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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 끝난 사랑의 아름다움

by 대서즐라 2021.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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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 끝난 사랑의 아름다움

도이 노부히로 감독의 일본 로맨스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이미 제목에 영화의 내용 스포일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을 ‘했다’라는 과거형입니다. 네, 사랑이 끝나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그려지겠군요. 그렇다면 보통은 사랑의 시작도 나오겠죠. 사랑의 시작과 끝. 사랑 이야기가 늘 거기서 거기고, 이런 줄거리의 작품들도 워낙에 많습니다. 

하지만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이하 ‘꽃다발 같은’)는 이런 이야기에 익숙한 사람에게도 분명히 특별한 느낌을 줄 만한 작품입니다. 제가 재미있게 보기도 했지만 일반적인 평가도 무척 좋을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네티즌 영화 평점 사이트에서 높은 평점을 받을만한 로맨스 영화. 딱 그런 영화입니다.


사랑은 낭만이고 현실은 책임이다... 영화에 나온 대사는 아니고, 그냥 이 영화를 본 후 제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입니다. 로맨스물에서 ‘현실적인’ 이라는 단어는 아픔과 상처로 치환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떤 작품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현실이 무엇인지 궁금한가요? 그럼 벽에 머리를 박아보세요. 그게 바로 현실입니다.”

낭만으로 시작했던 사랑이 끝나는 건 시간이 흐르고 그 낭만 속으로 현실이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을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그린 작품들을 보면 정말 보고 있기가 괴로워집니다. 그런데 ‘꽃다발 같은’ 은 전혀 보기 괴로운 작품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보기 좋은 내용만 나오는 로맨스 영화도 희한하게 보기 힘든(다양한 이유로) 장면들이 한 두 개쯤은 있는데 이 영화는 그런 게 정말 없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일단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 키누와 무기의 이별은 제가 여러 로맨스 창작물 속에서 본 이별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는 거야’ 라든가 ‘상대를 위해 내가 희생하는’ 그런 종류의 억지 포장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별 자체에서 아름다움이 피어나기는 힘들어요. 이별 까지도 사랑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애초에 시작부터 끝까지의 ‘사랑’ 그 자체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것은 뭔가 특별한 의미와 새로운 마음으로 포장된 것이 아니라 본래 존재하던 사랑의 아름다움이 가장 덜 희석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이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추해지지 않은’ 두 사람인 거죠.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추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이별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 개연성이 가장 큰 행위거든요. 끝난 사랑이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름다움으로 기억되기란 그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문에 ‘꽃다발 같은’ 은 아주 현실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말도 안 되게 낭만적이고 판타지 같은 영화이기도 해요. 특히 두 사람이 최종적으로 이별을 결정지은 순간의 그 작위적인 상황 연출은 뭡니까. ‘뭡니까’ 같은 따지는 말투로 엄청 혹평하는 거 같지만 그 작위적인 장면이 정말 좋기는 했습니다. 과거에 두 주인공이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그대로 재연하는 어린 커플을 목격하게 되는데... 상황 자체가 너무 작위적이지만 키누와 무기가 그 어린 커플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확정하게 되는 순간은 말로 표현 못 할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추함이라곤 전혀 없어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마지막 순간을 영화는 담아 냈습니다.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정말 많다고 했죠.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올랐던 영화는 다음 아닌 샘 멘데스의 ‘레볼루셔너리 로드’입니다. 그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내용 앞에 자연스럽게 붙여지는 영화가 ‘타이타닉’ 입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단지 주인공이 같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정말 타이타닉과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나온 부부의 모습은 타이타닉에서 잭이 죽지 않고 로즈와 맺어진 평행 세계의 다양한 갈래들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시대적 배경을 따지는 건 그냥 넘어가고요...) 타이타닉에서 로즈는 현실을 버리고 낭만을 선택합니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아내인 에이프릴은 현실에 짓눌린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남편인 프랭크에게 낭만을 좇아 프랑스로 떠나자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말은 끔찍한 파국으로 끝납니다.

타이타닉과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주인공들을 하나의 커플로 연결지은 후 그 사랑과 파국의 행보를 보면 확실히 ‘꽃다발 같은’의 두 주인공과 닮은 면이 있습니다. 화가 지망생인 타이타닉의 잭, 뜻밖의 성과를 낸 후 점점 직장 생활에 몰입해 가며 아내와 꿈꾸던 낭만을 망각해가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프랭크. 이 두 캐릭터를 하나의 삶으로 묶어버리면 ‘꽃다발 같은’의 무기의 삶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일러스트레이터로 생활하는 것을 꿈꾸었으나 당장은 큰 돈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현실과 타협해 취업을 하게 되는 무기. ‘그림은 퇴근한 후에도 그릴 수 있다’고 했지만 회사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잦은 야근을 비롯한 많은 노력과 시간의 소모가 필요했고 결국 무기는 ‘그림을 그리는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착실히 회사를 다니며 사회인으로 노력하는 삶을 사는 동안 아예 삶에 대한 태도 자체가 바뀌게 되죠. 예전에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책임 있게 현실을 살아가는 것’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됩니다. 

현실을 버리고 낭만을 선택한 타이타닉의 로즈와 낭만이 사라진 결혼 생활의 현실에 염증을 느끼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에이블린도 하나의 캐릭터로 연결한다면 마찬가지로 ‘꽃다발 같은’의 여주인공 키누와 닮았습니다. 처음부터 배우가 목표였고 결혼 후에도 연극배우 활동을 하는 등 늘 낭만적이고 예술적인 삶을 꿈꿔온 에이블린과 마찬가지로 키누 또한 애써 회계 자격증 까지 따며 취직한 회사를 그만두고 월급이 적은 문화 이벤트 관련 회사로 이직할 만큼 현실보다는 낭만적 삶을 꿈꾸는 캐릭터입니다.


이렇게 닮은 점이 있지만 에이블린과 프랭크 부부와 키누와 무기 커플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결말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이미 과정에서 차이가 생기죠. 결혼하고 자녀도 가지게 된 에이블린과 프랭크와는 달리 키누와 무기는 결혼 전 동거 단계에서 헤어지게 되니까요. 키누와 무기는 무려 4년이나 동거를 합니다. 거의 결혼이나 다름없는 생활입니다. 하지만 끝내 결혼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에 아름다운 이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에이블린과 프랭크 같은 파국을 맞았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이별의 직전, 무기는 키누에게 결혼하자고 합니다. 사랑의 낭만은 사라져 버렸지만 원래 다 그렇게 사는 거라고. 우리도 계속 그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합니다. 늘 현실과 책임에 대해 생각해온 무기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네, 실제로 원래 그렇게 사는 겁니다. 많은 결혼한 부부들의 삶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 자체가 그렇죠. 낭만은 없지만 책임을 느끼며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나쁠 게 뭐랍니까. 그렇게 계속 함께 살아가자고 무기는 키누에게 제안하지만... 사랑의 설렘과 낭만으로 충만해 있는 (과거의 자신들과 똑닮은)어린 커플의 모습을 보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게 됩니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123분으로 꽤 긴 편입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좋았던 점은 사랑이 시작되고 무르익다가 식어가고 결국은 종결이 되는 모든 과정들이 상영시간 내에 거의 동등한 비중으로(느낌상으로는) 매 순간 충실하게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호흡이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고릅니다. 급박하거나 격정되게 진행되는 상황이나 내용 전개가 없어요. 이런 영화의 고른 호흡은 특별한 무엇인가가 아닌 늘 언제나 거기에 있는 사랑의 느낌, 삶의 느낌이 시간의 흐름(관객의 시간과 영화 속 인물들의 시간)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관객에게 온전하게 전달시켜준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네, 이 영화의 핵심은 결국 ‘시간’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사귀기까지의 과정. 첫 만남에서 그들은 전철이 끊긴 시간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며 긴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른 후 두 번째 만남을 가지고, 또 시간이 흐른 후 다음 만남을 가집니다. 고백해야겠다고 결심한 날에도 시간은 계속 흐릅니다. 시간이 흐르고 흐른 끝에 그 순간이 다가왔고 결국 무기가 고백을 하고 둘은 정식으로 사귀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사귀다가 동거를 결심하기까지의 시간, 현실과 타협하고 취업을 하기로 결심하기까지의 시간, 그 후 오랜 취업 활동 끝에 둘 다 결국 취업에 성공하기까지의 시간...

결국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변화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영화의 제목에서 사랑을 ‘꽃다발 같은’ 이라고 비유한 것에도 이런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죠. 아름답지만 시간의 흐름에 의해 결국은 반드시 시들게 되어 있는 꽃다발. 사실 사랑의 비유로는 진부한 편이지만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에 이보다 부합하는 아이템도 달리 없습니다.

꽃다발은 주로 ‘선물’이라는 목적으로 쓰입니다. 선물처럼 우리에게 왔다가 결국은 시들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죠.


배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 둘 다 93년 생인데 그야말로 일본의 청춘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 같던 두 젊은 배우도 이제 내년이면 한국 나이로 서른 살입니다. 이 영화에서도 이전 작품들에 비해 많이 성숙해진 느낌이 들더군요. 특히 스다 마사키는 조금 놀랐습니다. 늘 교복을 입고 까불거릴 것 같은 이미지의 배우였는데 이 영화에서 번듯한 사회인이자 어른의 모습으로 나오는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아리무라 카스미는 ‘아마짱’으로 라이징한 게 8년 전이었던가요... 솔직히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거 같지만 여러 작품들에 출연하며 여배우로서 원숙해지고 있는 모습은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시간의 흐름’이 주제인 작품에서 두 청춘 배우의 ‘성숙함’이 보여주는 시간의 흐름 또한 작품의 주제를 보여주는 메타적 장치로 보여서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 외에도 좋은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건 마지막에 어린 커플로 잠깐 출연한 키요하라 카야입니다. 2002년 생으로 아리무라 카스미와 9살 차이군요. 2000년대생 여배우 중에서 모리 나나와 함께 관심 있게 보던 배우였기에 이 영화에서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등장해서 깜짝 놀라면서 동시에 반가웠습니다. 뭔가 조금은 ‘바톤터치’의 순간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리무라 카스미가 이제는 좀 더 성숙한 연기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지난 8년 동안 여러 작품에서 보여준 풋풋한 소녀의 역할은 키요하라 카야 같은 2000년대생 여배우들이 물려받게 된다는 느낌? 이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어린 커플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도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영화가 흥행에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속편이나 드라마 스핀오프 같은 거라도 혹시 안 될지...)


마지막의 귀여운 커플의 등장 장면을 비롯해서 이 영화에는 최후반부에 제가 좋아하는 장면들이 몰려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적으로 다 좋은 영화이지만 이 정도로 최후반부가 마음에 들었던 영화가 잘 없습니다. ‘사랑의 시작과 끝’을 다루는 영화에서 최후반부 전개가 이렇게 아름답고 좋을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이별이 확정된 이후에도 이사 갈 집이 정해지기 전까지 같이 살면서 키우던 고양이를 누가 데려갈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장면이나, 헤어진 후 각자 새로운 연인과 함께 있다가 우연히 마주친 순간에 서로 등을 보이며 상대를 보지 않고 뒤로 손을 흔들어 주던 장면.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된 구글 스트리트뷰 장면까지...

‘좋은 끝맺음’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영화 속 사랑의 끝맺음과 영화 자체의 끝맺음까지, 그야말로 완벽하게 아름답고 완벽하게 좋았습니다. 이 영화가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 너무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작품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트위터 @dsz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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