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가이 Review후기
프리가이 – GTA 실사판에서 NPC가 반란 일으키는 영화
GTA2 라는 게임을 처음 해봤을 때의 충격을 기억합니다. 아무 의미도 맥락도 없이 지나가는 시민들을 마음대로 두들겨 패고 총으로 쏘거나 차로 치어서 죽이는 게 가능했던 게임. 그 전에도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게임은 많이 해봤지만 죽이는 대상은 악당이거나 괴물이었고, 내가 악의 입장이 되었던 ‘던전 키퍼’ 같은 게임에서조차 어쨌든 나를 죽이러 쳐들어온 영웅들을 내가 살기 위해 죽였습니다. 그런데 GTA2에서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는 무고한 시민들을 두들겨 패고 죽였습니다. 물론 이렇게 이유 없이 무고한 시민을 죽이는 것이 이 게임의 목적은 아닙니다. 스토리도 있고 미션도 있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스토리나 미션을 하다가도 괜히 지나가는 시민을 건드리고 죽이게 됩니다. 이유는 단지 이것 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 수 있으니까”
2013년에 출시된 GTA5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합니다. 1999년에 출시된 GTA2와 비교해서 눈부시게 발전한 그래픽으로 생생하게 표현된 오픈월드의 자유로운 세계는 수많은 게이머들을 매료시켰습니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이나 ‘레드 데드 리뎀션2’ 같은 오픈월드 장르의 걸작 게임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GTA5를 최고의 오픈월드 게임으로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거대한 도시에 그 수많은 시민들. 도시는 그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세계이고 시민들은 정해진 행동만을 반복하는 NPC 였지만, 눈부신 그래픽으로 표현된 시각적 디테일은 현실감이 넘쳤으며 게이머들은 그 현실감 넘치는 세계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유와 일탈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NPC들을 두들겨 패고 죽였습니다. 할 수 있으니까.
‘열두 명의 웬수들’, ‘박물관이 살아있다’ 같은 밝고 유쾌하고 완성도 높은 오락영화들로 유명한 숀 레비 감독의 신작 ‘프리가이’는 GTA를 재미있게 즐겼던 사람에게 상당히 흥미로운 감흥을 안겨주는 영화입니다. 이 포스트의 제목으로 요약했듯이 이 영화는 실사판 GTA에서 NPC가 반란을 일으키는 내용입니다. 물론 수많은 디스토피아 작품에서 그려진 ‘AI의 반란’ 같이 암울하고 무거운 내용은 전혀 아닙니다. 숀 레비 영화니까요. 밝고 유쾌하고 귀엽고 사랑스럽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진짜, 엄청나게 재미있습니다.
숀 레비 감독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감독의 영화를 전부 본 것은 아니지만요. 지난 주에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고 와서 작성한 리뷰 포스팅에 이런 내용을 적었습니다. 아마도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저에게 2021년 최고의 영화가 될 것 같다고, 2021년 남은 기간 동안 보게 될 영화 중에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 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는 없을 것 같다고. 하여간 이런 무리수 예상은 쉽게 하면 안 된다니까요. 일주일 만에 이런 꼴이 되어버린단 말이죠.
물론 프리가이가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보다 재미있다고는 확언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거의 동급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요. 아마 프리가이를 먼저 봤다면 또 비슷한 언급을 하지 않았을까요. 이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를 2021년 남은 기간 동안 보게 될 것 같지 않다고. 그러고는 일주일 만에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를 보고 벙찌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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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좋은 일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2주 연속 보게 된 것은. 이런 일이 어지간해서는 잘 없죠. 특히나 코로나 시국으로 쟁쟁한 기대작들이 전부 개봉을 연기하는 바람에 한동안 극장에 볼 만한 영화들이 정말 없었잖아요. 지금도 코로나는 전혀 진정되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극장에는 다시 밀렸던 영화들이 개봉하기 시작했고 이제 정말 볼만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에요. 행복합니다. 이런 게 영화광의 행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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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가이는 오락영화로서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게임’과 ‘오락’이 동의어이기도 했습니다. 아케이드 게임센터를 지금도 오락실이라고 부르니까요. 프리가이는 GTA 같은 오픈월드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입니다. 영화 속 게임의 이름은 ‘프리시티’고 GTA와 거의 동일한 게임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연기한 ‘가이’라는 인물입니다. 이 인물은 게임 속 NPC 입니다. 역할은 은행원입니다. 그리고 이 GTA 같은 게임(폭력과 무법이 난무하고 살인과 강도가 권장되는)을 플레이 하는 게이머들은 게임 속 은행에 예금이나 대출 같은 용무로 방문하지 않습니다. 총을 들고 은행을 털러 오죠.
은행이 털리는 동안 가이는 언제나 동일한 행동을 합니다. 얌전히 바닥에 엎드려서 마찬가지로 얌전히 바닥에 엎드리는 절친 은행 경비원(전혀 은행을 경비할 생각이 없는) ‘버디’와 은행이 털리는 동안 잡담이나 하고 있죠. 그들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니까요. 가끔은 게이머들이 NPC인 그들을 발로 밟기도 하고 총으로 쏴 죽이기도 해요. 이 또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입니다. 죽은 NPC는 멀쩡히 그들의 집 침대에서 다시 부활하고 또 다시 같은 하루를 반복하죠. 관객 입장에서도 놀랄 게 하나도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 모두가 NPC는 그런 존재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라이언 레이놀즈의 연기력이 빛을 발하는 영화입니다. 원래 대단한 배우이지만 그가 대단한 배우라는 걸 아는 사람이라도 이 영화를 보면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여러 유명 영화들에서 인상적인 AI 캐릭터 연기를 보여준 배우들은 많습니다. ‘A.I.’의 헤일리 조엘 오스먼트, ‘프로메테우스’의 마이클 패스벤더, ‘엑스 마키나’의 알리시아 비칸데르, ‘그녀’의 스칼렛 요한슨 등등... 하지만 영화나 여러 대중문화/서브컬처에서 그려진 AI 캐릭터들은 대체로 현대의 기술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로서 우리가 현실에서 익숙하게 접하는 AI 캐릭터(가장 대표적인 것이 게임의 NPC)들과는 상당히 느낌이 다릅니다. 사실 지금 시대의 게임에 적용된 NPC 기술은 AI라고 하기도 뭐한 수준이니까요.
라이언 레이놀즈는 창작물 속 발전된 형태의 AI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우리에게 익숙한 NPC를 연기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런 연기를 처음 봤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은데,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영화 속에서 진지하게 NPC 연기를 하는 할리우드 대배우의 모습이 그냥 신기했어요.
라이언 레이놀즈가 보여준 NPC 연기에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계속 흥미진진하고 재미있고 만족스러웠어요. 영화를 보면서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 때문에 이런 만족감을 느껴본 것도 참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인공 ‘가이’도 사실은 우리가 창작물에서 흔히 봐온 발전된 형태의 AI입니다. 처음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게임 속 NPC로 행동하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탈바꿈합니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는 AI가 돼버리는 거죠. 그러고 보니 이게 요즘 과학계의 가장 뜨거운 화두가 아닌가요? 수년 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 이후로 말이죠.
스스로 학습하고 발전하고 진화하는 AI 기술이 게임 NPC로 상용화된다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아마 머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GTA5 라는 놀라운 게임이 세상에 공개된 지도 벌써 8년이 지났어요.
프리가이는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이지만 생각보다 철학적인 주제를 담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실 AI와 가상현실이 발달할수록 이러한 철학적 질문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프리가이가 던져주는 철학적 질문은 워쇼스키의 ‘매트릭스’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가이는 플레이어이자 이 영화의 여주인공인 밀리로부터 자기가 사는 세계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됩니다. 모두 프로그래밍된 가상 세계라고. 가이 자신 또한 NPC라고 불리는 프로그래밍된 존재라고. 가이는 큰 충격을 받고 혼란에 빠집니다.
저는 말이죠. 언젠가 인류에게도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믿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또한 누군가에 의해 프로그래밍 된 거라고 주장하는 과학자나 철학자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냥 눈을 뜨고 진지하게 이 세상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러한 주장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100% 믿기는 조금은 망설여지죠. 저도 믿는 사람 중 하나라고 했지만 100%는 아닙니다. 한 6~70% 정도?
아무튼 영화 속 가이는 놀라운 AI 기술이 발현되며 더이상 정해진 행동만 반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학습하고 계속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성장하게 되죠. 이렇게 되면 인간과 다른 것이 뭘까요? 가이는 절친인 버디에게 ‘우리는 가짜다’ 라고 말하지만, 버디는 이렇게 되묻습니다. “그럼 진짜는 뭔데?” 그렇죠. 인간과 거의 동일한 행동을 하는 AI가 프로그램밍으로 탄생하게 된다면, 그런 세상이 오게 된다면, 그 때 ‘진짜’ 진짜는 무엇일까? 앞으로 우리가 계속 직면하고 생각해봐야 할 질문입니다. 존재론, 인식론, 거기에 인간과 (거의)동일한 존재가 된 AI들에게 인간이 하는 행동에 대한 윤리성까지.
프리가이 같은 영화와 앞으로 나올 수많은 게임이나 대중문화/서브컬처 창작물들에서도 계속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정말 현실과 분간할 수 없는 가상세계가 실현된다면 우리의 인식 속에서 현실이라는 세계 자체가 붕괴할 수 있겠죠.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은 그런 세상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철학적인 영화는 매트릭스 말고도 많습니다.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시티’가 떠오르기도 하고 피터 위어의 ‘트루먼쇼’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 또한 이 영화와 매우 닮았다고 생각되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언급한 이런 영화들과 프리가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프리가이가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의 취지로 완성된 영화라는 점입니다. 숀 레비 감독의 대표작 ‘박물관이 살아있다’처럼요. 때문에 영화는 너무 철학적으로 골치 아픈 지점까지 가지 않고 적당히 끊어준 후 아주 대중적인 노선으로 방향을 잡고 나아갑니다. 영화의 후반부는 유쾌한 액션 활극이기도 하면서 로맨틱 코미디의 느낌도 있고 트루먼쇼가 보여준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의 느낌도 나요. 결론적으로 그냥 겁나게 재미있고 대중적인 영화가 되었습니다.
한 주 전에 감상한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와 프리가이의 재미가 거의 필적하는 수준이라고 앞에서 언급을 했는데요. 다만 재미의 정도는 비슷해도 그 모양과 성분은 차이가 있죠.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좀 더 자극적이고 마니악한 재미라면 프리가이는 아주 착하고 대중적인 재미입니다. 하지만 마니악한 요소도 어느 정도는 들어 있고요.
프리가이가 좀 더 덕후 코드와 레퍼런스를 많이 넣어서 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과 유사한 방향으로 완성되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을 표하는 반응도 제법 나오고 있더군요.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지만 저는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캡틴 아메리카와 광선검, 헐크 주먹 정도면 뭐... 필살기는 원래 중요한 순간에 짧고 굵게 보여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니까요.
그야말로 모범적인 대중 오락영화입니다. 라이언 레이놀즈와 숀 레비.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최고로 모범적이고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범적인, 대중적인 같은 표현들이 때로는 특색이 없고 심심하다는 좋지 않은 의미를 내포한 경우가 많지만 일단 이 포스팅에서는 저는 최고의 칭찬의 의미로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말, 최고였습니다, 프리가이!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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