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시간이구나. 처녀의 머리채에서 금을 훔쳐내고 어린아이의 눈에서 사파이어를 앗아가는 추악한 시간. 한순간이라도 존귀함과 성스러움을 품은 적이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훔쳐내어 기억과 재와 무덤만 남기는, 어두운 시간.” -그래픽노블 ‘샌드맨’ 中에서-
전기톱이나 마체테를 휘둘러대는 살인마들만 보다가 2006년에 나온 그렉 맥린의 ‘울프크릭’에서 충분히 멀리 달아나 이제 살았구나 하고 안심하고 있는 희생양을 멀리서 저격총으로 머리통을 날려 죽여버리는 살인마를 보고 ‘이건 너무 사기잖아!’ 하고 경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이 영화 속 살인마의 형태도 점점 진화하고 있습니다. 뭐, 울프크릭 이전에 더욱 경악스러운 살인마가 등장한 영화가 이미 있었죠. 바로 ‘데스티네이션’입니다. 이 영화의 살인마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존재인 ‘운명’이었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올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신작 영화 ‘올드’는 익숙한 호러 장르인 휴양지 서스펜스물입니다. 아름답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 휴양지를 배경으로 소수의 사람들이 고립된 채 줄줄이 죽어나가는 내용의 영화예요. 누가 이들을 죽이는 걸까요? 네, 이 포스트의 제목에도 이미 적었지만 이번 휴양지에서 사람들을 줄줄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무서운 살인마는 바로 ‘시간’입니다.
최근 샤말란 영화들이 대체로 그렇듯 이번 작품도 평가에 있어서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고 있습니다. 저는 꽤 재미있게 본 편이지만 물론 실망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 중 가장 크게 실망한 부분은 이번 작품에서 다른 영화들의 익숙한 기시감이 굉장히 많이 느껴졌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런 휴양지 서스펜스물은 호러 영화에서 워낙에 흔하게 제작되는 소재니까요.
‘호스텔’이나 ‘투리스터스’ 같이 금방 떠오르는 영화들이 있고 인간이 아닌 특정 장소가 죽음의 원인라는 점은 ‘루인스’와도 닮았죠. 그리고 이 사건들을 설계하고 관리하는 ‘배후 조직’이 드러나는 최후반부는 ‘캐빈 인 더 우즈’와도 비슷하고요. 관리자들의 뭔가 나사 빠진 분위기까지도 캐빈 인 더 우즈와 완전히 판박이입니다. 거기에 뜬금 없게도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에서 나온 (매우 충격적인)어떤 장면과 아주 닮은 장면도 등장합니다.
영화의 내용을 요약해보겠습니다.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유명한 휴양섬에 놀러간 주인공 가족은 호텔의 매니저로부터 ‘일부 손님들에게만 알려주는 특별한 장소가 있다’는 안내를 받고 호텔측이 마련한 벤에 올라 그 장소로 가게 됩니다.(벤의 운전사가 감독인 나이트 샤말란 입니다) 도착한 장소는 기괴한 모양의 암벽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해안가입니다. 주인공 가족 외 두 세팀이 더 있고 이들은 함께 어울려 휴양을 즐기지만 갑자기 해안가로 떠밀려온 알몸의 여성 시체를 발견하면서 분위기가 심각해집니다.
신고를 하려 하지만 휴대폰은 터지지 않고 해안가 진입로인 암벽 사이의 협곡을 통해 되돌아가려 하지만 협곡에 들어간 사람은 모두 의식을 읽고 기절하는 괴현상으로 인해 해안가에서 탈출도 못하게 됩니다. 모두가 우왕좌왕 하는 가운데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할머니가 몸이 안 좋다고 쓰러지더니 잠시 후 숨을 거둡니다. 해안가의 시체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백골이 되고 아이들은 입고 있던 수영복이 작다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꼬맹이였던 아이들이 불과 몇 시간 만에 훌쩍 자라난 모습을 보고 경악하는 부모들.
매우 혼란스럽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명약관화했습니다. 이 해안가에서는 시간이 급속도로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모두 빠르게 나이를 먹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성장 속도로 추산해본 나이를 먹는 속도는 30분에 1년. 그럼 하루 만에 거의 50년의 세월이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즉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어른들은 다음 날 해가 뜨기 전에 죽고 아이들도 다음 날 오후쯤이면 죽습니다.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 전개는 여느 휴양지 살인마 장르의 전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냥 계속해서 이어지는 죽음, 죽음, 죽음이죠. 보통 이런 연쇄살인마 장르의 결말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주인공만 겨우 살아남거나, 전부 죽거나.
이 영화는 그냥 다 죽을 거 같은 분위기로 내용이 진행됩니다. 완전히 속수무책이고 답도 없는 상황으로 보이거든요. 그도 그럴 게 상대가 ‘시간’인데 뭘 어떻게 하겠습니까. 시간의 흐름이라는 건 그냥 우주의 이치이자 원리 그 자체입니다. 뭐 양자역학이다 뭐다 하는 골치 아픈 이론들이 더 발전하면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재의 문명 수준에서는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도 시간의 흐름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영화의 내용은 끝내 전부 죽게 되지는 않습니다. 주인공 남매 2명은 살아남아요. 이 둘은 휴양지에 도착했을 때 나이가 각각 누나 11살, 남동생 6살인데 영화의 엔딩 시점에는 둘 다 5~60대 중년의 몸이 되었습니다.
어른 역할의 배우들은 그냥 동일한 배우가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분장해서 연기하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계속 배우가 바뀝니다. 누나인 매덕스는 11살 모습과 젊은이 모습, 중년 모습을 세 명의 배우가 나눠서 연기하고 남동생 트렌트는 6살 모습과 10대 초반 모습, 젊은이 모습, 중년 모습까지 무려 네 명의 배우가 연기하죠. 사실 캐스팅 정보를 모른 채 보러 갔기 때문에 매덕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가 요즘 제가 상당히 빠져 있는 배우인 토마신 맥켄지란 걸 알고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트렌트의 젊은 시절은 배우는 아리 애스터의 ‘유전’에 나왔던 알렉스 울프더군요.
나이트 샤말란은 굉장히 기발하고 파격적인 소재로 영화를 만드는 걸로 유명한 감독인데 그의 기존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그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각본도 썼습니다. 그런데 올드의 경우는 원작이 따로 있습니다. ‘모래성’이라는 제목의 그래픽노블이 이 작품의 원작입니다.
원작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 작품의 기본 설정 아이디어는 굉장히 참신하고 독특해요. 시간의 흐름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는 당연한 진리가 이렇게 무섭게 와닿은 적이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인간의 삶에 찾아오는 죽음을 휴양지 서스펜스 장르에 접목시킨 아이디어는 확실히 흥미롭고 신선합니다.
게다가 원래 세상의 모든 인간이 천수를 누리고 수명이 다해 죽는 것은 아니죠. 수명이 다하기 전에 인생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벌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늙어서 죽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죽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탈출하려다 사고로 죽기도 하고 치매성 정신질환을 일으켜 다른 사람을 살해하기도 하죠.
죽음 외에도 여러 가지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집니다. 가장 충격적인 건 말할 것도 없이 5~6살 정도 꼬맹이들이 몸만 청소년으로 자란 채 지들끼리 붙어 놀다가 여자아이가 임신해버린 상황입니다. 30분에 1년이 흐르는 상황이니 순식간에 배가 불러 출산까지 하게 되는데 이 내용은 리들리 스콧의 프로메테우스에 나온 유명한 제왕절개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물론 올드의 여자아이는 제왕절개가 아닌 자연분만을 하지만 영화에서 또 다른 사건이 터지며 기어이 제왕절개 비슷한 장면도 나오게 됩니다. 주인공 남매의 엄마가 뱃속에 3cm 정도 크기의 종양이 있는데 이게 엄청 빠른 시간의 흐름에 의해 멜론 사이즈 정도로 커지고 결국 배를 갈라서 종양을 꺼내게 돼요. 프로메테우스의 그 장면과 굉장히 유사합니다.
이렇게 충격적인 상황과 장면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영화는 상당히 흥미진진하고 몰입도 높게 전개됩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이 영화가 아주 재미있었는데 현재 인터넷에서는 이 영화에 대한 악평이 너무 많아서 조금 당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바로 빈센조 나탈리의 ‘스플라이스’가 개봉했을 때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굉장히 재미있게 봐서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추천도 하고 그랬는데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 안 좋아서 많이 놀랐었거든요. 뭐, 이런 게 바로 ‘취향타는 영화’라는 거겠죠.
스플라이스와 프로메테우스는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입니다. 그런데 올드의 국내 상영등급은 무려 ‘12세 관람가’예요. 애들도 볼 수 있는 영화라는 건데 이렇게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는 영화의 상영등급으로 이게 과연 적절한 건지 의문이 듭니다. 심지어 여성의 뒷모습 누드까지 나오는데요.
그런데 또 영화를 꼼꼼히 보다보면 12세 관람가를 못줄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누드 장면의 경우 엉덩이가 절반 정도만 노출되고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충격적인 상황들도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엉뚱한 곳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주로 충격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경악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여주며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방법을 씁니다.
그러고 보니 샤말란 감독의 영화가 국내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네요. 아마 ‘해프닝’이 유일한 거 같은데 해프닝에서는 확실히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긴 했거든요.
그런데 올드는 샤말란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특히 얌전하고 절제된 연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샤말란 감독이 은근히 점프 스캐어 연출에도 능한 감독인데 특히 전혀 안 무서울 거 같은 상황에서 뜬금포로 터지는 점프 스캐어가 그야말로 일품이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뻔히 점프스캐어가 나올 거 같은 상황에서조차도 전혀 그런 연출을 쓰지 않습니다. 이게 좀 의문이긴 해요. 이보다 훨씬 무섭고 자극적인 영화로 만들 수 있는 내용과 소재였는데 왜 이렇게 얌전하게 만든 걸까요? 이 포스트의 제목에서 ‘가장 무서운 살인마’ 운운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하나도 무섭지 않습니다. 애들이 봐도 돼요. 누드 장면만 눈 가려주고.
결말도 대체로 밋밋하고 무난한 편입니다. 인터넷 반응을 보니 특히 결말에 대한 혹평이 많던데요. 저는 사실 이 영화의 결말 자체는 조금 의외라고 느꼈는데, 나이트 샤말란의 작품들 중 특히 평이 안 좋은 영화들은 결말에서 이상한 무리수를 던져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떨어뜨린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 영화는 그런 게 전혀 없이 너무 평범하고 밋밋하고 대중적으로 무난한 엔딩인데 의외이긴 하지만 무리수나 나쁜 엔딩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죠. 저는 이 밋밋한 엔딩에 오히려 좋은 평가를 해주는 쪽입니다.
종합하자면 이 영화는 확실히 흥미롭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충격적이고 몰입도 높은 내용 전개를 보여주지만, ‘12세 관람가’라는 상영등급이 말해주듯 너무 얌전하고 밋밋한 연출로 일관하여 내용과 소재에 비해서는 전반적으로 자극이 약하고 심심한 감흥이 느껴져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내용과 소재 자체는 확실히 재미있기 때문에 저는 결국 이 영화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굳어질 것 같습니다. 토마신 맥켄지의 출연도 정말 좋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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