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연재가 시작되어 현재 단행본 100권이 넘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전개를 이어온 오다 에이이치로의 만화 ‘원피스’가 서서히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최근화에서 주인공 루피는 고무고무 열매의 능력이 각성하며 ‘태양신 니카’라는 신급의 존재로 탈바꿈했습니다. 정확히는 고무고무 열매의 진짜 정체가 드러난 것으로, 바로 ‘사람사람 열매 환수종 모델 태양신 니카’가 이 열매의 진짜 정체였습니다. 이로써 루피는 사실상 세계관 최강자 급의 무력 레벨에 도달한 것입니다. 오래 끌어왔던 사황편이 곧 마무리가 될 것이며, 이제 세계 최강의 해적단이 된 루피 일당은 세계정부를 무너뜨리는 최종 결전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물론 최종 에피소드도 짧아도 5년, 길면 10년 이상 연재될지도 모릅니다. 단행본 120권 정도에서 완결하는 것이 목표라고 하는데, 그럼 대략 5년 정도일 테지만 목표대로 완결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사황편만 하더라도 원래는 2021년 여름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했지만 거의 1년 가까이 더 길어졌으니까요. 언제가 되었든 부디 훌륭한 내용으로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소년만화 배틀물 장르의 파워밸런스 논쟁은 서브컬쳐 마니아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흥미로운 토론 주제입니다. 사실 장기 연재를 한 대부분의 인기 배툴물 만화가 자로 잰 듯이 완벽한 파워밸런스를 보여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바쿠만’이나 ‘중쇄를 찍자’ 같은 만화 업계를 다룬 작품들로 많이 알려졌듯이, 만화를 연재할 때 처음부터 장기적인 내용 설정을 구상하여 적용하기는 본질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연재 만화가 인기 만화가 될지의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으며, 당장은 연재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원피스의 작가인 오다 에이이치로도 처음 원피스를 연재할 때 이 만화가 단행본 100권 이상의 연재를 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겁니다. 만화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단일 작품이 100권 이상 연재를 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특히 초창기의 배툴물 만화들은 원피스 이후 세대의 만화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연재를 길게 끌지 않았습니다. 드래곤볼이 단행본 42권, 유유백서가 단행본 19권, 타이의 대모험이 단행본 37권 분량입니다. 유유백서는 확실히 짧게 느껴지지만 드래곤볼과 타이의 대모험은 상당히 긴 분량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원피스 세대에서는 나루토와 블리치 모두 70권 넘게 연재했고 원피스는 120권 이상을 목표로 아직도 연재 중입니다. 물론 최근에 나온 귀멸의 칼날이 단행본 23권 완결로 인기 배틀물 만화 치고는 빠르게 완결했는데 이건 작가가 굉장히 영리한 케이스라고 봐야겠죠. 사실상 이 작품 하나로 후손들까지 풍족하게 살만큼 많은 돈을 벌었으니 작가인 고토게 코요하루는 아직 30대인 젊은 나이로 남은 인생 즐기며 살게 되겠죠.
그런데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이치로는 현재 40대 후반으로 원피스의 완결 시점으로 예상되는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지옥같은 주간 연재 만화가의 삶에서 졸업하게 됩니다.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을 텐데 인생을 즐길 여유도 없이 50대 중반까지 계속 만화를 그리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다니. 그만큼 원피스라는 작품과 독자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이겠죠. 존경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길게 연재를 해온 상황이니 당연히 밸런스와 개연성 등 많은 문제점들을 작품 내에서 노출시켰습니다. 그런데 ‘원피스는 파워밸런스가 괜찮은 만화인가’라는 이 포스팅의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대해서 일찌감치 답을 내리자면, 저는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배틀물 만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볼과 비교를 해봐도 원피스의 파워밸런스가 크게 문제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드래곤볼의 경우 ‘죽을 고비를 넘기면 강해진다’라는 사이어인의 독특한 기질과 ‘정신과 시간의 방’같은 치트키 설정의 등장으로 중간중간 말도 안 되는 파워 인플레가 엄청 많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만화를 읽을 당시에는 이런 파격적인 내용 전개들이 마냥 흥미롭게만 느껴졌습니다. 지금은 클리셰 취급이지만 연재 당시의 드래곤볼의 내용 전개는 정말 새롭고 신선한 느낌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파워밸런스니 뭐니 생각할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어요.
그리고 드래곤볼은 연재 당시 기준이 아니라 지금 기준으로 놓고 봐도 압도적으로 재미있는 만화입니다. 원피스도 드래곤볼과 함께 배틀물 만화 역사에서 정점을 다툴만한 대단한 작품이긴 하지만 솔직히 재미의 ‘밀도’ 면에서는 두 작품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피스의 경우 중간중간에 지루하게 늘어지는 내용들이 꽤 있거든요. 작가인 오다를 육다, 칠다, 십다라고 부르게 된 이유이기도 하고요. 드래곤볼은 한순간도 지루할 틈이 없이 압도적으로 몰입하여 읽게 되는 만화이므로 밸런스라든가 설정 오류라든가 하는 딴생각이 들 겨를도 전혀 없습니다.
반면 원피스는 분명 재미있는 만화이긴 하지만 너무 길게 연재를 했고 작가의 폼도 다소 기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래곤볼 시절과는 달리 인터넷 문화 때문에 더욱 파워밸런스나 설정 오류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죠.
사실 원피스의 파워밸런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아예 책 한권을 써야 할 분량의 내용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방대한 원피스 관련 연구글은 인터넷에 무수히 많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포스팅에서는 원피스 파워밸런스 논쟁의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하는 내용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원피스의 파워밸런스 관련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제는 역시 ‘패기 설정’과 ‘정상 전쟁’입니다. 제가 앞에서 원피스의 파워 밸런스가 괜찮은 편이라고 했지만 이 두 가지 만은 확실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패기의 경우.... 저는 처음부터 이 설정이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패기 설정이 등장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썰이 분분한데 저는 복잡할 거 하나 없이 너무 단순한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자연계 능력자의 물리 공격 무효화 속성이라는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급조 설정’입니다. 애초에 자연계 능력자를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설정으로 만든 게 치명적인 실수였어요. 크로커다일의 모래 능력은 물로 뭉칠 수 있다는 약점을 부여해서 처리했고 에넬의 번개 능력은 고무가 번개의 상성이라는 설정으로 대충 이기게 했는데 그 외 무수히 존재하는 수많은 자연계 능력들을 전부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죠.
사실 스모커나 크로커다일, 에넬이 등장했을 때 자연계 능력자들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독자들도 많은 의문을 가졌을 겁니다. 패기 설정은 작가와 편집부가 엄청 고심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 둔다’라는 말이 있죠. 사실 굉장히 쉬운 해법이 존재했는데 패기라는 무리수 설정을 해답으로 들고 나온 것이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쉬운 해법이란... 처음부터 자연계 능력자는 물리 공격 무효화가 아니었다, 라고 하면 되는 거였어요. 루피가 스모커나 크로커다일을 때릴 수 없었던 이유는 ‘패기라는 특수한 기술의 유무’가 아니라 단순히 ‘실력이 모자라서’라고 하는 편이 훨씬 간단했습니다.
즉, 자연계는 물리 공격 무효화가 아니라 단지 신체를 변형시켜서 물리 공격을 ‘회피’하는 개념이기에 공격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실력을 더 연마해서 더 빠르고 강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먹이게 되면 결국 자연계 능력자도 공격을 제대로 회피하지 못하고 타격을 받게 된다라는 설명이 얼마든지 말이 됩니다. 이런 설정이라면 자연계 능력자라도 본인의 실력에 따라서 회피를 더 잘하거나 못할수 있기에 자연계에게 공격이 통하고 안 통하고는 순수하게 대결하는 두 사람의 실력 차에 따라 결정이 되는 상황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배틀물로서는 왕도에 가까운 해법이 존재하는데 패기라는 엉뚱한 설정을 어거지로 만들어서 파워밸런스를 이상하게 꼬여버리게 만든 건 원피스라는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실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기가 엄청 배우기 어려운 기술이면 또 모르겠는데 타시기 같은 허접이나 구사 해적단의 엑스트라들까지 쓰는 정도니 이건 뭐...
사실 헌터X헌터의 ‘넨’이라든가 나루토의 ‘챠크라’ 같이 원피스 세대의 배틀물 만화들은 대부분 파워 우위를 결정짓는 고유의 설정을 만드는 경향이 있는데, 원피스의 패기도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설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넨이나 챠크라보다는 확실히 패기 설정이 다소 난잡하고 급조된 설정이라는 느낌이 강한 편입니다.
원피스 파워밸런스의 두 번째 논쟁 주제는 ‘정상전쟁’입니다. 정상전쟁이라는 이름답게 이 에피소드에서 원피스에 존재하는 세계관 최강급의 무력이 모조리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배틀물 만화의 절대적인 진리... ‘강한 캐릭터는 늦게 등장한다’라는 법칙에 따라 결과적으로 정상전쟁은 너무 일찍 등장해서 점점 평판이 깎여 나가고, 급기야는 작품 전체의 파워 밸런스에도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 에피소드가 되고 말았습니다.
정상전쟁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 파시피스타가 이제는 상디 수준에서 초살 할 정도로 자코 수준으로 전락했고 사황의 정점이었던 흰수염이 정상전쟁에서 보여주었던 무력도 사황편의 카이도에 비하면 전혀 임팩트가 없는 수준입니다. 물론 흰수염의 경우 너무 고령에 병까지 앓고 있어서 전성기 시절의 무력의 절반 정도 수준이라고 이미 밝혀졌고 치명적인 부상까지 입고 시작했으니 사황편에서 카이도나 빅맘 수준의 무시무시한 괴력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설명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놓고 보면 반대로 엄청 너프를 먹은 흰수염을 상대로 절절맨 해군 쪽의 최강자(3대장과 센고쿠, 거프 등)들이 세계관 정상급의 무력이었다고 보기에는 아쉬운 면이 많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세계관 최강급의 무력들이 전쟁을 벌이는 에피소드가 너무 일찍 등장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최근 에피소드에서 사황 해적단을 무너뜨리고 있는 루피 해적단의 무력이라면 정상전쟁 당시의 해군본부 전력으로는 정말 답도 없는 수준입니다. 해군 대장 따위는 이제는 루피의 얼굴도 못 볼 수준이고요.
사실 이런 파워 인플레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은 의외로 간단한데 바로 주인공과 함께 ‘성장하는’ 악역 캐릭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원피스에서는 ‘검은 수염 티치’가 바로 그런 캐릭터입니다. 검은 수염 티치는 상당히 이른 시점에 등장해서 내용이 전개되며 점차 강해지고 세력이 커지는 상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아마 루피와 본격적으로 대립할 때쯤에는 카이도에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강자로 나와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아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신적인 존재를 등장시키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전개도 사실 배틀물 만화의 최종 에피소드에서 클리셰 수준으로 자주 등장하는 전개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나루토의 ‘카구야’가 있고 원피스의 최종 보스로 예상되는 ‘임(이무)’도 이런 비슷한 존재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캐릭터입니다.
패기 설정은 원피스의 파워 밸런스를 누더기 같은 꼴로 만들었고(급조해서 대충 때운 모양) 정상전쟁은 세계관 최강급의 전쟁을 너무 일찍 보여주는 바람에 후반 전개를 너무 심한 인플레로 느끼게 만드는 고정된 기준점이 되어서 확실히 이 두 가지로 인해 원피스라는 작품의 파워 밸런스는 큰 문제점을 노출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면 지적할만한 설정이나 전개가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대로 장기 연재를 한 배틀물 만화에서 이 정도의 파워밸런스 문제가 노출되지 않은 만화는 거의 없습니다. 원피스의 파워밸런스는 평균적으로는 오히려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확실한 답은 만화가 완결이 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사황편의 내용 전개에서 그동안 축적되었던 밸런스 문제가 여러 가지 무리수로 끊임없이 터져 나왔는데, 루피가 카이도에게 계속 패배하다가 결국 태양신 니카로 각성하게 된 최근화 내용은 밸런스 문제를 안정되게 수습할 수 있는 훌륭한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런 전개가 배틀물 만화의 왕도이기도 하고요. 그만큼 클리셰 느낌이 강하기도한데, 사실 클리셰를 효과적으로 잘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왕도 소년만화를 완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와노쿠니 편이 전개되면서 원피스에 대한 평판은 천장과 바닥을 오갔습니다. 작가인 오다는 육다, 칠다, 팔다, 씹다로까지 불리면서 만화 팬들의 조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죠. 하지만 카이도와의 대결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내용이 갈수록 재미있어지고, 최근화 루피의 각성으로 마치 드래곤볼에서 손오공이 초사이어인으로 처음 변신한 순간 같은 거대한 파장이 전 세계 서브컬쳐 마니아들을 덮쳤습니다. 솔직히 임팩트로 따지자면 초사이어인 변신을 능가하는 것은 만화 업계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할 테지만, 최소한 그에 가까운 느낌을 주었다는 점에서 원피스가 확실히 드래곤볼에 필적하는 배틀물 만화의 정점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해준 것 같습니다.
100권 넘게 연재해온 원피스도 이제 최종 마무리를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같은 전설적인 작품들이 있지만 앞으로 최후의 에피소드를 어떻게 전개시키느냐에 따라 원피스야 말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년만화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만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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