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노우 (왕좌의 게임)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마지막 시즌(시즌 8)은 많은 논란을 낳았습니다. HBO를 대표하는 명작 시리즈이자 최고 히트작 중 하나인 ‘왕좌의 게임’이 이런 어이없는 결말로 끝날 거라고 누구도 바라지도 예상하지도 못했을 거니까요. 아니, 딱히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죠. 왕좌의 게임이 뻔한 예상을 빗나가는 파격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건 그 자체로 드라마의 정체성과도 같았고 결정적으로 시즌이 거듭될수록 시청자들의 뒷 내용에 대한 궁금증이 극한으로 증폭되다 보니 온갖 괴상한 결말을 예견하는 스포일러(진짜와 가짜가 포함된) 정보들이 인터넷에 엄청 돌았으니까요.
결말에서 뻔한 루트가 아닌 ‘의외성’을 선택하는 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결말에서 의외성을 선택하여 많은 비판을 받고 작품 전체의 평가까지 떨어뜨린 대표적 케이스로 꼽히는 게 만화 ‘허니와 클로버’입니다. 독자의 예상은 때로는 그 자체로 독자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허니와 클로버가 그런 결말로 끝나길 바란 독자가 과연 있을까요? 의외성의 결말을 선택한다면 차라리 독자의 바람 조차도 뛰어넘을 최고의 결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거라면 그냥 뻔한 예상대로 가는 게 최고의 선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존 스노우가 철왕좌의 주인이 되어 칠왕국의 강하고 슬기로운 통치자가 되는 결말. 왕좌의 게임에서 가장 무난하고 가장 뻔하고 어쩌면 가장 많은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결말이 이것이죠. 그런데 다들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이런 결말로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시즌1부터 주인공인 줄 알았던 네드 스타크의 목을 날리면서 시작한 시리즈이니 존 스노우가 철왕좌를 차지하기는커녕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죠. 다행히 안 죽고 끝났습니다. 대신 또 다른 주인공인 대니가 죽었고요.
존의 결말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대니의 경우는 흑화한 후 죽었으니까 그냥 배드엔딩입니다. 티리온은 가문이 멸문하다시피 했지만 애초에 가문에서 내놓은 자식이었고 결국 본인만 살아서 육왕국의 두 번째 권력자가 되었으니 꽤 괜찮은 엔딩이죠. 존은 죄인이 되어 장벽으로 유배되니 일종의 배드엔딩인 셈이지만... 사실상 장벽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는 북부 왕국 왕족인 스타크 가문의 혈통인데다 엔딩 시점 기준 북부의 여왕이 된 산사의 오빠이고 육왕국의 왕좌에 오른 브랜의 형이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이 형제들은 사이가 굉장히 좋아요. 웨스테로스 최고 권력자들과 이렇게 사이좋은 혈육인 존이 장벽에서 고생하고 살 거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죠. 그리고 이런 형제들의 뒷배가 아니더라도 존 본인이 과거 나이트워치 사령관이었고 북부의 왕이었으며 이런 지위들을 다 본인 실력으로 이루었으니 나이트워치 대원들과 북부 주민들의 인망도 두텁습니다. 결정적으로 장벽 너머로 돌아간 와이들링에게 존은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이고 그들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철왕좌의 오른 것 만큼이나 어마어마한 존재가 되어버린 게 존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왕좌의 게임의 진정한 주인공이 ‘스타크 가문’이라고 봤을 때 이 엔딩이 결코 터무니없고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 가문이 최고의 승리를 거둔 셈이 되거든요. 시리즈 내내 비중 있었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결말에서는 다 죽고 없습니다. 특히 스타크 가문은 초반부터 엄청 수난을 당해서 정말 비참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엔딩 시점을 보면 그래도 제일 멀쩡한 게 스타크 가문이에요. 결국 스타크 가문 형제들 중에서 네 명이나 살아 남았으니까요. 중요 등장인물, 인기 캐릭터 가릴 거 없이 가차 없이 죽어 나가는 왕좌의 게임에서 육 남매 중 무려 네 명이 살아남은 겁니다! 그래서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왕좌의 게임 결말에 별로 큰 불만이 없습니다. 오히려 존이 철왕좌를 차지하는 결말보다는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상 웨스테로스 전체를 브랜, 산사, 존이 나눠서 통치하는 상황이 되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정말 최고의 해피엔딩인 셈이죠.
하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왕좌의 게임의 결말을 최고의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혹은 만족스러운 결말이 아니라고 생각할까요. 이 부분은 역시 대니의 흑화와 죽음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은 존의 포스팅을 쓰는 중이니 존의 행보와 캐릭터성을 중심으로만 이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사실 왕좌의 게임 자체가 여러 가지 빈틈이 많은 드라마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에 따로 원작 소설(얼음과 불의 노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엄청나게 방대한데다 심지어 아직 결말도 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방대한 원작의 내용을 실사 드라마에 모두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등장인물에 온갖 복잡한 내용들이 얽혀 들어가지만 왕좌의 게임은 의외로 단순한 구도로 내용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그냥 흔한 복수 플롯이에요. 잘나가는 영주 가문이 음모와 전쟁으로 몰락하고 살아남은 후계자들이 다시 가문을 일으켜 복수한다는 내용이죠. 오로지 스타크 가문의 이야기에만 국한하면 이렇게 간단히 내용 요약이 됩니다.
하지만 왕좌의 게임에는 스타크 가문 뿐 아니라 라니스터 가문, 타가르옌 가문 등 다양한 웨스테로스의 지배 가문 이야기들이 모두 비중있게 그려지고 스타크가 싸울 상대도 복수의 대상 가문 뿐 아니라 장벽 너머에 엄청난 위협인 나이트킹의 백귀들 까지 있습니다. 라니스터 가문의 티리온이나 타가르옌 가문의 대너리스 까지 존과 동등한 비중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기에 내용은 끝도 없이 복잡하고 산만해집니다. 그럼에도 왕좌의 게임이 엄청난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건 복잡하긴 해도 내용 자체는 매우 재미있고(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매우 자극적으로 재미있습니다) 드라마에 있는 수많은 빈틈들을 원작 소설을 통해 메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인터넷 시대, 혹은 유튜브 시대에 나온 드라마라서 이런 인기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죠. 설령 소설을 보지 않고 드라마만 본 사람이라도 인터넷(특히 유튜브)을 통해 드라마 상에서 다뤄지지 않은 소설 상의 중요 설정과 내용들을 쉽게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드라마 상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지 않은 이러한 이면 설정들이 결국은 드라마 완결에 대한 혹평을 일으킨 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존 스노우의 결말이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존 스노우는 죄인이 되어 장벽으로 유배 되는 결말을 맞았지만 실상은 결말에서 존 스노우의 위상은 웨스테로스 최고 권력자들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티리온, 대니 세 명의 주인공과 그 외 수많은 비중 있는 주연급 캐릭터들 중에서 존이야말로 가장 왕도에 가까운 영웅 서사의 주인공입니다. 시즌1부터 존은 수많은 시련과 모험을 겪게 되고 숱한 전투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며 영웅 서사의 주인공다운 행보를 착실히 쌓아나가죠. 하지만 그럼에도 존은 시리즈의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까지도 ‘앞으로 모든 사건을 해결해줄’ 위대한 영웅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애초에 단독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인공들에 비해 등장 비중이 낮고 어떤 시즌에서는 존의 이야기는 그냥 곁다리 사이드 스토리로까지 보일 정도입니다. 거기에 존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설의 묘사들이 대부분 드라마에서는 제대로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드라마만 보는 입장에서는 존이 어떤 지위와 위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와닿지 않습니다.
존과 람제이가 첫 대면했을 때 람제이는 존에 대해 ‘북부 최고의 검사로 명성이 높다’는 언급을 합니다. 평범하게 드라마만 봐온 시청자라면 ‘존이 어느새 그렇게 되었지?’라는 반응이 나오는 장면입니다. 소설의 묘사를 보면 애초에 스타크 혈통들의 능력치가 엄청납니다. 네드 스타크만 해도 로버트의 반란이 성공하는데 최고의 공을 세운 인물이고 장남 롭 스타크는 군재에 있어서는 세계관 최강자라는(추정) 설정입니다. 이런 배경 설정들이 드라마에서 명확히 그려지지 않기 때문에 존이 가지고 있는 영웅적인 캐릭터성이 많이 약해져 버리는 거죠.
물론 시즌6에서 람제이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북부의 왕이 되는 순간에는 확실히 영웅 서사의 주인공 다운 모습으로 우뚝 섭니다. 개인적으로 볼튼(+프레이) 가문과의 결착이 이렇게 빨리 나버린 것도 좀 아쉬운 부분입니다. 사실 스타크 가문이 이전 5시즌 동안 당하기만 하다가 6시즌부터 반격이 시작되는데 한 시즌 만에 너무 짧게 결판이 나 버리니... 특히 프레이 가문은 뭡니까. 그렇게 끔찍한 짓(피의 결혼식)을 저지른 애들이 불과 몇 분 만에 아리아의 독에 의해 몰살이라니요.
티리온은 애초에 영웅 서사가 아니고 대너리스는 흑화해 버렸기 때문에 존이라도 제대로 영웅적인 캐릭터성을 살려줬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아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존은 드라마에서 묘사된 모습만 보더라도 충분히 영웅적이고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의 행적을 하나하나 따져본 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본다면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따져볼 필요도 없이 한 방에 빡 하고 와닿는 영웅적인 캐릭터성이 좀 더 부각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존의 캐릭터성이 좀 더 살아 있었다면 왕좌의 게임 결말에 대한 평가가 조금은 달라졌을 지도 모르거든요.
대서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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