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치 시노부 矢口史靖
야구치 시노부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입니다. 언제나 그의 신작 제작 소식을 체크하고 신작이 나오면 빠짐없이 찾아보는 감독이죠.
제가 처음 보게 된 야구시 시노부의 작품은 워터보이즈입니다. 저에게는 일본 영화가 생소하던 시기였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워터보이즈는 좋은 작품이고(이 말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야구치 시노부의 모든 영화에 해당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이거 재미있네! 하고 호감 있게 보았죠. 물론 이 시점까지는 감독이 누구인지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단지 일본에는 이런 영화도 있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스윙걸즈’가 정말 대박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도 일본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히트를 쳐서 국내에도 유명해진 영화나 드라마들은 정규 루트(?)가 아닌 방법으로 많이들 접하고 있었죠. 저도 스윙걸즈를 그런 방법으로 봤는데, 나중에 이 영화가 유명해지니 결국 국내 극장에도 개봉을 했어요. 저는 이 영화를 너무너무 좋아해서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본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극장에 또 보러 갔습니다. 거의 텅 비다시피한 극장에서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관람을 했죠.
그리고 몇 년 뒤에 그의 신작 ‘해피 플라이트’가 나왔습니다. 해피 플라이트는 야구치 시노부의 작품 중에서 조금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입니다. 워터 보이즈와 스윙걸즈가 가장 유명하고, 최근작인 우드잡과 서바이벌 패밀리도 국내에서 나름 매니아층이 있는데 딱 그 중간에 낀 두 작품, 해피 플라이트와 로봇G는 인지도도 약하고 평가도 다른 작품들에 비해 조금 떨어지죠. 솔직히 이 두 작품은 별로 ‘안 당깁니다’. 애초에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는 청소년들이 나오는 상큼한 느낌의 작품이었는데 해피 플라이트는 직장인들의 이야기이고 로봇G는 할아버지가 주인공이니...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를 좋아했던 것도 야구치 시노부 라는 감독에 대한 선호가 아닌 그냥 일본 갬성의 하이틴물이 좋다! 라는 식이었거든요. 실제로 당시에 ‘린다 린다 린다’ 같은 또 다른 일본 하이틴 영화에 빠졌었기도 하고요. 그런데 결국 ‘해피 플라이트’를 봤습니다. 어찌되었든 워터보이즈와 스윙걸즈를 만든 감독이었고 당시에 ‘백야행’과 ‘호타루의 빛’으로 꽤나 핫한 배우였던 아야세 하루카도 출연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무슨! 예상치도 못한 초대박이!!
‘해피 플라이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야구치 시노부의 영화이자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top3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사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평가를 보면 이 작품이 다른 야구치 시노부의 작품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스윙걸즈나 우드잡 같은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평가를 받고 있죠. 이 감독은 자기만의 개성이 강한 대신 이 개성이 모든 작품들에서 동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필모의 모든 작품들이 비슷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다만 해피 플라이트 만은 그의 전체 필모에서도 굉장히 튀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주인공이 없죠. 아니, 모든 출연진이 주인공이랄까. 공항 이라는 공간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한 영화입니다. ‘공항(과 비행기)을 배경(직장)으로 하루를 보내는 직장인들의 일상물’이라는 것이 이 영화를 요약하는 정체성일 텐데, 후반부에 조금은 큰, 하지만 지나고 보면 ‘직장인의 일상’의 범주에 들어갈 만한 정도의 사건이 터지고 꽤나 흥미로운 극적 긴장을 맛보게 해줍니다. 일상물과 극적 상황의 조화가 완성도 높게 짜여 있고 인물들 한명 한명의 일상 드라마가 모두 너무도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극도로 흥미로운 평범함’이랄까. 이 평범함이 영화를 정말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물론 그 때문에 야구치 시노부의 다른 작품에 비해 재미가 없었다 라는 반응도 나오는 것일 테고요. 하지만 말했듯이 저에게는 최고의 영화입니다. 음식으로 비유하면, 어떤 자극도 없이 완벽하게 무해한 천연 재료의 간식을 먹는 느낌이랄까.
사실 야구치 시노부 영화의 진짜 강점은 캐릭터의 매력에 있습니다. 그냥 캐릭터가 정말 귀여워요. 엄청나게 자극적이거나 튀는 캐릭터는 없지만 뭔가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귀여운 방향(?)으로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죠. 물론 코미디 영화가 대부분 그렇지만 그게 재미있다, 괴상하다는 느낌이 아닌 귀엽다 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정말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해피 플라이트’는 그런 캐릭터들이 한가득 등장하는 작품이고요. 다른 작품의 주요 캐릭터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로봇G’는 보기를 가장 망설인 영화예요. 그도 그럴게 저는 스윙걸즈의 우에노 주리 같은 상큼함과 귀여움에 관심이 있었지 로봇G의 포스터에 나오는 영감님에게는 전혀 흥미를 느낄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영화가 저에게 ‘야구치 시노부’라는 감독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작품이 되었습니다. 정말 전혀 기대를 안 하고 봤기 때문에 놀라움이 더욱 컸습니다. 지금까지 본 다른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너무도 귀엽고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작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앞으로 이 감독이 어떤 소재의 작품을 선택하더라도, 의심하지 말고, 닥치고 볼지어다. 그렇게 저의 야구치 시노부 숭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 숭배는 우드잡과 서바이벌 패밀리를 거치면서 더욱 굳건해집니다. 이런 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어내니 이제는 야구치 시노부에 대해서는 ‘현역으로 활동하는 모든 감독 중에서 신작이 가장 기다려지는 감독’으로 제 안에 각인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현 시대에 좋은 감독들이 너무도 많지만 야구치 시노부야 말로 제가 신작을 가장 기다리는 감독입니다. 아주 다작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리 길지 않은 텀으로 신작을 꾸준히 내주는 감독이기에 더욱 감사함을 느끼게 됩니다.
야구치 시노부의 모든 작품들은 비슷한 느낌의 개성을 유지하고 있지만 소재의 다양성이 정말 무궁무진 합니다. 정말 매번 전혀 예상치도 못한 소재를 신작으로 불쑥 들고나온단 말이죠. 더욱 놀라운 건 그가 선택하는 소재들이 ‘이 소재로 재미있는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들이 대부분이란 사실입니다. 사실 소재 그 자체로 흥미를 동하게 하는 것들만 선택한다면 그 선택의 폭이 극도로 좁아집니다. 야구치 시노부는 재미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소재들을 마음껏 고르기에 그 다양성이 더욱 폭넓어지는 것이죠. 어떤 소재든 그의 손에 걸리면 엄청 재미있는 영화로 완성되어 버리니까요.
아, 그런데. 그의 가장 최근작인 ‘댄스 위드 미’는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감독이 만든 영화 중에서 가장 실망스러웠습니다. 사실 로봇G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도 소재만 봐서는 영 당기지 않았는데, 또 로봇G 때와 다르게 지금은 야구치 시노부의 작품에 어떤 의심도 않고 순수하게 기대만을 품게 된 상태로 봐서... 역시 언제나 너무 큰 기대는 독이 되나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댄스 위드 미는 야구치 시노부 영화 중 흥행도 가장 저조했고 전반적으로 이 감독의 커리어에서 최하위권으로 평가받을 작품인 것 같습니다.
물론 재미없지는 않았습니다. 야구치 시노부 영화의 강점은 여전히 살아 있고 캐릭터는 언제나처럼 매력적이었지만... 뮤지컬 연출이 뭔가 이 감독의 약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비슷한 음악 소재의 ‘스윙걸즈’는 또 끝내주게 잘 만들었잖아? 왜 이렇게 이 영화의 뮤지컬 장면들이 감흥이 없고 엉성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영화의 주연배우 미요시 아야카도 좀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매력있고 재능있고 좋은 배우인데. 거기에 한국을 엄청 좋아하는 친한파 배우잖아요! 일본 영화계에서 큰 명성이 있는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작품에 원톱 주연롤로 출연해서 이 영화가 잘되었다면 스윙걸즈의 우에노 주리처럼 단숨에 라이징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영화 자체에는 꽤 실망을 했지만 이 배우는 계속 생각이 나서... 배우 때문에 영화를 몇 번 반복해서 볼 정도였거든요. 뭐 이 영화가 좀 안되긴 했지만 최근에 크게 성공한 넷플릭스 드라마 ‘아리스 인 보더랜드’에도 출연했고 앞으로 더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한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댄스 위드 미’로 인해 야구치 시노부의 작품에 대한 압도적인 기대치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음 작품을 가장 기다리게 되는 감독입니다. 사실 언제나 좋은 작품을 만드는 감독이긴 해도 그 동안 작품마다 세세하게 편차는 있었어요. 막연한 감이지만 다음 작품 쯤에서는 스윙걸즈, 해피 플라이트, 우드잡 정도의 대박 작품을 다시 한 번 뽑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되네요. 야구치 시노부의 신작을 보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제 삶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대서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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