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연 감독의 장편 상업 영화 데뷔작 ‘앵커’를 봤습니다. 사실 여성 감독인지는 몰랐습니다. 영화를 보는 중간에도 계속 모르다가, 결말 부분에서야 ‘이거 감독이 여자네!’ 하고 확신이 들었죠.
스릴러 영화로서 만듦새는 썩 잘빠진 영화입니다. 웰메이드 스릴러라고 할 만해요. 배우들의 연기도 좋고요. 다만 내용이 엄청 재미있는 건 아닙니다. 정확히는, 엄청 재미있는 내용일 것처럼 초중반까지 전개되는데, 후반부에 드러나는 반전과 결말은 다소 진부하고 시시하달까요. 늘어지기도 하고, 다분히 감상적이기도 하고요.
(이 글에는 영화 '앵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스릴러 장르로서 완성도 높은 서사의 구조를 쌓아 올린 점만은 높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포스팅의 제목에 ‘예측을 벗어나는’이라고 썼는데요. 말 그대로입니다. 사실 반전이나 결말은 이런 종류의 사이코 스릴러 장르로서는 좀 진부한 편이라서 영화가 어떻게든 그런 진부한 반전을 숨기려고 노력을 하고, 이게 꽤 잘 통한 편이에요. 즉, 이 영화는 관객이 다른 방향으로 예측하게 만드는 ‘가짜 떡밥’을 꾸준히 던집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실제 진상에 대한 복선이 너무 뚜렷해서 중간중간에 던져진 가짜 떡밥들이 의미 없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떡밥들을 처음 볼 때는 꽤 의식을 사로잡기는 합니다. 적어도 더 재미있는 내용을 기대하는 관객으로서는 이런 방향으로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죠.
정지연 감독은 관객을 현혹(?)시키는 인상적인 영상미의 연출에 재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보다 더 완성도 높은 각본(관객의 뒤통수를 세게 때릴 수 있는 반전이 갖추어진)으로 영화를 만든다면 아주 훌륭한 스릴러 명작을 만들만한 능력도 있어 보입니다. 이제 장편 데뷔작이 나온 신인 감독이니 앞으로 더 발전해가는 모습을 기대해볼 수 있겠네요.
주요 배우 3인방도 좋은 연기와 인상적인 캐릭터를 보여줍니다. 사실 영화를 거의 정보가 없이 봐서, 천우희 말고는 누가 나오는지도 몰랐습니다. 이혜영이 출연한다는 걸 알았다면 영화를 보기 전에 어느 정도 내용 예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이혜영은 이런 스릴러 장르에서 엄마 역할로 등장한 이혜영이 할법한 역할과 캐릭터를 예상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만 신하균은 예측을 벗어난, 관객을 속이는 가짜 떡밥 역할을 합니다. 신하균이 초반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묘하게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나 조던 필의 ‘겟 아웃’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데, 선악을 모호하게 만드는 신하균의 이미지가 관객에게 흥미로운 상상력을 던져주거든요.
앞에서 큐어와 겟 아웃을 언급했지만 끝까지 다 보고 나면 이 영화와 가장 닮은 영화는 제니퍼 켄트의 ‘바바둑’인 것 같습니다. 바바둑 역시 누가 봐도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구나’라고 느끼게 만드는 대표적인 영화죠. 여성 감독은 아니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과도 꽤 닮았고요. 작년에 꽤 인상 깊게 본 영화인 제임스 완의 ‘말리그넌트’ 생각도 납니다.
말리그넌트 – 끝내주게 재미있는 익스트림 엽기 호러 (반전 스포일러)
영화의 반전과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래의 글 내용은 모두 스포일러입니다.
영화의 초반에 알람 소리에도 계속 누워있는 주인공 천우희를 엄마인 이혜영이 깨우는데, 나중에 드러나는 반전으로는 이 시점에 이혜영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때의 과거 회상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가서야 나오고, 중반까지 이혜영이 나오는 모든 장면은 해리성 정신 장애를 앓고 있는 주인공 천우희의 또 다른 인격이 발현된 모습이죠.
천우희가 연기하는 ‘정세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뉴스 앵커인데,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늘 그렇듯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압박감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이 특수한 스트레스 요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회인은 이런 압박감을 느끼고 살아가니까요. 다만 세라는 영화의 시작 시점에 이미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탄 난 상태였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납니다. 그 두 가지 요인은 바로 임신과 엄마의 죽음(자살)입니다.
세라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특수한 스트레스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엄마의 존재입니다. 세라의 엄마 또한 앵커 출신인데, 미혼으로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커리어가 끝나버렸습니다. 임신으로 커리어를 잃게 된 앵커 출신 미혼모가 혼자 아이를 키우게 되는 상황에서 모녀 사이에 어떤 관계성이 형성되었을지는 뻔하게 짐작 가는 부분입니다. 실제로 두 사람 사이에 아주 큰 사건이 벌어진 것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밝힌 내용이고요. 모녀는 서로를 사랑함과 동시에 증오하면서 함께 힘겨운 세월을 보냅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모녀 관계를 형성한 상황에서도 세라는 비교적 멀쩡하게 사회인으로 성장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기고 돈도 잘 벌며 성격도 큰 하자가 없는 남자와 결혼도 했고 앵커로서도 성공했죠. 직장 일로 스트레스를 받고 남편과 갈등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혹은 평균보다 높은 향상심을 가진 사람들이) 흔하게 겪는 범주입니다. 이런 흔한 범주를 비정상적인 수준까지 증폭시키는 요인은 오로지 세라의 엄마입니다. 엄마는 앵커로서 커리어를 이루지 못한 자기 인생을 딸인 세라에게 투영하여 끊임없이 세라를 압박하고 세뇌합니다.
이런 와중에 세라는 임신을 합니다. 출산하면 커리어는 끝이라고 주장하는 엄마와 당연히 큰 갈등이 벌어지고, 한계에 도달한 세라는 엄마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제 그만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며칠 뒤 세라는 목을 맨 엄마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세라가 이 사실을 기억에서 지우고 자기 안에 또 다른 인격으로 엄마의 존재를 대체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엄마의 죽음 이전에 ‘임신’의 단계에서부터 세라의 정신병은 심각한 수위까지 도달했을 거라고 보고 있습니다. 평생을 엄마와 비정상적인 모녀 관계를 지속해온 세라에게는 본인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어마어마한 심리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뱃속의 태아와 엄마의 죽음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세라의 해리성 정신 장애를 발병시킨 것으로 봐야겠죠.
여기서 좀 더 오컬트적인 분석으로까지 나아가 보겠습니다. 영화의 결말에 아직 살아 있는 엄마의 망령(자신의 또 다른 인격)에서 벗어난 세라는 다리 사이로 많은 양의 출혈을 합니다. 이런 장면은 보통은 태아가 죽었다는 암시죠.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태아가 살아 있는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렇다면 그 대량의 출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영화는 사이코 스릴러 장르로 오컬트 소재가 등장하지는 않지만, 저는 결말을 좀 더 복잡하게 해석하면 결국 세라가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에 엄마의 망령이 태아에게 깃든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라는 다중 인격의 증상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뱃속 태아에 깃든 엄마의 망령에 지배당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엄마의 망령이 사라진 순간 다리 사이로 많은 피를 흘리는 장면도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거고요.
너무 장르를 건너뛴 해석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결말의 전개를 이해하는 것도 나름 이 영화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색다른 관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오컬트 장르가 아니라고 했지만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들 같이 섬뜩한 연출도 이 영화에 많이 등장하거든요. 이 영화의 후반부가 진부하고 늘어진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데요. 후반부에 이런 오컬트 적인 떡밥을 ‘바바둑’스러운 모호함으로 살짝 가미해서 과감하게 장르의 범주를 확장했다면 더 인상적인 작품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주연 배우인 천우희의 이야기를 하고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사실 처음에 천우희가 등장할 때 조금 미스캐스팅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더, 써니, 곡성 같은 영화에서 봤듯이 천우희는 꽤나 퇴폐적인 이미지를 가진 배우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 설정인 ‘잘 나가는 인기 앵커’ 역할에는 왠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고 해도 너무 초췌하고 어두운 인상이었거든요. 하지만 후반부 반전에서 드러났듯이 영화의 시작 부분부터 천우희는 이미 정신적으로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고, 이런 설정이라면 천우희의 어두운 이미지 자체가 일종의 복선 역할로도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아나운서 발성은 다소 아쉬웠어요. 자연스럽게 아나운서 느낌을 내려고 묵직한 톤으로 또박또박 발음을 하는데 이게 약간 북쪽 동네에서 ‘위대하신 령도자 동지께서는~’ 하시는 한복 입은 할머니 비슷한 톤이 되더라고요.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지만 ‘앵커’는 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입니다. 원래 천우희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재미있게 볼 수 있었고, 장편 데뷔작을 이 정도 완성도로 뽑아낸 정지연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도 생겼습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긴 침체기를 보내고 있지만 이제 슬슬 볼만한 한국 영화들이 극장에 개봉하기 시작하는 거 같습니다. 앞으로 보게 될 한국 영화들도 실망시키지 않는 완성도로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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