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상업 영화 프랜차이즈 산업에서 멀티버스는 매우 도전적인 시도입니다. 현재 전 세계 대형 프랜차이즈 영상 콘텐츠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디즈니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앞장서서 이 도전적인 길을 개척하고 있는데, 솔직히 저는 아직도 확신이 안 섭니다. MCU는 일단 ‘어벤져스: 엔드게임’으로 기존의 판을 깔끔하게 정리한 다음 바로 직후에 나온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멀티버스의 떡밥만 살짝 던지고, 그 후 디즈니 플러스의 드라마 ‘로키’에서 본격적인 멀티버스 세계관에 시동을 걸어서 이번에 나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으로 상당히 완성도 높은 멀티버스 콘텐츠를 선보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멀티버스라는 과감한 도전에 대한 우려를 날려버리는 뛰어난 작품!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 세계관의 완성도에 대한 불안감을 완전히 날려버리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이 영화가 ‘스파이더맨’이기 때문입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 세계관을 적용한 영화로서 엄청나게 재미있는 이유는 그냥 이 영화가 ‘스파이더맨’ 영화라서 그래요. 지금까지 나온 모든 상업 영화의 프랜차이즈 소재와 아이템 중에서 스파이더맨만큼 멀티버스 세계관을 활용하기 좋은 것이 달리 없습니다.
배트맨, 엑스맨, 터미네이터 등도 가능은 하지만 스파이더맨만큼은 아닐 거예요. 물론 우리가 아는 대로 다음 타자는 배트맨입니다. 2022년 연말에 개봉할 예정인 ‘더 플래시’에서 DC 히어로들도 멀티버스 세계관에 진입할 것이고 이 영화에 벤 에플렉과 마이클 키튼이 모두 배트맨 역으로 출연할 예정입니다. 솔직히 이 영화도 굉장할 거예요. 하지만 이 영화는 배트맨이 아니라 플래시가 주인공인 영화이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처럼 멀티버스 세계관을 완전히 주된 내용으로 삼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뭔가, 조심스럽고 어렵습니다, 멀티버스 세계관이란. 결국 스파이더맨 영화가 아니라면 이 정도로 완벽한 것은 보여주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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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이 멀티버스 세계관을 적용시킨 콘텐츠를 선보이기에 너무나도 완벽한 소재인 이유는 그동안 샘스파, 어스파, 홈스파라는 3개의 시리즈로 진행되어 오면서 스파이더맨의 캐릭터성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완전하게 확립된 대중적인 코드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유명한 스파이더맨의 캐치프레이즈인 ‘Your friendly neighborhood(당신의 다정한 이웃)’입니다.
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 톰 홀랜드가 연기한 3개의 ‘피터 파커’ 캐릭터는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도 차이가 있고 각자 처해 있는 상황이나 삶의 드라마도 다르죠. 하지만 수트를 입고 활약하는 ‘스파이더맨’으로서는 완전히 공통된 정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봐온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피터 파커는 완벽한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언제나 평범한 소시민 혹은 청소년의 고민거리가 그의 삶에 함께 하고 때로는 너무 힘들게 그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활비 걱정과 과제에 쫓기면서도 그는 늘 다정한 이웃 ‘스파이더맨’으로서 고통받는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남는 시간 쪼개가며 수트를 입고 빌딩 숲 사이를 날아다닙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자기 삶이 망가질 위험도 있지만(실제로 늘 망가집니다) 절대 이 일은 그만두지는 않습니다. 스파이더맨은 사람들을 돕는 것을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힘에 뒤따르는 큰 책임.
이게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슈퍼 히어로라면 당연한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이런 모범적이고 교과서적인 히어로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가장 닮은 게 ‘캡틴 아메리카’인데, 이 캐릭터는 다정한 이웃보다는 국민적인 영웅에 가깝죠. 전쟁 영웅 같은. 실제로 전쟁 영웅이기도 하고요.
스파이더맨의 히어로로서의 정체성은 ‘악과 싸운다’가 아니라 ‘사람들을 돕는다’는 측면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심지어 빌런들조차도 그에게는 ‘도와야 할 대상’입니다. 물론 스파이더맨도 빌런과 싸우다 보면 돕겠다는 생각보다는 적대감과 증오만을 품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모습들은 대부분 그의 실책 혹은 ‘잘못된 행동’으로 그려집니다. 그런 행동들이 스파이더맨 스스로에게도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고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멀티버스 세계관이라는 과감한 시도를 도입하여 톰 홀랜드 뿐 아니라 토비 맥과이어, 앤드류 가필드의 피터 파커/스파이더맨 캐릭터를 함께 등장시켰을 때 처음 만난 이들끼리 완전히 정서적으로 일치되며 완벽한 팀으로서의 조화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스파이더맨의 캐릭터성을 확고히 세우는 방향으로 작품의 방향성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 나온 토비 맥과이어와 앤드류 가필드의 모습은 단순히 오랜만에 스파이더맨으로서 등장하는 이 배우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 이상의 짠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들은 과거 스파이더맨 영화를 현역으로 찍을 무렵보다 나이가 들어 현재 중년입니다. 영화는 이들이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히어로로서의 삶 그 자체는 언제나 고생하고 힘들어하면서도 다정한 이웃으로서의 책임을 멈추지 않고 해 나가는 것이기에... 나이 들고 초췌해져 보여도 그게 다정한 이웃인 히어로, 스파이더맨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이는 겁니다. “It’s what we do.”
이 영화에서 멀티버스로 융화된 세계관과 정서는 신묘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샘스파, 어스파, 홈스파는 모두 같은 스파이더맨 영화들이지만 각각의 개성과 특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진행 중인 MCU의 스파이더맨에 멀티버스로 3개의 스파이더맨 영화들의 정서가 융화됨으로써 이제는 이 모든 스파이더맨 영화들이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기존 샘스파와 어스파에 있었던 장점과 특징들이 MCU의 스파이더맨(홈스파)에게로 완전하게 이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MCU의 스파이더맨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이점으로 작용합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 소재가 매우 풍부해졌습니다. 일단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토리 자체가 아주 흥미진진하고요. 이전 두 편의 홈스파 영화들과 비교해서 이번 작품은 훨씬 무겁고 비극적인 내용이 되었는데 멀티버스로 인해 융화되고 제대로 확립된 스파이더맨의 캐릭터성이 이런 작품 분위기의 전환을 아주 자연스럽게 만들어 줍니다. 홈스파의 피터 파커는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성인이 되었고 훨씬 거대한 세상, 그리고 더 큰 시련과 고난의 무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아주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펼쳐질 거예요.
솔직히 지금까지의 MCU 스파이더맨 작품들은 너무 어벤져스 세계관의 부속물이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1편인 ‘홈커밍’부터 MCU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터줏대감 캐릭터인 아이언맨의 비중이 너무 컸었죠. 그리고 아이언맨이 사망한 이후의 작품인 ‘파 프롬 홈’에서도 여전히 아이언맨의 드라마가 이어지고 있었고요. 하지만 ‘노 웨이 홈’을 통해 드디어 스파이더맨이 과거 최고 인기의 단독 히어로 영화 프랜차이즈로의 위치를 다시금 우뚝 세웠다는 느낌입니다. 코로나 시국임에도 히어로 단독 영화 중 역대 월드와이드 흥행 1위의 기록을 세운 사실을 굳이 예로 들 필요도 없습니다. 이제 스파이더맨 신작에 대해 ‘현존 최고의 블록버스터 신작’이라는 기대감이 다시 생겼습니다.
긴 세월 동안 여러 편의 스파이더맨 영화가 나왔습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그 모든 스파이더맨 영화들을 아우르는 ‘총체’가 되었습니다. 물론 단독 영화로서 여전히 최고의 스파이더맨 영화는 샘 레이미가 만든 ‘스파이더맨 2’이지만, ‘노 웨이 홈’ 또한 멀티버스라는 어려운 시도를 성공적으로 완성해내며 스파이더맨 영화의 역사에 커다란 이정표를 새롭게 세웠습니다. 더불어 이 영화는 현시대 최대의 영상 콘텐츠 프랜차이즈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도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멀티버스! 드디어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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