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피스토는 디아블로2 라는 게임의 게임성 자체를 상징하다시피 하는 캐릭터입니다. 그 게임성이란 바로 ‘단순 반복 무한 노가다 게임’이죠. RPG 게임의 가장 대표적인 사망전대. 게임 역사상 가장 많이 유저들에게 학살당한 캐릭터. 디아블로2를 많이 해본 유저들이라면 어느 순간 이 게임에 등장하는 몬스터들에 대해서 기묘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칼, 활, 마법 등 온갖 다양한 수단과 능력들에 의해 갈리고 찢겨나가며 학살당하는 몬스터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무슨 꿀 발라 놓은 거 마냥 거의 모든 디아블로2 유저들이 끝도 없이 반복해서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게 되는 메피스토야말로 이 게임 안에서, 아니 역사상 존재해온 모든 게임 안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임의 제목으로 알 수 있듯이 이 게임의 최종보스는 ‘디아블로’입니다. 그런데 디아블로에게는 소위 ‘대악마 삼형제’라 불리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메피스토, 바알, 디아블로가 바로 대악마 삼형제인데 이 중 디아블로가 막내이고 메피스토가 큰 형입니다. 제일 큰 형인데도 게임에서는 제일 허접인 악마가 메피스토인 것입니다.
메피스토는 디아블로2 유저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캐릭터입니다. 이 게임은 보통, 악몽, 지옥으로 구분된 세 단계의 난이도 중 가장 어려운 지옥 난이도의 주요 사냥터에서 무한 파밍을 하면서 좋은 아이템을 얻고 캐릭터를 육성하는 재미가 핵심인데, 처음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가 쪼렙으로 빌빌 거리면서 고인물 유저들에게 구걸하는 신세에서 본격적으로 ‘홀로 서기’를 하며 스스로 아이템을 획득해나가는 기점이 되는 것이 지옥 난이도의 메피스토를 혼자 사냥하는 시점부터입니다.
메피스토는 이 게임에서 투자한 시간과 노력 대비 보상이 가장 큰 몬스터입니다. 기본적으로 RPG 게임답게 특정 몬스터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몬스터가 있는 장소까지 도달하는 길찾기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메피스토는 굉장히 빠른 경로로 도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증오의 억류지’라는 던전의 3층에 있는데 마을에서 바로 갈 수 있는 웨이포인트가 2층에 있어서 딱 2층 던전만 길찾기를 해서 3층 계단을 찾아내면 바로 메피스토를 만날 수 있습니다. 증오의 억류지가 3막 최종 던전이니만큼 굉장히 넓고 복잡해서 2층 던전 한층만이라도 뚜벅이로 길찾기를 한다면 시간이 꽤 걸리지만, 이 게임에는 ‘순간이동’이라는 스킬이 있어서 그야말로 순식간에 3층 계단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즉 방을 만들고 증오의 억류지 2층으로 웨이포인트를 타고 가서 순간이동으로 지도 외곽지역을 시계방향으로 훑어가다 3층 계단을 발견하고는 바로 들어가서 메피스토를 죽이고 아이템 줍는 과정이 불과 1~2분 정도면 끝납니다. 그런데도 메피스토가 죽을 때 희귀와 고유 아이템이 많게는 4~5개씩 떨어지니 그야말로 엄청난 개꿀 파밍인 것이죠.
물론 아무리 보스몹 중에 허접이라도 맨땅에서 시작한 초보 유저가 지옥 난이도 메피스토를 혼자 잡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립니다. 처음에 디아블로를 시작하면 당연히 순간이동 스킬을 기본적으로 쓸 수 있는 원소술사를 선택하고(다른 직업은 순간이동을 쓰려면 구하기가 아주 어려운 고급 아이템이 필요합니다)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직접 노말, 악동 난이도를 하나하나 클리어해나가며 레벨을 올립니다. 레벨을 올린 후에는 지옥 난이도에서 사냥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아이템 세팅이라도 갖추기 위해서 다른 유저들에게 구걸을 합니다. 최상위 고인물들이 쓰는 장비는 구하기가 어렵지만 기본적인 서민 세팅은 구걸로 대부분 구할 수가 있는데 원소술사의 경우 이런 서민 세팅만으로도 지옥 난이도에서 어느 정도 솔로 파밍이 가능합니다. 통찰과 영혼을 얻으면 1막의 쉬운 사냥터 위주로 돌 수 있고 신오브, 샤코, 교복 정도 갖추면 바로 메피스토 사냥을 할 수 있습니다. 전부 구걸로 얻는 경우도 있지만 구걸이 잘 안 될 경우 1막의 타워에서 백작 노가다를 하면서 적당한 중급 룬을 얻으면 그걸로 메피 사냥이 가능한 기본적인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죠. 어쨌든 처음 게임을 시작할 경우 이 과정을 거쳐야 해서 조금 시간이 소모되지만 일단 메피사냥이 가능하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이 게임의 핵심 콘텐츠인 무한 노가다 파밍의 세계로 뛰어들게 됩니다.
바로 앞 문장에서 ‘무한 노가다 파밍’이 이 게임의 핵심 콘텐츠라고 했는데요. 사실 이런 노가다성에 대한 평가는 유저들에게 다분히 양면적인 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디아블로2는 저의 인생게임 1위라고 할 수 있는 게임인데, 사실 제가 디아블로2를 하면서 가장 큰 ‘재미’를 느꼈던 시기는 게임을 처음 시작한 후 노말 단계부터 스토리를 하나하나 깨나가는 단계였습니다. 사실 RPG 게임이니만큼 진정한 이 게임의 핵심 재미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스토리는 진행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2는 제가 어릴 때 나온 게임이고 당시에 집에서는 할 수가 없어서 친구들과 주로 PC방에서 즐겼는데요. 그때는 버스니 뭐니 하는 개념도 모를 때라서 정말 맨땅으로 직접 주은 아이템들 위주로 두르고 노말 난이도 단계를 엄청 고생하면서 진행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첫 발매 당시 가장 허접하기로 유명한 직업인 ‘아마존’을 선택했는데 2막 보스인 듀리엘을 정말 개고생을 하면서 잡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디아블로2 뿐 아니라 대부분의 게임들이 처음에 아무것도 모르고 맨땅에서 부딪히면서 즐길 때가 가장 재미있는 것 같아요. 게임을 만든 제작자들도 게임의 주요 재미 요소들을 맨땅 첫 플레이에서 가장 크게 효과가 발휘하도록 제작을 했을 겁니다. 디아블로 1편에서 부처(도살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압도적인 공포는 많은 RPG 게임 유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죠. 부처는 유저를 맞닥뜨리자마자 ‘Fresh Meat’(신선한 고기)라고 외치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드는데, 저는 어릴 때 영어를 잘 몰라서 이 놈이 ‘후레시 미트’라고 하길래 미트가 ‘만나다’는 의미의 meet인 줄 알고 ‘신선한 만남? 우리 편인가?’하고 멍하니 있다가 그냥 끔살당했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스토리를 처음 플레이할 때가 가장 재미있었던 게 디아블로인데, 이후 고렙이 되고 템을 어느 정도 갖춘 후 메피사냥 위주의 노가다 게임이 되면 이전에 스토리를 플레이할 때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게임이 되어버립니다. 보통 게임에서 노가다를 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인상이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게임에서 반복되는 노가다를 하면서 지루함과 현타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3의 경우 2편과 비교해서 반복 노가다의 ‘편의성’을 너무 추구하는 바람에 디아블로가 아니라 ‘수면블로’라는 혹평까지 듣는 게임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디아블로3도 꽤 재미있게 플레이하긴 했는데 최근에 레저렉션이 나와서 디아블로2를 다시 해보니 확실히 두 게임의 재미는 비교불가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쉽고 편한 성취는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너무 어려우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너무 편하고 간단하면 재미를 느낄 수가 없죠. 디아블로2는 노가다라는 반복 플레이의 과정을 설계하면서 굉장히 세심하게 밸런스를 맞춘 게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메피스토도 한번 사냥할 때마다 고작 1~2분의 시간이 소모될 뿐이지만 사실 이 과정이 마냥 편하지는 않고 숙련된 컨트롤이 필요하며 나름 조금의 긴장감도 존재합니다. 특히 2층에서 3층 계단을 길찾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 게임에서 가장 성가신 몬스터인 해골 잼민이를 꾸준히 만나게 되는데 이게 은근히 스릴 있어요. 디아블로2에서 메피스토가 유저들에게 가장 많이 학살당한 몬스터라면 반대로 유저를 가장 많이 학살한 몬스터는 3막의 잼민이입니다.(정식 명칭은 ‘우상족’인데 재미있게도 디아블로3에서는 몬스터가 아니라 유저의 직업 중 하나인 부두술사가 소환해서 함께 싸우는 동료로 등장합니다.) 이 잼민이들은 작은 체구라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꺅꺅거리며 유저에게 달라붙어서 어라 하는 순간에 ‘푹 찍’당하는 경우가 굉장히 흔하게 발생합니다.
디아블로2 유저들이 거의 무의식에 가깝게 메피스토 사냥을 반복하는 과정은 뭐랄까... 반복 노가다 게임의 유저들이 빠져들 수 있는 흥미로운 무아지경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아지경은 절묘한 밸런스의 상태입니다. 디아블로3처럼 결코 수면블로가 되지는 않습니다. ‘3층 계단을 찾아서 메피스토를 잡는다’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고 그곳에 오롯이 정신이 집중되어 있어요. 거의 무아지경의 상태이지만 뚜렷한 목표와 딱 필요한 만큼 유지되어야 하는 긴장감이 유저가 게임을 플레이하는 ‘재미’라는 감정을 결코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물론 좋은 보상을 얻었을 때의 기쁨도 핵심일 테고요.
스타워즈 시리즈에서 아나킨 스카이워커(다스베이더)를 포스의 균형을 가져올 자라고 칭하는데 디아블로2의 메피스토는 ‘게임 노가다의 균형을 가져온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아블로2가 결국 반복 노가다 게임으로서의 정체성을 굳히게 되었음에도 많은 게이머들이 현타와 수면의 늪으로 빠지지 않고 오랜 세월 몰입해서 즐길 수 있는 절묘한 밸런스를 맞추는 데 메피스토의 공이 매우 컸다고 생각합니다.
블리자드는 현재 디아블로의 4편을 제작 중입니다. 디아블로3도 흥행으로는 성공한 게임이기는 하지만 수면블로라는 오명도 얻었고 확실히 2편보다는 훨씬 못한 게임이었는데, 4편이 진정으로 2편의 계보를 이어가는 명작 RPG 노가다 게임으로 나와 게이머들에게 큰 만족을 줄 수 있을지 많은 기대와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1편의 도살자가 3편에서 재활용되어 1막 보스로 나온 것처럼, 2편의 메피스토도 4편에서 재활용되어 여전히 유저들에게 학살당하는 역할로 다시 등장한다면 아주 반가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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