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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영화사이

[만화와 영화사이] 치하야후루

by 대서즐라 2021.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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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원작영화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치하야후루 ちはやふる

순정만화 코너에 꽂혀 있지만 순정만화가 아닌 만화들이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순정만화 그림체인데도 작정하고 빵빵 터트리는 개그 만화도 있고, 음악이나 요리,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만화도 있죠. 치하야후루는 순정만화의 탈을 쓴 스포츠 만화입니다. 어중간한 것도 아니고 정말 본격적인 스포츠 만화라고 생각해요.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치하야후루와 비교할만한 작품은 ‘슬램덩크’입니다.

물론 치하야후루가 슬램덩크 만큼 유명하고 대단한 작품인 건 아닙니다. 하지만 슬램덩크 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한 히트를 한 만화이고 스포츠 만화로서 재미와 완성도도 굉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슬램덩크와 동등하진 않더라도 거의 필적할 만큼 재미있게 읽은 만화입니다.(그런데 공교롭게도 치하야후루의 작가 스에츠구 유키는 이전 작품 ‘에덴의 꽃’이 슬램덩크와 다른 몇몇 작품들의 그림을 트레이싱 및 표절해서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슬램덩크


치하야후루는 평범한 스포츠 만화가 아닙니다. 일단 종목부터가 정말 특이하죠. 슬램덩크의 농구처럼 대중적인 종목이 아닌데.. 사실 그 정도가 아니라 한국인이라면 천명 중에 한 명은 알까 싶을 정도로 인지도가 거의 없는 종목이에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에만 있는 종목이거든요. 

바로 ‘경기 카루타’ 라는 종목입니다.

이 종목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종목인지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이 없습니다. 이 종목을 정말 본격적으로 다루는 치하야후루 라는 작품을 보고서도 아직도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애초에 이것이 스포츠가 맞는지?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경기’가 성립이 되는지 여전히 의문이에요.

경기 카루타


물론 스포츠인지 아닌지는 이젠 따질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바둑이나 컴퓨터 게임도 스포츠로 당당히 인정받게 된 시대인 걸요. 경기 카루타처럼 명백히 신체의 능력을 활용하는 종목이 스포츠가 아닐 수가 없죠.

이 종목의 진행 방식은 이렇습니다. 한 세트의 카드를 가지고 경기가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이 카드는 트럼프처럼 숫자와 무늬로 구성되어 있거나, 화투처럼 그림으로 구성된 카드가 아닙니다. 그림이나 숫자가 아닌 ‘시구’로 구성되어 있는 카드입니다. 경기를 할 때는 경기자 외에 낭독자가 존재하는데, 이 낭독자가 한 구절의 시구를 낭독합니다. 그럼 경기자는 낭독자가 낭독한 시구를 듣고 그 다음 시구가 적혀 있는 카드를 상대보다 빨리 손으로 쳐내야 합니다. 즉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고 낭독자가 낭독을 하면, 그 다음 이어지는 시구인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라고 적혀 있는 카드를 먼저 쳐내는 쪽이 점수를 가져가는 방식인 거죠. 물론 이건 제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간단히 설명한 거라 실제 경기 방법 과는 조금 차이가 있지만, 대충 이런 방식의 경기라고 이해하면 큰 무리는 없습니다.

저는 이방원의 하여가를 예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일본 시가 쓰이고요.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시가 사용되는 건 당연히 아니고, ‘백인일수’라고 불리는 백 개의 시만 사용됩니다. 이 백 개의 시는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100명의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한 수씩 선별한 것입니다. ‘와카’라는 형식의 짧은 시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경기자는 이 100개의 시를 모두 외워서 경기를 합니다.

백인일수


경기 방식을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낭독자가 시를 전부 낭독하기도 전에 그 판의 승부가 판가름 납니다. 보통은 첫 단어만 들어도, 시에 따라서는 첫 한 글자만 듣고도 어떤 시인지 판별이 가능하기 때문이죠. 치하야후루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심지어 첫 글자가 나오기도 전에, 낭독자가 낭독을 위해 호흡을 들이마시는 소리 만으로 그 직후 뱉어낼 첫 글자가 뭔지 알아내서 카드를 쳐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만화적인 과장인지 실제 가능한 일인지는 저도 정확히 확인은 못했습니다. 실제로 가능하다면 정말 대단한 능력인 거죠. 

이런 방식의 경기라면 분명 신체의 능력을 극한으로 사용하는 스포츠임에 틀림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낭독을 듣는 청력과 눈으로 카드를 찾아내는 시력, 그리고 빠르고 정확하게 카드를 쳐내는 손과 팔의 동작이죠. 거기에 기억력도 중요하기 때문에 두뇌 스포츠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중적인 종목이 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아무리 짦은 시라지만 100개나 되는 시를 외워야 하는 것부터가 엄청난 진입장벽이죠. 물론 초보자의 경우는 시를 전부 외우지 않고 첫 단어나 첫 글자만을 기억해서 카드를 판별해나가는 식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만... 

경기 카루타


하는 건 어렵다 치고 보는 재미는 어떨까요? 사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하게 많은 스포츠 종목들 중에서 리그가 TV에 방영되고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거나 직접 경기장에 경기를 보러 갈 만큼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종목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올림픽처럼 국가 간의 대결이 걸려 있다면 마이너 종목이라도 충분히 몰입해서 즐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마이너 종목들이 보는 재미를 크게 어필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대중문화나 서브컬쳐 창작물의 소재로서는 어떨까요? 이건 순수하게 작가의 역량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창작물의 소재로도 마이너 종목보다는 대중적인 인기 종목이 훨씬 많이 등장하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마이너 종목이라도 작가가 어떻게 표현해내느냐에 따라서 인기 스포츠 종목 소재의 명작 못지않게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해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다 마사히토는 ‘자전거 로드 레이스’라는 마이너 종목을 소재로 슬램덩크 못지 않은 몰입감과 재미를 주는 최고의 스포츠 만화 ‘스피드 도둑’을 그려냈죠.

스피드 도둑


경기 카루타를 소재로 삼은 치하야후루 또한 최고의 명작 스포츠 만화입니다. 재미있어요. 엄청나게 재미있습니다. 그것도 스포츠 만화의 본질에 충실하게 재미있습니다. 만화에서 재미를 주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경기 자체의 재미를 충실하게 그려낸 것입니다. 스포츠 소재의 작품이라고 해도 주인공과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있고, 그들의 인생 전부가 스포츠로만 가득 차 있는 건 아니죠. 스포츠 소재의 만화인데도 정작 스포츠의 비중은 별로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화가 재미만 있으면 장땡이니까요. 이런 예의 대표적인 작품은 다이빙(정확히는 스쿠버다이빙)을 소재로 한 개그 만화 ‘그랑 블루’를 꼽을 수 있겠죠. ‘이나중 탁구부(탁구)’나 ‘한츠X트래쉬(수구)’도 예로 들 수 있을 테고요.

그랑블루


이런 만화들과는 달리 치하야후루는 스포츠 경기의 재미를 비중 있게 그립니다. 그런데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만화에서 보여지는 해당 종목의 재미가 실제 그 스포츠 종목의 재미라고 볼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아예 무관하다고 해도 될 정도예요. 아무리 지루하고 별 볼 일 없는 게임이나 스포츠라도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냐에 따라서는 그 작품의 내용 자체는 엄청나게 재미있을 수 있거든요. 단순한 가위 바위 보 승부조차도 천재 만화가가 엄청 박진감 넘치고 흥미진진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겁니다.

치하야후루는 경기 카루타 시합 장면을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게 그려냅니다. 정말 훌륭한 스포츠 만화는 바로 이런 점이 대단한 겁니다. 경기 장면의 묘사가 정말 일품인 거죠. 특히 경기 중 가장 하이라이트인 순간, 소위 ‘나이스 플레이’의 순간의 연출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순간을 잘 연출해서 그리면 만화를 읽는 독자가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장면이 많은 만화가 좋은 스포츠 만화입니다. 치하야후루가 바로 그렇습니다.


자, 만화로는 이렇게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게 경기 카루타 시합 장면을 연출했는데, 그럼 실사 영화에서는 어떨까요. 경기 카루타를 만화책을 통해서만 접했던 사람이라면(바로 저입니다) 이거 사기 당했다고 느껴질 겁니다. 만화책을 보면서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더군요. 이런 종목을 그렇게 박진감 넘치게 표현했던 이 작품의 작가 스에츠구 유키가 더욱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네, 영화로 본 치하야후루는, 만화로 본 것보다 재미가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럭저럭 볼만한 영화이긴 합니다. 만화보다는 현저히 떨어지지만 영화 감독도 나름 궁리해서 경기 카루타 시합 장면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기 위해 연출에 공을 들였습니다. 나름 한다고 했는데 이런 결과물이라면... 이게 종목의 한계인 건지 감독 역량의 문제인 건지는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저는 여전히 이 종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요. 


만화는 경기 카루타에 대해 전혀 모르더라도 충분히 몰입해서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경기 상황 파악이 잘 안되고 나아가서는 이것이 제대로 된 스포츠 경기가 맞는지 근본적인 의문까지 생길 정도예요. 혹시나 해서 유튜브로 실제 경기 카루타 영상도 찾아봤는데요. 이런 의구심이 더욱 커질 뿐인...

결국 원작의 작가 스에츠구 유키가 엄청나게 사기를 친 것이다, 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 엄청 재미없는 영화를 엄청 재미있는 것처럼 사기 치는 김경식처럼 말이죠. 하지만 경기 카루타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확실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냥 치하야후루 원작 만화가 엄청나게 대단한 작품이라는 것 뿐.


그리고 전 이 영화가 ‘그럭저럭 볼만하다’고 말했습니다. 경기 카루타 시합 장면의 박진감과 재미는 원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지만, 치하야후루가 단지 그 재미만이 전부인 작품은 아니거든요. 애초에 순정만화 코너에 꽂혀 있는 만화이고, 사실 초반부 어느 시점까지는 순정만화구나, 라고 착각(?)하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작품의 주역 캐릭터가 3명인데, 한 명이 여자이고, 나머지 둘이 남자입니다. 일반적인 순정만화의 삼각관계 구도로 딱이죠. 실제로 이 세 명이 삼각관계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삼각관계의 향방을 좌우할 여주인공이 연애보다는 경기 카루타에 푹 빠져 있어서 순정만화 스러운 내용은 거의 나오지가 않고 스포츠 쪽 비중만 커지게 될 뿐이지만요.


스포츠 종목으로서 경기 카루타의 특징 중 하나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대등한 조건으로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바둑이나 체스 같은 두뇌 스포츠와 닮은 점이죠. 때문에 여성 체스 플레이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퀸스 갬빗’이 치하야후루와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여주인공이 남자 선수들과 대등하게 경쟁자로서 승부를 벌인다는 점이 두 작품의 닮은 점이죠. 그리고 여주인공과 경쟁자 남성들 간에 미묘한 연애 관계가 형성되는 것도 동일하고요. 확실히 퀸스 갬빗과 치하야후루의 주인공은 닮은 면이 꽤 있습니다.

퀸스 갬빗


치하야후루의 여주인공 ‘치하야’를 연기한 배우는 히로세 스즈입니다. 대세 배우가 대세 작품에 제대로 캐스팅 되었다는 느낌이죠. 하지만 원작에서 치하야의 중요 설정 중 하나는 외모가 ‘큰 키의 모델 체형’이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체형만 놓고 본다면 히로세 스즈는 원작의 치하야와 싱크로가 떨어지죠. 원작의 설정에 최대한 충실한다면 혼다 츠바사 정도가 괜찮은 캐스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만....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게 되면 히로세 스즈가 정말 굉장합니다. 


영화는 말했듯이 그럭저럭 볼만한 수준이고 엄청 잘 만든 작품은 아닌데, 히로세 스즈는 아주 혼신의 연기를 보여줍니다. 치하야의 캐릭터 성격이 굉장히 독특한데 뭐 스포츠 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비범한 천재형이죠. 하여간 보통 사람과는 뭔가 다른데 히로세 스즈가 이런 독특한 캐릭터를 굉장히 설득력 있게 잘 연기했습니다. 실시판 치하야 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히로세 스즈의 인생 캐릭터 수준이에요.

주역 3인방 중 나머지 2명인 아라타와 타이치는 각각 아라타 맛켄유와 노무라 슈헤이가 연기했는데 그냥저냥 무난했고요. 이 영화에서 또 한 명 좋았던 캐스팅은 시노부 역의 마츠오카 마유입니다. 시노부도 치하야만큼이나, 아니 치하야 이상으로 독특한 캐릭터인데 마츠오카 마유가 정말 완벽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외모 싱크로는 그다지 높지 않은데 시노부의 그 오묘한(?) 분위기를 어찌나 그렇게 잘 살리던지! 마츠오카 마유가 엄청난 미녀는 아니지만 묘하게 매력이 느껴지는 외모라서 도대체 착한 캐릭터인지 나쁜 캐릭터인지, 매력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 시노부의 미스터리한 캐릭터성을 표현하는데 딱 맞는 캐스팅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화는 현재 10년 이상 장기연재 중이고 단행본이 40권 넘게 나왔는데 영화는 3부작으로 제작하여 깔끔하게 내용을 마무리했습니다. 영화가 그럭저럭 볼만한 정도라고 말했지만 1편에 비해 2편, 3편으로 내용이 진행될수록 점점 재미있어집니다. 결말도 깔끔하게 끝냈기 때문에 방대한 원작 내용을 3부작 영화 스토리로 잘 각색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결말은 히로세 스즈의 또 다른 대표작인 ‘치어댄스’의 결말과 완전히 똑같습니다. 두 영화가 나온 시기도 비슷하던데 참 재미있는 우연... 이라기 보다는 그 만큼 뻔하고 흔해 빠진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원래 뻔하고 흔해 빠진 게 무난하고 좋은 결말인 거죠.

치어 댄스


하여간 이 3부작을 다 보고 나면 원작을 재미있게 읽은 입장에서 큰 불만 없이 만족스러운 감상이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경기 카루타라는 종목에 대한 의문은 더욱 커진 상태겠지만요. 시합 장면의 박진감과 카타르시스는 원작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지만,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고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있고 원작을 잘 각색한 내용이 있으니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영화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트위터 @dsz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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