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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영화사이

[역사와 영화사이] 진주만 (2차대전/ 태평양전쟁)

by 대서즐라 2021.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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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재영화 리뷰


진주만 Pearl Harbor

2차 대전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시작됩니다. 말 그대로 ‘세계 대전’으로 전 세계적인 규모로 전쟁이 벌어졌지만 가장 핵심이 되는 두 국가는 독일과 일본입니다. 2차 대전의 ‘악역’이자 패전국들이죠. 

일반적으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은 그만큼 일본의 영향에 대해서 축소해서 보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왜냐하면 독일이 전쟁을 일으키기 2년 전에 이미 일본의 전쟁은 시작되었으니까요. 바로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 전쟁입니다.

중일 전쟁을 2차 대전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중일 전쟁이 2차 대전의 가장 큰 전선 중 하나였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2차 대전을 통해 초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는 미국이 이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 원인도 중일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2차 대전의 큰 전선은 모두 4개 입니다. 독일과 일본은 각각 2개 전선의 큰 전쟁을 치루었죠.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영국, 미국과 맞섰고 동부 전선에서는 소련과 끔찍한 살육전을 벌였습니다. 일본은 광활한 대륙에서 중일 전쟁의 늪으로 빨려 들어갔고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을 상대로 처절하고 무모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이 전쟁들에서 결국 패배합니다. 이 4개의 큰 전쟁을 모두 본인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먼저 항복하는 쪽이 되고 말았죠.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으로 프랑스, 영국과 맞서는 독일의 서부 전선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소련과의 전쟁이 시작된 건 1941년 6월의 대대적인 소련 침공 작전이었던 ‘바르바로사 작전’에 의해서입니다. 중일 전쟁의 시작은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양국의 국지전이었고 일본과 미국의 전쟁인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에 진주만의 미군 태평양 함대 기지를 일본이 기습 공격하면서 시작됩니다. 많이들 알고 있는 ‘진주만 공습’이 바로 이것이죠.


사람들이 2차대전사를 논할 때 역시 더 큰 비중을 두는 쪽은 일본보다는 독일입니다. 이 글에서 지금까지 언급도 안 한 이탈리아까지 포함해서 세 나라가 삼각 동맹을 맺었고 이것을 추축국이라고 합니다. 이탈리아를 언급도 안 한 이유는 그만큼 추축국 중에서 비중이 쥐뿔도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고 일본은 이탈리아와 달리 확실히 2차대전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나라입니다. 다만 언급한 대로 독일보다는 비중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에요. 

그런데 이 ‘비중’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걸까요? 2차 대전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이라면 독일과 일본의 전력 기준으로 판단하게 될 겁니다. 두 나라 모두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독일의 군사력이 더 강했고, 실제로 이 두 나라를 항복시키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의 전력도 독일 전선 쪽에 더 큰 비중을 두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세한 내용을 모르더라도 ‘히틀러’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과 유명세 때문에 독일의 비중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히틀러, 나치 독일... 마치 창작물에 등장하는 악의 제국 같은 느낌이죠. 실제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전후 수많은 대중문화와 서브컬쳐 창작물에서 악의 조직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나치가 그대로 악의 세력으로 등장하는 작품도 많았고요.

2차 대전 소재의 가장 유명한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일 겁니다. 이 작품도 독일 전선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아주 유명해졌죠. 그리고 스필버그의 또 다른 작품 ‘쉰들러 리스트’ 역시 2차 대전 소재의 영화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 다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스필버그에게 처음으로 아카데미 감독상과 작품상을 안겨주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히틀러와 나치 독일이 유대인을 학살했기 때문에 유대인의 영향력이 강한 미국 대중문화 산업에서 2차 대전 소재의 작품들을 독일 전선 위주로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유대인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요.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다소 과장되었고 본질을 오도한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애초에 2차 대전 소재의 영화 자체가 그렇게 많이 제작되지 않습니다. 전쟁 영화라는 장르 자체가 그런 편이죠. 또 그런 소수의 2차 대전 소재 영화 중에서 미국의 대 독일 전선 영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큰 것도 아닙니다. 

쉰들러 리스트


우선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시기에 나온 또 한 편의 2차 대전 소재 걸작 전쟁 영화인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 라인’은 태평양 전쟁의 과달카날 전역을 소재로 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2000년대에 나온 할리우드의 2차 대전 소재 전쟁 영화 중에서 특히 유명하고 평가가 좋은 작품으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꼽을 수 있죠.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태평양 전쟁의 이오지마 전투를 그리는 영화입니다. 다만 씬 레드 라인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전쟁 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며 영화 팬들에게는 상당히 유명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입니다.

씬 레드 라인


씬 레드 라인은 테렌스 맬릭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영화에서도 철학적인 주제 의식을 깊게 탐구하고 있어서 대중성은 떨어지는 편이며,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할리우드 작품이지만 일본군 시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세계적으로 폭넓은 관객층에 어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는 더 그랬고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엄밀히 말하면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 인지도는 있는 편인데(앞에서 말했듯 엄청난 걸작이기 때문입니다) 비교 대상이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작품성도 뛰어난데다 전쟁 영화 대중성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되어 버리니 상대적으로 많이 후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할리우드 작품은 아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역시 2차 대전 소재의 유명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작품은 전쟁 영화가 아니라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기에 이 두 작품이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부문 후보작 라인업에 함께 올랐습니다. 당시 작품상은 ‘셰익스피어 인 러브’가 수상했으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감독상 등 5개 부문을, 인생은 아름다워도 남우주연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하며 시상식을 빛낸 주요 작품이 되었죠.

인생은 아름다워


앞에서 언급했듯 2차 대전 소재의 유명한 작품이 편수가 그렇게 많지 않지만, 그 중에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인생은 아름다워, 거기에 쉰들러 리스트와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같은 작품까지 더해 이런 몇몇 작품들이 큰 임팩트를 남긴 덕분에 2차 대전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독일 전선 쪽으로 치중되는 현상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많은 원인 중 하나라고는 할 수 있겠죠.

피아니스트


이 영화들은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나온 작품들인데,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태평양 전쟁 관련 작품들도 꽤 나온 편이라 그 영향으로 어느 정도 2차 대전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독일 전선 쪽 작품이 더 많은 편이고 임팩트 있는 대작도 대체로 그 쪽이에요. 예를 들어 2차 대전 소재로 비교적 최근작 중 유명했던 작품이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인데 역시 독일 전선 이야기 입니다. 

덩케르크


태평양 전쟁 소재로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지만 어떤 작품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위상을 넘지 못했죠. 사실 근접한 작품조차도 없을 겁니다. 작품성으로만 국한하면 씬 레드 라인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근접할 수는 있을 테지만, 역시 대중성에서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사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나오고 몇 년 뒤에 아주 대중적인 방향성을 추구한 태평양 전쟁 소재의 영화가 나왔습니다.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상업 블록버스터’ 영화였습니다. 당연히 작품성 면에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지만 상업 블록버스터이니 만큼 상당한 대중성을 갖추고 있었죠. 스필버그 만큼은 아니어도 당시에 꽤나 잘나가는 할리우드의 대표 흥행 감독이 만든 영화고요.

네, 이 포스트의 제목으로 진작 명시되었지만 그 작품은 바로 마이클 베이 감독이 만든 ‘진주만’입니다. 그럼 씬 레드 라인의 작품성과 진주만의 대중성... 이 둘을 합하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견될 수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두 작품을 합치더라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씬 레드 라인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비견될만한 작품성을 갖추고 있지만, 진주만은 상업 블록버스터의 방향으로 제작되었음에도 크게 흥행하지도 못했고 여러모로 하자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흥행 성적만 놓고 본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진주만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습니다. 진주만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흥행을 넘지는 못했지만 거의 근접한 정도의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진주만의 제작비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2배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제 수익의 차이는 더욱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주만이 실패작이라는 인식이 강한 편인데 사실 실패작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패작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 이상으로 성공작이라고 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당시 마이클 베이는 나쁜 녀석들, 더록, 아마겟돈을 연달아 성공시키며 ‘인디펜던스 데이’의 롤랜드 에머리히와 함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감독의 대표 격인 인물이었고 그런 감독의 신작 블록버스터 라는 사실 만으로 진주만의 흥행 기대치는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감독도 대단하고 제작비도 높은데다 상업 블록버스터 다운 쟁쟁한 캐스팅까지 자랑하는 영화였죠. 벤 애플렉과 조쉬 하트넷이라는 당대 최고의 인기 남자 배우 두 명을 나란히 캐스팅 했고 여배우는 케이트 베킨세일, 거기에 쿠바 구딩 주니어, 톰 시즈모어, 알렉 볼드윈 등 조연진도 쟁쟁했습니다. 이 정도면 어마어마한 기대작으로 꼽히는 게 당연한 수준입니다.


저 역시 이 영화가 개봉하자마자 바로 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더록과 아마겟돈을 만든 마이클 베이의 신작 블록버스터! 당연히 극장에서 봐야 하는 ‘필견’ 작품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진주만과 관련해서 개인적으로 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사실 에피소드랄 건 아니고, 제가 이 영화에 대해 뭔가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일단 가장 신기한 것은 이 영화가 개봉한 당일 까지도 저는 이런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에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영화광 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는데 영화광의 가장 기본적인 자질, 즉 ‘언제나 새로 나오는(나올 예정인) 신작들에 대한 정보에 열정적인 관심을 가진다’는 의식은 충분히 갖추고 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대해 몰랐다? 심지어 마이클 베이는 당시에(지금은 아니고) 상당히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였는데도?


너무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 가설은 당시에 제가 어떤 사정으로 인해 영화에 대한 관심이 다른 때보다 약해져 있었다는 것. 제가 살면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를 단 하나만 꼽자면 당연히 ‘영화’이지만 원래 잡식성 취향이라 살면서 다양한 관심사들에 시기를 달리하며 빠지곤 했거든요. 인간관계나 소위 말하는 ‘현생’에 충실하느라 대부분의 취미 생활에 관심을 끊고 지냈던 적도 있고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두 번째 가설이 좀 더 유력합니다. 두 번째 가설은 당시도 영화에 많은 관심과 열정을 두고 지내던 시기였지만 이 ‘관심’의 레이더망이란 게 완벽한 게 아니라서 단순히 망을 빠져나간 작품, 즉 ‘놓쳐버린 작품’이 있을 수 있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진주만은 이 경우에 해당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살면서 그런 영화들이 꽤 있었거든요. 아주 예전에는 신작 영화에 대한 정보를 ‘키노’나 ‘스크린’ 같은 영화 잡지를 통해 얻었습니다.(이 책들은 지금도 제 방 어딘가에 쌓여 있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 시대가 되었지만 진주만이 개봉한 시기까지는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얻는 시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보 자체는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완벽하고 능숙하게 활용하지는 못했거든요. 당시에는 나이도 어렸으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진주만이 개봉할 때까지 이 영화에 대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진주만 개봉했는데 보러갈 거임?’ 라고 듣고 알게 된 겁니다. 제 대답은 당연히 ‘그게 뭔데?’ 였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친구는 제 대답에 깜짝 놀랐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걸 몰라?’ 하고 말이죠.

신기한 일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는 ‘진주만’이라는 제목을 듣고도 이 영화가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 된 진주만 공습에 대한 영화인 걸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저 ‘마이클 베이의 신작 블록버스터’ 라는 친구의 설명만 듣고 머릿속에 더록이나 아마겟돈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떠올렸던 것입니다. 

더 록


심지어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도 얼른 진주만 공습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진주만 공습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마이클 베이의 신작 블록버스터’와 ‘진주만 공습’이 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개념이었을 뿐입니다. 포스터의 이미지와 거기에 적힌 ‘진주만’이라는 글자를 보고 처음에는 무슨 내용이지? 비행기 액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윽고 어라? 진주만? 설마 진주만 공습을 영화화한 작품인 거야? 라는 생각에 결국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진주만 공습을 몰랐을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았기 때문에 이걸 굳이 왜 영화화하지? 라는 의문이 바로 떠올랐거든요.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당시에 저는 진주만 공습을 영화화한다는 기획이 뭔가 굉장히 ‘별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실 당시에 ‘블록버스터 영화’에 대한 인식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저 개인적으로도 그랬지만 그냥 영화팬들 전반의 인식도 그랬습니다. 지금이야 블록버스터 급의 큰 스케일과 내용의 작품이 할리우드에서만 한해에 수십 편이 제작되고 할리우드 외의 다른 나라에서도 많은 편수가 제작됩니다. 거기에 내용과 소재, 작품의 스타일과 방향성도 다양하죠. 하지만 당시에는 1년에 블록버스터라고 부를 만한 작품은 소수만 개봉할 뿐이었고 소재나 스타일도 그다지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어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진주만 공습이 제가 생각하는 블록버스터 영화의 소재로는 도무지 어울려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이클 베이 작품’이라는 조건이 붙으면 더욱 그렇습니다. 게다가 단지 그 정도가 아니라 뭔가 세련되지 않고 낡은 기획이라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사실 진주만 공습은 이미 70년대에 ‘도라 도라 도라’ 라는 아주 유명한 작품으로 영화화된 적이 있기 때문에 이걸 새삼스레 왜 또? 라는 생각도 했었거든요.

도라 도라 도라


네,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 나와서 당혹감을 느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베이의 신작 블록버스터라고 하니 보긴 봐야 하는데, 그다지 재미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진주만은 결코 평가가 좋은 작품이 아닙니다. 지금 로튼토마토를 확인해봤는데 24%로 제대로 썩어 있더군요. 지금 시대에 마이클 베이를 좋은 감독이라고 부를 영화 팬은 거의 없을 겁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그 지경으로 망쳐 버린 잘못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죠. 

저도 지금은 마이클 베이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더록과 아마겟돈을 봤던 시기에는 가장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였고 사실 그에게 본격적으로 실망하기 시작한 건 트랜스포머 3편 이후부터입니다. 아마 많은 영화 팬들이 비슷할 것입니다. 다만 평론가들에게는 마이클 베이는 아주 예전부터 꾸준히 나쁜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아마겟돈도 토마토가 썩어 있고 더록 마저도 66%의 어중간한 평가로 신선함을 유지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영화팬들과 대중들에게는 마이클 베이는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망치기 전까지는 괜찮은 감독이었어요. 특히 한국에서 인기가 많은 감독이었죠. 평론가들이 혹평했던 ‘아일랜드’도 한국에서는 아주 인기가 많았고 트랜스포머 1,2편도 한국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니까요.

아일랜드


‘진주만’은 아일랜드와 트랜스포머 이전에 나온 영화입니다. 마이클 베이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와 기대가 아주 높게 형성되어 있던 시기죠. 말했듯이 평론가들은 가차 없이 진주만에 대해 망작 판정을 내렸습니다. 영화 팬들과 대중들은 어땠을까요? 우선 기대보다 못한 흥행을 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망한 것도 아니며 나름대로 체면치레 정도는 한 흥행 기록을 세웠습니다. 

사실 진주만의 흥행이 어중간했던 것은 역시 당시 기준으로는 사람들이 상업 블록버스터(특히 마이클 베이의 작품)에 기대하는 내용과 소재가 아니였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꽤 재미있게 봤습니다.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고 본 덕분이긴 하지만 확실히 영화가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평론가들의 혹평도 이해는 갑니다. 저도 앞에서 이미 이 작품이 하자가 많다고 언급을 했는데 평론가들이 이 영화를 혹평하는 논리에 대부분 동의를 하기 때문입니다. 좀 아이러니한 일이기는 한데 하자가 있다고 느끼는 작품에도 재미를 느끼는 것은 사실 드문 일은 아닙니다. 영화는 온갖 문화 창작의 요소들이 결합된 종합 엔터테인먼트이고 그 중에서 몇 가지 만족스러운 요소들이 있다면 전체적으로 하자가 있게 느껴지더라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이죠.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영화 자체의 기획입니다.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마이클 베이식 상업 블록버스터를 만들다니? 그냥 이 자체로 좋은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는 기획인 겁니다. 물론 마이클 베이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에 도전해볼 수도 있었겠죠.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를 만들었을 때 시사회에서 감독의 이름을 크레딧에서 빼버리니 아무도 스필버그의 영화인지 몰랐다고 하죠. 물론 마이클 베이에게 스필버그 정도의 역량은 절대 기대할 수 없겠지만요.

진주만은 일반적인 전쟁 영화의 작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닙니다. 사실 전쟁 영화라고 분류하기가 애매한 작품이에요. 전쟁 자체보다는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죠. 예를 들면 미국의 남북 전쟁을 배경으로 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유사한 방향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진주만 공습을 일종의 비극적인 재난으로 그리는 방식은 제임스 카메론의 타이타닉과도 유사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실 진주만이 타이타닉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추측은 매우 신빙성이 높습니다. 영화 자체의 방향성도 그렇고, 무엇보다 두 작품의 개봉 시기를 생각했을 때 타이타닉의 대성공이 진주만의 기획 단계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주만이 절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타이타닉 같은 세기의 걸작에 비견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죠. 그런 유사한 방향성을 취했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건 드라마의 완성도인데, 이 부분에서 진주만은 그야말로 참담한 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타이타닉


타이타닉 같이 심금을 울리는 아름다운 로맨스를 의도했겠지만, 나온 결과물은 삼각관계 막장 드라마입니다. 그런데 내용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막장물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개연성과 감정선은 갖추고 있어요. 한국에서 악명 높았던 막장 드라마들(‘아내의 유혹’ 같은)의 내용과 비교하면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플롯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을 마이클 베이가 연출했다는 겁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감독이 어떤 방식으로 연출하느냐에 따라서 보는 느낌이 전혀 달라질 수가 있거든요. 

진주만을 보고 타이타닉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걸작을 떠올린다는 건 언감생심이죠. 저는 오히려 ‘클루리스’나 ‘베벌리힐스 아이들’ 같은 미국의 하이틴 로맨스물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보다는 좀 더 진중한 느낌이지만, 타이타닉과 비교하면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어요. 군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청춘물이라는 면에서는 톰 크루즈의 ‘탑건’과도 유사한 느낌이었고요.

클루리스


말했듯이 진주만의 내용은 막장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이걸 좀 더 시대극다운 진중하고 섬세한 분위기로 연출했다면 좀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거예요. 그러나 마이클 베이의 연출 방향과 스토리텔링 기법, 연기지도는 8,90년대 하이틴 로맨스나 청춘물의 그것이었고 이것이 막장 드라마와 만나 버리니 작품성을 바닥까지 추락시키는 안타까운 결과물이 되어 버린 겁니다.

본격적인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는 중반부 이후까지도 이런 분위기는 이어집니다. 물론 블록버스터 다운 볼거리는 상당한 수준으로 보여줍니다. 애초에 영화가 가장 공을 들인 것이 이 부분이니까요. 일단 공습 장면이 굉장히 깁니다. 애초에 진주만은 영화 전체의 상영시간이 무려 3시간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타이타닉 또한 3시간이 넘는 긴 상영시간을 자랑하는데, 진주만의 긴 상영시간도 어느 정도는 저런 대작 영화들의 계보를 잇겠다는 야심이 반영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뭐, 꿈은 꿀 수가 있겠죠.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도.


아무튼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공습 장면은 단연 이 영화의 최대 하이라이트인데, 보다보면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미국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인 전투를 이렇게 공을 들여 긴 시간 동안 담아내다니... 그것도 이 장면을 볼프강 페터젠의 ‘특전 유보트’의 마지막 공습 장면 처럼 처절하고 절망적으로 그려낸 것도 아닙니다. 아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꽤나 전형적인 방식으로(혹은 익숙한 마이클 베이의 방식으로) 상업 블록버스터의 ‘빅씬’으로서 이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아마겟돈의 시작부에 유성우에 의해 뉴욕이 쑥대밭이 되는 장면과 매우 유사합니다. 

특전 유보트


타이타닉과 같은 가슴 아픈 비극적 재난의 모습도 아니었고, 특전 유보트와 같은 통렬한 반전주의가 느껴지는 처절한 연출도 아니었어요. 그저 액션 블록버스터의 눈요기용 ‘빅씬’ 이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매우 혹평받을만한 장면입니다. 실제로 많은 혹평을 받은 게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 공습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 장면이고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장점인 것 역시 사실입니다.


진주만이 평론가들에게 혹평받은 작품이라고 이미 언급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았고 실제로 이 영화를 본 일반 대중의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습니다. 포털 사이트의 평점도 꽤 높은 편이고요. 저는 진주만이 ‘재미있는 영화’라고 확언합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망친 이후의 마이클 베이가 아니라 분명히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던 시절’의 마이클 베이가 만든 작품이에요.

전반부의 삼각관계 막장 로맨스도 그렇습니다. 막장이긴 하지만 나름 개연성이 있고, 진중하지 않아도 8,90년대 하이틴 로맨스나 청춘물을 보는 느낌으로 꽤 흥미 있게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극장에 앉아 3시간 짜리 영화를 보는데도 지루하다고 느낀 순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도 운동하면서 틀어 놓은 TV에서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 채널에 이 영화가 하고 있으면 그대로 채널 고정하고 봅니다.(다른 채널에 더 재미있는 것이 방영 중일 때는 빼고요) 사실 트랜스포머3 이전의 마이클 베이 영화라면 무조건 채널 고정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재미있으니까요.

진주만은 재미있지만, 가볍게 볼만한 블록버스터로서 재미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영화 제작사의 의도는 이런 방향은 아니었겠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타이타닉 같은 세기의 걸작... 까지는 무리더라도 적어도 그런 계보를 잇는 작품 중 하나가 되기를 원했을 겁니다. 무려 진주만 공습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 로맨스 물이니까요.

마이클 베이의 역량(과 스타일) 때문에 이런 목표가 실패한 것이라고 단순히 결론낼 수도 있지만, 처음부터 기획이 잘못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그런 방향을 추구하는 건 무리가 아니었을까요?


진주만 공습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면 ‘도라 도라 도라’ 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게 1차 적인 발상이죠. 아니면 일반적인 반전주의 전쟁 영화의 방향성을 따를 수도 있고요. 지옥의 묵시록 같은 실존주의 철학 고찰을 담은 전쟁 영화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이라는 소재에서는 이런 선택이 그리 간단하지가 않아요. 수 많은 항공기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거대한 전함들이 폭발하고 침몰하는 장면들이 나와야 하는 영화거든요. 당연히 제작비가 많이 들고 볼거리에 집중하는 영화가 되기 때문에 대중성이 떨어질 수 있는 무거운 방향으로 제작되는 것은 선택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제작 시기를 생각했을 때 매우 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타이타닉의 노선이 선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죠. 하지만, 역사적으로 매우 임팩트가 큰 비극적인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타이타닉 침몰 사건과 진주만 공습은 근본적으로 그 성질이 매우 다릅니다. 제임스 카메론과 마이클 베이의 차이 이상으로요.

타이타닉 침몰 사건과 달리 진주만 공습의 인간의 의지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네, 사건의 장본인이 있어요.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주체.

전쟁이란 하나의 거대한 플롯이기도 합니다. 원인이 되는 사건과 결과가 되는 사건이 복잡하게 유기적으로 얽혀 있죠. 1937년에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중국을 제압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일본군에 의해 괴멸적인 타격을 입으며 연신 퇴각해 가면서도 절대 항복하지 않았죠. 중국은 지독하게 넓었고 일본은 장기화되는 중일전쟁의 양상에 점점 지쳐갑니다. 


그러던 차에 독일이 유럽에서 거대한 전쟁을 일으키고 영국과 프랑스도 세계 대전의 참상으로 말려들어 갑니다.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에는 풍부한 자원이 있었는데 중일전쟁에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고 있던 일본은 이 기회에 아시아 전역의 자원을 집어삼킬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나 필리핀에 식민지를 두고 있던 미국이 걸림돌이었고 거기에 원래 일본에 석유를 공급해주었던 미국이 중일전쟁을 구실로 그 공급을 끊어버린 터라 일본은 결국 미국을 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진주만 공습을 결행하게 되고 이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진주만 공습은 이 전체 플롯의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죠. 결말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서사는 이 2차 대전의 서사와 함께 전개되고, 진주만 공습은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 됩니다. 후반부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복수 플롯입니다. 역사 그대로의 내용이기도 하고요.

태평양 전쟁은 모두가 아는 대로 결국 일본의 패배로 끝납니다. 진주만 공습으로 대승을 거두며 시작했지만 이내 소위 ‘Show me the money’를 발동한 미국에게 물량에서 밀리게 됩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습 직후부터 과달카날 전역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전체 판도의 승기를 잡기 전까지는 미국에게도 매우 어려운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영화 진주만의 후반부는 공습 이후 어려운 상황에서 쥐어짜내다시피 해서 진행된 미국의 반격 작전인 ‘둘리틀 특공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복수 플롯이라고 했지만 변변한 복수도 아니었죠.


진주만의 진정한 복수는 그보다 몇 달 뒤인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이루게 됩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파일럿이기 때문에-그것도 아주 멋진 파일럿이기 때문에-미드웨이 전투에서 맹활약하는 그림이 그럴듯하게 그려지지만, 이 영화에서 미드웨이 전투까지 담아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단 영화의 제목이 ‘진주만’이 아니게 되겠죠.(진주만이 개봉하고 18년 후인 2019년에, 진주만부터 미드웨이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가 실제로 개봉하게 됩니다. 롤랜드 에머리히가 감독한 이 영화의 제목은 ‘미드웨이’입니다.)

미드웨이

 

[역사와 영화사이] 미드웨이 (2차대전/ 태평양전쟁)

역사소재영화 리뷰 미드웨이 Midway 2019년에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의 ‘미드웨이’는 18년 전에 마이클 베이가 만들었던 영화 ‘진주만’의 후속편 격인 영화입니다. 당연히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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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둘리틀 특공대 작전이 영화 진주만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데요. 앞에서 언급했듯 변변한 복수도 아니었고 영화에서도 그다지 통쾌하게 묘사되지 않습니다. 역사상 이 시기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시기였습니다.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 작전은 궁지에 몰렸다가 대반격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저 ‘아직 안 죽었어’ ‘포기 하지 않겠어’ 라는 불굴의 항전 의지를 보여준 정도의 사건이에요. 때문에 영화에서 이 작전의 진행 양상은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움의 연속입니다. 진주만 공습의 절망과 둘리틀 특공 작전의 처절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감정선을 만들어내는데 이 부분은 연출이 꽤 괜찮았던 것 같습니다. 

작전 성공 후 특공대가 중국으로 도주한 것은 역사 그대로의 전개입니다. 하지만 중국에 불시착 후 일본군과 교전한 상황은 영화에만 나오는 허구입니다. 실제로 일본군 점령지에 떨어져서 포로가 된 대원들이 있기는 했지만 영화와 같은 극적인 교전은 벌어지지 않았죠. 그런데 이 허구의 내용이 영화의 막장 드라마를 완성 시키는 아주 중요한 전개입니다. 막장 드라마를 완성시키는 억지 신파극 연출로서 영화의 평가를 떨어뜨리는데 큰 역할을 한 장면이었죠.


종합적으로 평가하면 진주만은 모든 면에서 ‘어중간한’ 작품입니다. 실패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성공했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좋은 평가를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괜찮은 요소들이 꽤 있기도 하고. 

진주만 공습은 역사적인 의의가 큰 사건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이자 비극)이었던 2차 대전의 주요 전선 중 하나인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 된 사건이었고, 초강대국인 미국이 당한 가장 큰 패전 중 하나였으며 어찌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가 초강대국이 되는 ‘각성’을 이루게 된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 역사적인 의의나 전쟁 발발 배경에 대한 심도 깊은 고찰은 당연히 이 영화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진주만 공습 그 자체의 묘사는 비록 조금 호불호는 갈릴지언정 마이클 베이 식의 스펙터클한 묘사로 생생하고 임팩트 있게 담아냈습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지나가고 곁다리 처럼 들어간 느낌임에도 둘리틀 특공대의 묘사는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받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막장 드라마의 (애매한)비극적 결말을 이 역사적인 사건에 녹아내야 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마이클 베이는 복수 플롯의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 사건을 상당히 처절하게 그려냈고 결과적으로 역사적인 고증에 매우 충실하게 둘리틀 특공대 장면이 완성되었습니다. 막장 드라마를 빼고 진주만 공습과 둘리틀 특공대 장면만 놓고 본다면 2차 대전 영화로서도 꽤나 훌륭합니다. 적어도 피상적인 만듦새는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메이저 상업 영화 감독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퀄리티입니다. 


진주만 공습은 정말로 큰 역사적인 사건이고(영화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타이타닉’의 소재가 된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보다도 훨씬 더 큰 사건입니다) 이것을 영화화한다면 마이클 베이의 진주만 보다는 더 나은 결과물이 마땅히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을 반드시 좋은 영화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도 불필요한 오지랖이라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도라 도라 도라’와 ‘진주만’이 있고 롤랜드 에머리히가 ‘미드웨이’도 만들었으니 진주만에 대한 영화는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언젠가 전혀 다른 작법으로(예컨대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같은) 진주만 공습의 영화화를 시도해볼 감독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저 영화들로 만족하며 큰 갈증을 느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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