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완-벽. 정말 오랫동안 이런 영화를 기다려왔습니다. 왜 영화를 보는가? 왜 극장에 가는가? 그 근본적인 이유를 제대로 실감하게 해주는 영화. 정말 얼마만 인지 모르겠습니다. 극장에서 이런 감동을 느껴본 것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모르겠어요. 듄 이전에 마지막으로 이런 감정을 느껴본 영화가 뭐였는지. 설마 나온 지 10년도 넘은 ‘다크나이트’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나요... 그 사이에 어떤 작품이든 있을 텐데 당장 생각이 안 나네요. 코로나 때문에 극장을 1년 정도 끊었던 적이 있기도 하고.
듄은 제가 2021년 개봉하는 모든 영화를 통틀어서 최고의 기대작이라고 생각했던 영화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으로 썼었던 2021년 가을겨울 기대작 순위에서도 단연 1위로 꼽았었고요.
2021년 가을겨울 개봉예정 외국영화 기대작 순위 TOP 20
그런데 제 경험상 최고의 기대작으로 생각했던 영화가 그대로 그 해 최고의 작품이 되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너무 큰 기대는 독이 됩니다. 최고의 기대를 품었다는 것 자체가 그 영화에 대한 평가에는 근본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듄의 경우는 좀 달랐죠. 2021년 최고의 기대작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다른 해와 비교해서 그 기대치는 조금 떨어졌습니다. 예컨대 2022년에 개봉할 예정인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 같은 영화가 있었다면 듄을 최고 기대작으로 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코로나의 여파로 많은 기대작들의 개봉이 밀렸고 2021년은 확실히 기대작의 라인업이 예년보다는 약한 수준이었어요.
결정적으로 저는 드니 빌뇌브 감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않았습니다. 이 감독의 영화는 모두 재미있게 보았지만 어느 정도는 과대평가가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듄에 대해서도 감독 때문에 기대치를 조금 낮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난 지금은..... 감히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 아니 갓갓 갓갓갓 감독님이 과대평가라니!! 그런 터무니 없는 생각을 어찌 감히 할 수 있었던 말입니까. 인간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죠. 다시 한 번 갓갓 갓갓갓 감독님에 대해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던 것을 크게 반성하겠습니다.
듄은 모든 것이 완벽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기만 하면 어떤 잔재주도, 기교도, 스토리의 복잡한 반전 같은 것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듄은 1960년대에 첫 작품이 출간된 SF 소설의 고전입니다.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만 플롯 자체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무협지에서 이런 내용을 많이 봤을 거예요. 명망 있는 가문이 적 세력의 비열한 계략에 의해 멸문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가문의 후계자(주인공)가 힘을 키워 복수를 한 후 가문을 다시 일으킨다는 내용. 무협지도 그렇고, 여러 귀족 가문들이 등장하는 서양식 판타지 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듄이 이런 스토리의 원조라고 하기는 어렵지만(이런 스토리의 원조는 그냥 인류의 권력사 그 자체입니다) 창작물에서 그 형태를 정립하고 보편화시킨 작품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플롯은 단순하지만 굉장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을 쥐고 뒤흔드는 내용이에요.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분노와 절망감... 그 후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하는 과정의 인내는 향후 전개될 내용의 기대감을 증폭시키고, 결국 복수를 성공하고 역전극을 이루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만족감을 안겨줍니다.
누가 봐도 쉽게 재미를 느낄만한 이런 플롯이 좋은 작품, 혹은 훌륭한 걸작을 완성하는 핵심 재료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 대부분의 대중문화 창작물은 기본 플롯 자체는 사람들이 재미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야기 구조로 짜여 있습니다. 플롯은 작품의 뼈대입니다. 괴상한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과학실의 인체 골격 표본을 보고 매력을 느끼지는 않죠. 뼈대 위에 살과 근육, 피부가 더해지고 그것이 완벽하게 아름다운 형태를 이루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아름다운 형태의 완전한 인간에게 우리는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흡입력 있는 문장과 표현력이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리고 단순한 플롯의 뼈대 위에 더해지는 좀 더 세밀하고 복잡한 세계관의 설정과 인물의 성격, 관계성 등의 다양한 요소들이 작품의 완성도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기본적으로 소설에서 완성된 요소들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완벽하게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영화 제작의 중요한 과제가 됩니다.
해법은 단순합니다. ‘그냥 모든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라.’ 말로 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죠. 어마어마한 자본이 필요하고 최고의 재능과 능력이 엄청난 규모로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감독이 천재라야 합니다. 드니 빌뇌브처럼요.
이런 결과물은 정말 몇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합니다. 애초에 이 정도의 자본이 들어가는 대작 영화가 많이 제작되지도 않는 데다, 캐스팅부터 시작해서 각본, 미술, 촬영, 분장, 편집, 음악까지 이런 대규모 작업에서 이 정도로 완벽한 결과물을 완성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죠. 이런 완벽한 결과물을 목도하고 압도적인 경이감을 느끼며 감탄하는 것은 관객의 숭고한 의무입니다.
가장 완벽한 해답은 가장 단순한 것입니다. 듄의 완벽함에 대해 제가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바로 영화의 캐스팅입니다.
사실 최근에 영화나 드라마의 캐스팅과 관련하여 시끄러운 논란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넷플릭스에서 제작 중인 샌드맨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닐 게이먼의 그래픽노블 ‘샌드맨’을 실사 드라마로 제작하는 작품입니다. 샌드맨은 제가 살면서 본 모든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등 각종 대중문화와 서브컬처 창작물을 통틀어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당연히 현재 제작 중인 실사 드라마에도 엄청난 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 공개된 이 드라마의 확정 캐스팅을 보고는 기대감이 조금 식어버렸습니다. 샌드맨에서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인 영원 일족의 죽음(Death)이 흑인 배우로 캐스팅되었고 또 다른 중요 캐릭터인 로즈 워커와 유니티 킨케이드도 흑인 배우가 캐스팅되었습니다.
원작의 이미지와 완전히 동떨어진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넷플릭스 작품들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넷플릭스 말고도 많은 실사 창작물에서도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습니다. PC, 즉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걸로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 포스팅에서 하고 싶은 말은, 정치적 올바름은 작품의 완벽함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듄은 배우들의 캐스팅이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출연하는 모든 배우들이 내용과 캐릭터에 그야말로 완벽하게 부합하는 모습으로 등장했습니다. 실사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단순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공 가문의 대단한 귀족들은 그냥 끝내주게 잘생기고 끝내주게 멋있고 끝내주게 예쁘고 끝내주게 위엄 있어 보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하고 의상과 분장, 메이크업을 완벽하게 해주면 되는 거예요.
그러나 현시대에 우리가 보고 있는 수많은 작품들에서는 내용과 캐릭터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배우들이 곳곳에 등장해 작품의 완벽함을 망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오히려 더 일반적이고 흔한 경우가 되었습니다. 특정 작품이나 배우에 대한 비하가 될 테니 구체적인 사례는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런 일들에 점점 진저리를 내는 저 같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선역은 선역답게. 악역은 악역답게. 영웅은 영웅답게. PC니 뭐니 쓸데없는 짓거리들은 제발 그만. 그냥 온전하게 작품에만 집중해주면 좋겠어요. 멋있고 대단한 인간들이 나와서 멋있고 대단한 일들을 벌이는 영화라면 정말 그런 내용을 몰입도 있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으로 캐릭터들이 등장해야 합니다.
듄의 모든 캐릭터들이 다 좋았지만 특히 감탄했던 건 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연기한 악역 ‘하코넨 남작’입니다. 말 그대로 ‘악역을 악역답게’. 이렇게 소름 끼치고 살벌하게 사악한 분위기를 풍기는 영화 속 악역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내용 상에서 저지르는 악행과는 별개로 시각적인 표현만은 제가 본 영화 속 악역 중에서 최고 수준이에요.
캐스팅과 캐릭터의 시각적 표현뿐 아니라 듄의 모든 요소들이 영화의 단순한 플롯을 극한의 몰입감으로 관객에게 전달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연구되고 디자인되었습니다. 어떤 배우를 캐스팅할 것인가, 어떤 스타일링과 메이크업을 할 것인가, 이 대사는 어떤 식으로 처리하는 게 좋은가, 이 장면은 어떤 구도로 잡는 것이 좋은가. 듄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가장 완벽한 해답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완벽한 미술과 어마어마한 자본력으로 완성된 세계의 묘사 역시 압권입니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아닌 SF 작가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의 경우 실사화를 할 때 그 세계의 묘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지가 작품에 대한 전반적인 몰입도를 결정합니다. 단순히 설득력뿐 아니라 우리의 현실 세계를 압도하는 느낌의 경이감 또한 느껴져야 하죠. 이것이 그냥 돈만 쏟아부어서 CG 떡칠로 그럴듯한 신기한 세계를 그려내는 것으로 충분한 게 아닙니다. 배경 세계뿐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융화되어야 합니다. 감독의 천재적인 감각이 아니라면 이런 일을 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듄은 방대한 세계관과 복잡하고 다양한 설정들을 가지고 있는 SF 대작입니다. 하지만 드니 빌뇌브는 이 영화를 ‘최대한 쉽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복잡한 배경 설명은 최소한으로 간추리되 이해가 필요한 설정들은 효과적으로 잘 전달했습니다. 관객이 내용과 설정을 쫓아가느라 진 빠지는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관객은 그야말로 여유롭게, 음미하듯이 이 영화의 모든 ‘완벽함’을 몰입하고 즐길 수가 있습니다. 150분이 넘는 긴 상영시간이 전혀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듄의 이야기는 이 한 편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엔딩에서 속편에 대한 기대감과 간절한 기다림을 유발시키는 정도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능가합니다. 어벤져스는 1년만 기다리면 되었지만 듄의 속편은 아무리 빨라도 최소 2년 이상은 기다려야겠죠. 정말 가혹한 일입니다. 그래도 10년을 넘게 기다린 아바타 속편도 얼마 뒤면 보게 되는데 듄의 속편을 볼 날은 금방 다가오겠죠.
마지막으로 한스 짐머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이런 영화들을 위해 한스 짐머의 재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듄이 눈과 귀를 극한까지 만족시켜주는 최고의 극장용 영화가 될 수 있게 한 결정적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한스 짐머의 웅장한 스코어입니다. 한스 짐머가 그동안 영화 음악 작곡가로서 대단한 업적을 많이 쌓았지만 이번에 듄에서 작업한 결과물은 그의 최고의 업적 중 하나로 기록될 것입니다.
듄 같은 영화를 보게 되면 영화 팬으로서 진정한 행복을 느낍니다.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 극장이 존재하는 이유. 그 모든 답을 드니 빌뇌브의 ‘듄’이 품고 있습니다. 이런 영화가 바로 진정한 걸작이고, 대작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영화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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