는 표현도 쓸 수 있겠네요. 다만 한 가지, 제가 라스트 레터에서 러브 레터 보다 더 좋아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여배우입니다.
러브레터도 여배우 캐스팅이 좋은 영화로 유명합니다. 1인 2역의 주인공으로 영화를 이끌어 갔던 나카야마 미호도 물론 좋았지만, 이츠키의 어린 시절을 연기한 배우 사카이 미키에 대한 반응도 매우 좋았습니다. 특히 사카이 미키가 등장하는 과거 시점의 장면들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포근하고 환상적인 영상미로 러브레터 이후의 로맨스 영화들에 큰 영향을 주었죠. 그런 환상적인 영상미 안의 소녀 이츠키의 모습은 추억 속의 첫사랑 미소녀의 이미지 그 자체였습니다.
라스트 레터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보여주는데 러브레터와 마찬가지로 영상미가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어요. 러브레터와 마찬가지로 1인 2역 연기가 등장하는데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아무 관련이 없는 타인인데 우연히 외모가 똑같이 닮은 2명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라스트 레터에서는 과거의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성장하여 낳은 딸을 똑같이 닮은 외모로 설정해 1인 2역의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모녀 관계인 두 캐릭터, 딸의 현재 시점과 엄마의 과거 시점을 한 배우가 연기하는 거죠. 외모가 똑같은 두 캐릭터가 모녀 관계이기 때문에 아예 타인이었던 러브 레터에 비해 설정의 개연성은 높아 집니다. 그런데 라스트 레터 에서는 1인 2역 연기를 하는 배우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이 캐릭터도 동일하게 모녀 관계인 캐릭터예요. 즉 모녀 관계의 캐릭터가 2개 등장하기 때문에 엄마 2명에 딸 2명 총 4명의 캐릭터인 겁니다. 엄마끼리는 자매 관계이고, 그에 따라 딸끼리는 이종사촌 관계입니다. 이 4명의 캐릭터를 2명의 여배우가 1인 2역으로 각각 연기하는 거예요.
이 4명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2명의 여배우가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하트 오브 다크니스.. 아니 하트 오브 브라이트니스 입니다. 그리고 이 두 여배우 중 한 명 때문에 제가 ‘푸르고 아프고 여린’을 찾아보게 된 겁니다.
그 배우는 바로 모리 나나 입니다. 히로세 스즈와 함께 이 영화를 이끌어간 여배우입니다.
사실 제가 앞에서 히로세 스즈와 마츠 다카코를 이 영화를 이끌어간 투톱 주연이라고 언급을 했는데요. 사실 배우의 지명도나 무게감을 따져도 그렇고 내용을 보더라도 히로세 스즈와 마츠 다카코가 투톱 주연인 건 맞습니다. 중반까지의 전개를 보면 모리 나나는 쩌리 캐릭터 처럼 존재감이 없어요. 아니, 사실 초반부터 은근히 비중이 있는데 뭔가 별로 중요한 캐릭터가 아닌 것 같아서 그다지 의식하지 않게 되는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중반이 넘어가면서 이 캐릭터가 말 그대로 훅~ 들어옵니다. 현재 시점의 이야기는 확실히 히로세 스즈가 중심을 잡고 전개되지만 과거 시점의 이야기는 오히려 모리 나나의 캐릭터 ‘유리’가 진주인공처럼 느껴집니다. 이 유리라는 캐릭터의 현재 시점을 마츠 다카코가 연기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유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중반 이후로 모리 나나가 진짜 훅! 들어와요. 사실 모리 나나가 영화의 중반부터 눈에 띄게 되는 건 영화의 내용상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영화의 초반에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가 주로 전개되는데, 모리 나나는 현재 시점에서는 유리의 딸인 소요카라는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소요카의 엄마인 중년 유리를 연기하는 마츠 다카코와 소요카의 이종사촌인 아유미를 연기하는 히로세 스즈가 내용을 이끌어가기에 모리 나나는 큰 비중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거 시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는 중반 이후에는 어린 시절 유리를 연기하는 모리 나나의 비중이 확 올라갑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유리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흥미로워요. 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이기도 하고 뭔가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임팩트 있는 장면들이 꽤 많이 등장합니다. 보면서 모리 나나라는 배우에게 몰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히로세 스즈와 모리 나나, 두 배우의 조합이 정말 좋습니다. 그야말로 최고의 여배우 케미. 히로세 스즈는 원래 매력적인 배우이고 거기에 이와이 슌지의 영상미가 더해져 최고로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오는데, 모리 나나도 그런 히로세 스즈에게 전혀 밀리지 않아요. 그냥 두 배우가 함께 나오는 모든 장면들이 ‘눈호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영화를 보고 나와서 바로 스마트폰으로 소요카와 어린 유리를 연기한 배우가 누구인지 검색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모리 나나 라는 이름. 그리고 필모도 확인해 봅니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필모가 많지는 않지만 바로 한 편의 영화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게 ‘푸르고 아프고 여린’입니다. 예전에 스기사키 하나의 필모를 검색하면서 알게 된 영화. 언젠가 봐야지 봐야지 하고 기억해 두었던 영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의 인생영화... 라고 하면 조금 과장일 수도 있지만 그 만큼 인상 깊게 본 영화를 이런 경로로 만나게 된 거죠.
이 영화는 정말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봤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사전정보가 어느 정도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작품에 따라서, 혹은 영화를 보는 사람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하지만 영화의 모든 내용이나 핵심적인 스포일러에 대한 정보라면 기본적으로는 피하는 게 정상이고, 그런 관점의 연장선으로 내용 자체도 되도록 적게 아는 편이 영화를 더 흥미롭게 감상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일반적인 인식일 겁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의 내용을 아무것도 모른 채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도 살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 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아무튼 ‘푸르고 아프고 여린’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제가 좋아하는 여배우 2명, 스기사키 하나와 모리 나나가 출연한다는 사실 밖에는 몰랐죠. 물론 단지 이 정보 하나 만으로도 반드시 봐야 하는 영화로 인식하기에는 충분했지만요.
이미 말했듯이 거의 인생영화라고 느낄 만큼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내용도 재미있고 캐릭터도 흥미롭고 배우들도 매력있고. 제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그야말로 한 가득인 영화더군요.
우선 배우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스기사키 하나와 모리 나나 말고도 아는 배우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이미 말했지만 전혀 놀랄 일은 아니죠. 일본의 배우 팜이(특히 젊은 배우 팜이) 크기는 한데(한국과 비교하면 더더욱) 제가 워낙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보는 편이라 원래 아는 배우가 많고,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낯익은, 혹은 좋아하는 배우가 많이 나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카야마 아마네는 왠지 요즘 보는 작품마다 나오는 거 같고(실제로 요즘 가장 잘나가는 배우 중 한 명이니까요), 마츠모토 호노카의 출연도 매우 반가웠습니다.
특히 마츠모토 호노카가 이 영화에서 존재감이 상당합니다. 캐릭터 자체가 상당히 인상적이고, 배우도 그야말로 캐릭터에 딱 맞는 캐스팅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읽고 나서는 또 한번 엄지손가락을 치켜 들었습니다. 진짜 완벽한 캐스팅이었다고.
마츠모토 호노카는 드라마 ‘이 세상의 한 구석에’로 유명해진 배우입니다. 이 작품은 만화책이 원작이고 애니메이션도 유명하며 여주인공의 캐릭터가 매우 독특하고 개성이 강한데, 그래서 실사 배우의 캐스팅도 이름 있는 유명 배우 보다는 원작의 캐릭터에 딱 맞는 이미지의 배우를 찾게 되었고 결국 3000대 1의 오디션 경쟁을 뚫고 발탁된 배우가 마츠모토 호노카 입니다. 치열한 오디션의 경쟁이 무색하지 않게 마츠모토 호노카는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여주인공 ‘스즈’에 거의 100% 가까운 싱크로라고 느껴질 정도로 완벽한 캐스팅이었습니다.
그런데 ‘푸르고 아프고 여린’의 원작 소설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를 읽어 보면 마츠모토 호노가가 연기한 ‘폰짱’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완전히 ‘이 세상의 한 구석에’의 주인공 스즈와 판박이입니다. 물론 내면의 모습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성격적인 부분은 스즈와 매우 닮은 면이 있어요. 외모도 닮았고요.(이목구비가 아니라 체형이나 전체적인 분위기) 간단히 요약하면 ‘작고 귀엽고 맹해 보이는’ 스타일입니다. 이런 스타일이 흔해 보이지만 실상은 꽤나 강한 개성입니다. 흔한 듯 하면서도 독특하고 은근히 매력적인 유형이죠. 실생활에서도 그렇고, 창작물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마츠모토 호노카는 이런 스타일에 그야말로 딱 맞는 배우인듯 합니다. 쓰다 보니 실제 이 배우의 성격이 어떤지도 궁금해지네요. 버라이어티나 실제 성격이 드러나는 영상 같은 걸 찾아볼까 봐요.
마츠모토 호나카가 연기한 ‘폰짱’은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비중이 높은 여자 캐릭터입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스기사키 하나가 연기한 주인공 캐릭터 ‘아키요시 히사노’입니다. 앞에서 폰짱이 개성 있는 캐릭터라고 했지만 아키요시와 비교하면 폰짱의 개성은 개성이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입니다. 아키요시와 비교하면 이 작품의 모든 캐릭터들은 그야말로 ‘먼지처럼 평범한 존재’(“먼지처럼 평범하다는 말은 험담처럼 들리지만 내가 속한 세계에서는 최고의 칭찬이다” -에드 톰 벨-)가 되어 버리죠. 그만큼 ‘개성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키요시 히사노 입니다.
사실상 스기사키 하나가 원톱 주연으로 맹활약하는 영화입니다. 작품의 주연으로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의 세계관 전반에 걸쳐서도 그녀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합니다. 스기사키 하나가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아키요시의 연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이런 종류의 중2병 스타일의 캐릭터는 일본 창작물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작품들이 엄청 많이 실사화 되면서 배우들이 개고생을 하게 된다는 데 있죠. 이런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 배우들은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현실성을 부여해야 하는 중임(!)을 맡게 됩니다. 물론 스기사키 하나 정도로 대단한 배우라면 그런 어려운 역할도 완벽하게 수행할 수가 있죠. 다만 이 작품에서 아키요시를 연기하는 스기사키 하나의 모습이 뭔가 조금 힘들어 보이기는 했어요. 배우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만큼 이 캐릭터가 표현하기 어려운 캐릭터인 거예요.
결국 아키요시로 시작해서 아키요시로 끝나는 영화입니다. 이 캐릭터를 어떻게 보느냐(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에 대한 감상도 다양하게 나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와 소설을 비교하면 또 뭔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물론 당연한 것일 수 있는데 지면 텍스트로만 묘사되는 내용과 실제 형태를 가진 실사 배우의 연기로 표현되는 내용은 똑같은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미묘한 차이는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스기사키 하나 라는 배우 자체도 상당히 개성파인 배우니까요.
서술 트릭이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카에데’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인데, 이 카에데가 소위 말하는 ‘믿을 수 없는 화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진실)을 오해할만한 표현들을 사용하고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죠. 영화도 이 방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하지만 소설 보다 훨씬 노출되는 정보가 많은 영화에서는 이러한 화자의 트릭이 효과적으로 발현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트릭이 꽤 효과적으로 작동합니다. 일단 저는 이 작품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에 꽤 많이 놀랐습니다. 유명한 반전 영화들을 봤을 때 충격만큼은 아니어도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죠.
소설을 읽을 때는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런 충격도 없었죠. 다만 궁금하긴 했습니다. 내용을 모른 채 읽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지. 이미 내용을 알고 읽었으니 공정한 판단은 아니겠지만, 저는 그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보다도 더 많은 단서들이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볼 때는 전혀 예상을 못했어요. 그런데 만약 소설이었다면 이런 저런 단서들로 어느 정도 예상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가 소설보다 당연히 정보는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역으로 더 속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예컨대 저는 스기사키 하나라는 배우를 좋아하기 때문에, 영화 속 아키요시에게 금방 몰입했고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카에데가 아키요시에 대해 ‘죽었다’고 언급한 순간 너무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어요.
이 작품의 주된 내용은 아키요시와 카에데의 대립입니다. 물론 본질은 카에데 쪽에서 가진 일방적인 반감이죠. 주인공은 카에데 이지만 영화, 소설 모두 본 입장에서는 이 주인공은 공감을 얻기 힘든 캐릭터입니다. 아키요시와 카에데, 어느 쪽이 잘못했나? 당연히 카에데 입니다. 작품의 결말도 결국은 카에데의 후회이고 카에데가 자신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을지의 여부(아키요시가 카에데의 사과를 받아줄 것인가)는 열린 결말로 끝납니다. 물론 화자가 카에데이기 때문에 조금은 희망적인 분위기이고 영화는 더욱 노골적으로 희망적인 연출을 하고 있죠. 아키요시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사과를 받아준다고 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을 거예요.
영화가 확실히 소설보다는 카에데의 편을 들어주고 있어요. 물론 소설에 없는 미즈키 에피소드를 넣어서 아키요시의 편을 들어주는 부분도 있지만, 가장 결정적으로 카에데의 입장을 불리하게 만드는 소설의 내용이 영화에서는 빠져 있거든요. 바로 ‘왜 카에데가 그런 짓을 했는가’라는 동기.
사실 카에데의 동기가 작품의 내용상 가장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와 소설이 이 부분에서 갈라져 버리니까 정말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버린 겁니다. 전반적으로 원작 내용에 굉장히 충실한 영화화였는데, 이런 핵심적인 내용에서는 차이를 만들어버린 것이죠.
이해는 갑니다. 주인공이 너무 찌질하니까. 솔직히 작품의 주인공이 찌질하든, 비호감이든, 심지어 악당이든 별 상관은 없습니다. 창작물의 주인공의 성격이나 성향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가장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문화 분야입니다. 주인공을 너무 비호감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영화 제작자들이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닙니다.
그런 영화 제작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인공 카에데의 캐스팅입니다. 요시자와 료. 소설 기준으로 생각해 본다면 명백히 미스캐스팅입니다. 카에데 역을 하기에는 배우가 너무 잘생겼어요. 사람이 요시자와 료 처럼 생겼다면 절대로 이 작품의 카에데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살지 않습니다. 아키요시가 카에데에게 말하잖아요. “설마 날 좋아했던 거야? 그게 뭐야, 기분 나빠!” 요시자와 료 처럼 생기면 평생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들을 일이 없습니다!!
소설도 영화도 아키요시를 향한 카에데의 연애감정을 애매하게 묘사합니다. 일단 소설에서 카에데가 명확하게 동기를 밝히기는 합니다. “나만의 아키요시가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고 나와 멀어지는 게 싫었다”고. 하지만 이것이 연애 감정인지 확실하게 규정하지는 않아요. 소설이 이러니 영화는 더더욱 그렇고요. 영화에서는 정말 카에데가 아키요시에게 연애 감정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부분은 작가의 무리수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스미노 요루의 대표작 ‘너의 췌장’도 비슷하죠. 두 남녀 주인공의 관계가 젊은 남녀의 로맨스라고 명확하게 규정해주질 않아요. 그런데 그런 내용으로 가까워 지는 두 남녀의 관계가 로맨스가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이런 걸 애매하게 처리하는 건 뭐랄까, 작가의 쓸데 없는 고집처럼 느껴집니다.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 라면 내 작품이 너무 평범하게 느껴질 거 같다’라는 생각을 작가가 하는 거 같아요. ‘내 작품은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라는, 그런 일차원적이고 단순한 내용의 작품이 아니야’ 라는 항변이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수예요. 너의 췌장의 두 주인공의 관계도 그렇고, 푸르고 아프고 여린 에서 카에데가 아키요시에게 품었던 집착도... 이게 ‘연애 감정’이 아니면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설마 영화판에서 요시자와 료를 캐스팅한 이유도 작가의 의도를 따라주기 위한 목적이었을 까요? 남자 주인공이 이 정도로 잘생겼으니 단순한 연애 감정으로 여자 주인공에게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도록? 정말 그런 의도라면 어느 정도는 성공하기는 한 것 같습니다. 요시자와 료의 외모도 외모지만, 확실히 연애에 있어서는 무관심한 듯한 연기를 하고 있거든요. 잘생긴 배우가 이런 연기를 하니까 더욱 설득력이 있는 거고요.(잘생기지 않은 사람이 연애에 관심 없다고 해봤자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연애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것으로 인식될 뿐이니까요.)
하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카에데에게서 전혀 요시자와 료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아요. 이 캐릭터는 인간관계에서 일종의 벽을 만드는 스타일인데, 쉽게 말해서 아싸 타입입니다. 대학 생활에서 여학생들의 호감을 얻을 만한, 그런 매력적인 타입이 아니란 것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그런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온 여학생인 아키요시에게 카에데가 연애 감정을 품으리라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키요시는 카에데가 아닌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하는데 이것도 카에데가 별로 이성적인 매력이 없는 타입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상황이고요.
차라리 토스케 역을 연기한 오카야마 아마네가 카에데 역에 더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오카야마 아마네는 데뷔한 이후로 ‘찐따 캐릭터 전문 배우’로 매우 각광을 받는 배우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토스케는 전혀 찐따가 아니고 굉장히 활발하게 대학 생활을 하는 인싸 캐릭터입니다. 아싸인 주인공 카에데와 친구인 이유도 토스케가 워낙에 인싸이고 사교성이 좋아서 사람 안 가리고 사귀다 보니 카에데와도 친해졌다는 설정이에요.
오카야마 아마네는 진따 캐릭터 전문 배우이긴 하지만 잘나가는 인싸 캐릭터 역할도 생각보다 잘 합니다. 보기보다 정말 재능 넘치고 다채로운 매력을 가진 배우입니다. 하긴 진따 역할만 전문으로 해서는 지금처럼 배우로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며 잘나가기는 힘들었겠죠. ‘푸르고 아프고 여린’에서도 인싸인 토스케 역을 정말 잘하더군요. 하지만 역시 저는 이 배우가 주인공 카에데 역을 했다면 더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뭔가 너무 뻔한 캐스팅 같기는 하지만. 뻔한 캐스팅이 미스캐스팅 보다는 낫잖아요.
사실 제가 ‘미스캐스팅’이라고 말한 게 공정한 표현은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 제작진이 소설과 다르게 카에데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쪽이라면 요시자와 료가 그 의도에 확실히 맞는 캐스팅이긴 하니까요. 다만 이렇게 되니까 오히려 아키요시 쪽에 문제가 생겨 버리죠.
아키요시는 순수하게 이상을 꿈꾸는 천연계 중2병 캐릭터로 설정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상을 꿈꾸는 동아리 ‘모아이’에 대해서 이 동아리를 만든 이유는 ‘친한 친구(카에데)와 함께 어울려 놀기 위한 구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확실히 같은 작가의 작품답게 이런 면은 ‘너의 췌장’의 여주인공 사쿠라와 닮았죠.
사쿠라가 하루키에게 보였던 적극성. 그리고 아키요시가 카에데에게 보였던 적극성. 저는 정말로 작가가 너무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사쿠라는 병을 앓고 있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키요시는? 남자사람인 친한 친구와 함께 있고 싶고 함께 놀고 싶어서 동아리까지 만들 정도인데(사실 동아리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카에데가 제공해준 것이지만) 이게 연애 감정이 아니라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아키요시는 카에데와 사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귑니다. 나중에는 카에데에게 ‘설마 날 좋아했던 거야? 기분 나빠!’ 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사쿠라는 성격이 조금 특이하고 병을 앓고 있어서 그랬던 것인데 아키요시는... 그냥 성격이 특이한 거 말고는 없어요. ‘원래 좀 특이한 애라서’ 작가의 근거는 이게 전부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뭔가 작가의 묘한 집착 같은 것이 느껴져요. 그러니까 제가 생각하기에 스미노 요루라는 작가는.... 젊은 남녀가 연인이 아닌 관계로 한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가까워지는 상황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는 듯 합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제가 소설을 읽고 카에데를 이성적인 매력이 별로 없는 캐릭터로 생각하게 된 건 작가의 의도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네요. 외모라든가 다른 요인 같은 건 없어요. 아키요시가 카에데에게 연애 감정이 없었던 건 그냥 그런 캐릭터 였기 때문. 그냥 그 두 사람이 ‘그런 관계’ 였기 때문인 것이라고. 이것이 작가의 진정한 의도처럼 느껴지네요.
둘만의 동아리였던 모아이가 점점 규모가 커지고 아키요시의 교우 관계가 넓어져 갈 때, 아키요시는 늘 카에데를 의식하고 카에데에게 꾸준히 질문을 합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냐’고,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 말해달라’고. 결국 카에데 본인이 반성하고 후회한 대로 모든 상황을 바로 잡을 기회는 카에데에게 언제나 있었습니다. 아키요시의 잘못도 없지는 않지만 결국 영화에서 어떻게 포장해도 카에데의 찌질함이 문제였던 것이고 소설에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죠.
좋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작품이지만 마지막으로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배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이 배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라고 언급을 했었죠. 바로 모리 나나 입니다.
모리 나나는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이 없습니다. 사실 ‘라스트 레터’만 본 상태에서는 이 배우의 얼굴이 완전히 눈에 익지 않아서 배우를 찾는데도 힘이 들었습니다. 물론 비중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처음 등장할 때 ‘아, 모리 나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긴가민가 했어요.
모리 나나는 이 영화에서 미즈키라는 캐릭터를 연기합니다. 이 캐릭터가 원작 소설과 영화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입니다. 아예 원작에 등장 자체를 하지 않는 캐릭터거든요.
카에데가 모아이에 있던 시절부터 모아이는 다양한 활동을 해왔지만 활동 자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소설에는 없습니다. 카에데가 나간 이후의 모아이의 주된 활동 중 하나인 ‘교류회’의 묘사만 나올 뿐이죠. 그런데 영화에서는 카에데와 아키요시 둘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이 실제 영상으로 묘사되고 그 중 하나가 미즈키가 있던 시설에서의 봉사활동 입니다.
이 시설이 정확히 어떤 시설인지는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많은 걸로 봐서는 고아원 같기는 한데. 그런데 미즈키는 고아라서 거기 있는 거 같지는 않거든요. 왕따 같은 문제로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그 시설에 온 것이고 거기서 카에데 같은 대학생 자원 봉사자에게 공부를 배우는 상황으로 나옵니다. 고아원 같기도 하고, 대안 학교 같기도 하고, 뭔가 어려움에 처한 미성년자들의 쉼터 같은 곳이에요.
앞에서 소설에서 명확히 밝혀진 바로는 카에데가 저지른 짓의 (가장 큰)동기가 아키요시에 대한 집착이라고 언급을 했었죠.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저 ‘믿을 수 없는 화자’인 카에데의 말을 믿는 것 뿐인데, 정말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카에데는 천연 이상주의자 아키요시의 영향으로 정말 이상을 꿈꿨던 것이고, 모아이가 그런 방향에서 벗어나게 되자 멋대로 아키요시와 모아이를 증오하게 된 것으로 나옵니다.
영화에서 미즈키라는 소설에 없는 캐릭터를 굳이 등장시킨 이유는 역시 아키요시와 카에데의 관계가 연애 감정에 의한 갈등이 아닌 모아이라는 동아리가 가진 이상주의 노선에 대한 이해의 차이 라는 식으로 인식되도록 하는 의도라고 생각됩니다.
미즈키가 카에데에게 ‘나한테 공부 가르친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라고 하자, 뒤에서 듣고 있던 아키요시가 환하게 웃으면서 단호하게 ‘달라진다’ 라고 말합니다. 카에데가 모아이를 떠난 이후에도 미즈키는 모아이의 활동에 계속 좋은 영향을 받게 되고, 결국 방황하던 청소년이었지만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에 가려는 마음까지 먹게 됩니다. 카에데가 ‘변했다’고 생각한 모아이였지만 영화에서는 미즈키를 통해 ‘모아이는 변하지 않았어’ 라고 말한 아키요시의 말에 무게를 실어준 셈입니다.
큰 비중이 없기는 하지만 모리 나나가 연기한 미즈키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라스트 레터’와는 또 다른 느낌의 모리 나나의 매력과 재능을 보여준 캐릭터죠. 무엇보다 모리 나나가 베이스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해보니 모리 나나는 가수로도 데뷔를 했더군요! 모리 나나의 대표곡 ‘Smile’은 요즘 제가 가장 즐겨 듣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푸르고 아프고 여린’에서 모리 나나가 노래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입니다. 애초에 모리 나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이라서 이런 장면들을 통해 모리 나나의 새로운 매력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소녀 뮤지션’은 대중문화나 서브컬쳐에서 흔한 캐릭터이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모리 나나가 연기한 미즈키는 역시 평범하지 않습니다. 보통 이런 뮤지션 캐릭터가 보컬을 하면서 악기 연주를 한다면 기타를 치게 되는데 베이스를 친다는 게 특이했고, 심지어 왼손잡이더군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미즈키 라는 캐릭터를 표현하는 어떤 의도된 설정인 건지. 아니면 실제 모리 나나가 왼손잡이 베이스 연주자인건지. 아마 후자 쪽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푸르고 아프고 여린’은 확실히 저의 인생영화라고 부를 만한 작품입니다. 좋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저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스토리와 매력적인 캐릭터들. 그 캐릭터들의 매력을 원작과 같으면서도 다른 방향으로 확실히 끌어 올려준 최고의 배우들의 활약. 물론 감독의 역할도 컸습니다. 원작이 있는 일본 상업영화는 정말 그냥 주어진 대본 그대로 대충 찍어낸 듯한 영화가 많은데 아무리 좋은 내용과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어도 영화를 그렇게 대충 만들면 그 매력은 다 죽어버리죠. ‘푸르고 아프고 여린’을 연출한 카리야마 슌스케는 다행히 그런 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말 감각 있고 재능있는 감독이라는 걸 이 작품을 통해 확실히 보여주더군요.
몇 주간 이 작품에 푹 빠져서 지내면서 정말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활력소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트위터 @dsz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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