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이란 복잡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삶에서 특정한 행동이나 선택을 하는데, 행복이라는 감정의 실체와 거기까지 도달하는 과정의 메커니즘은 결코 단순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의 성향에 따라 차이도 크고요. 예를 들어 ‘왜 공포영화를 보는가?’ 라는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끔찍한 내용과 장면들을 접하면서 재미와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것을 어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공포영화는 가장 대중적인 영화 장르 중의 하나이고, 취미로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들도 결코 별종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발암 영화’라고 분류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대놓고 ‘보면 암에 걸린다’(발암)라는, 결코 우리 인생의 행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화라는 명칭을 붙여놓고는, 그 ‘암에 걸리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이런 영화들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죠. 무언가에 ‘화가 난다’는 감정은 일반적으로 정신 건강에는 해로운 것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의 감정 역시 그 실체는 매우 복잡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화 그 자체가 아니라 화를 억누르는 것이 해로운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격렬한 분노로 열을 올린 후에 우리 감정이 정화(카타르시스)되기도 한다고요.
심리학이나 정신 분석 전문가가 아니라서 이런 이야기들은 참 어렵고 복잡합니다. 분명한 것은 정말 보는 사람들을 엄청 열받게 만드는 ‘발암’ 내용을 담은 영화나 대중문화 콘텐츠들이 많다는 것과, 그런 작품들을 보면서 강한 분노와 자극을 즐기려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런 작품들을 많이 봤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본 것도 아니고 굳이 ‘보면 암 걸리는 영화들’을 찾아가면서 봤어요. 참 여러 편을 봤고, 모든 작품들이 각각의 개성이 있습니다. 희한하게도 모두 암을 유발하는 내용의 영화들인데도 어떤 작품은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싶어지고 어떤 영화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기도 합니다. 제가 이 영화들에 추천 순위를 매긴다면 여러 번 다시 보고 싶은 영화에 높은 순위를 매길까요, 아니면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에 높은 순위를 매길까요? 다시 보고 싶지 않다는 건 그 영화에 대한 호평일까요, 혹평일까요? 이건 저조차도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 포스팅의 순위는 제 주관적인 기준으로 매긴 것이긴 하지만 스스로도 그 주관에 어떤 기준이 작용한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네요. 단순히 ‘화가 났다’라기 보다는 뭔가 가장 크게 제 감정을 흔들었던 영화들에 높은 점수를 준 것 같습니다. 물론 단지 그 기준뿐인 건 아니고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나 그밖에 제가 마음에 들었던 다양한 요소들도 평가해서 순위를 매겼습니다.
20위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 (The Strangers, 2008)
내 집(혹은 별장)에서 낯선 자들의 침입을 당하는 내용은 발암 영화의 가장 흔한 플롯 중 하나입니다. 발암 영화 뿐 아니라 호러, 스릴러, 액션, 코믹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정형화된 플롯이죠. 이런 플롯이 발암 전개로 흐른다면 대개는 침입자들의 악랄함 보다는 주인공 일행의 멍청함이 부각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이없고 황당한 전개, 개연성 없이 너무 쉽게 당한다, 악당들이 그다지 치밀하지도 않은데 너무 일이 잘 풀린다 등등...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은 정체불명의 3인조 침입자에게 해를 당하는 한 젊은 커플의 이야기입니다. 완성도가 아주 훌륭하지는 않지만 이런 비슷한 장르에서 비교적 초창기에 나온 영화라서 나름 명성도 있고 마니아들도 있습니다. 속편도 나왔고요. 발암 영화로서는 딱 기본적인 수준입니다. 아주 정석적인 플롯과 전개로 만들어졌고 주인공들의 답답한 행동들과 침입자들의 이유 없는 공격에 적당히 짜증이 나고 애가 탑니다. 하지만 엄청 감정적으로 뒤흔드는 수준의 분노까지 유발되는 영화는 아닙니다.
19위 컴플라이언스 (Compliance, 2012)
한 통의 장난전화로 인해 패스트푸드 점에서 일하는 한 여자 알바생이 큰 봉변을 겪게 되는 내용의 발암 영화입니다. 정말 황당하고 어이없는 내용인데 놀랍게도 이 내용은 실화입니다. 앞 순위에 소개한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 역시 실화 기반 내용이고요. 참 세상이 요지경입니다. 어떤 허구의 상상력도 현실의 기이함과 괴상함을 결코 이길 수 없죠. 패스트푸드 매장에 전화를 건 장난전화 범인은 스스로를 경찰이라고 사칭한 후 매장에서 일하는 10대 알바생을 손님의 돈을 훔친 범죄자로 지목하고 매장의 여자 부매니저에게 알바생을 알몸 수색하라고 지시합니다. 부매니저가 이 지시를 따르자 범인은 더욱 심하고 노골적인 지시들을 계속 내리고... 알바생은 몇 시간을 사실상 감금된 상태로 고통받다가 장난전화라는 사실이 드러나 겨우 해방됩니다. 영화 내용이 참 어이없고 화도 나지만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경찰’이나 ‘검사’같은 권위의 사칭이 평범한 소시민에게는 굉장히 잘 먹히는 수법이라는 걸 알고 있을 것입니다. 장난전화나 보이스피싱을 하는 범죄자도 나쁘지만 이런 전화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경각심과 침착한 판단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18위 다우트 (Doubt, 2008)
할리우드의 대배우 메릴 스트립과 2014년에 사망한 명배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최고의 연기 대결을 볼 수 있는 명작 영화입니다. 거기에 에이미 아담스까지 가세해서 세 배우의 연기 대결을 보는 재미가 일품이지만 영화의 내용 자체는 꽤나 답답한 발암 전개입니다. 의심과 거짓말, 험담이 이 영화가 다루는 핵심 주제인데 보통 사람들도 실생활에서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일들이라 더욱 공감을 하면서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근거 없는 루머에 의해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에 대한 네티즌들의 마녀사냥 행태에 대해서 강하게 경종을 주는 내용입니다. 메릴 스트립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도 느낀 거지만 이런 밉상 발암 캐릭터의 연기도 정말 잘하는 것 같아요. 최근에 나온 ‘돈 룩 업’에서도 최고의 밉상 캐릭터를 보여주었죠.
17위 뎀 (Ils, 2006)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과 거의 유사한 내용의 침입 스릴러 발암 영화입니다. 거의 비슷한 내용인데 발암도는 이 영화가 좀 더 셉니다.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이 너무 허무하게 일방적으로 털리는(?) 전개라서 좀 시시한 반면 ‘뎀’은 뭔가 상황이 잘 풀리는 듯 하다가 반전으로 다시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종의 롤러코스터 식의 전개를 보여줘서 감정이 더욱 요동치게 됩니다. 특히 범인의 실체를 끝까지 감추는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과는 달리 ‘뎀’에서는 범인의 실체가 대략적으로 드러나는데요. 이 범인의 실체도 은근히 사람 빡치게 만듭니다. 심지어 이것도 실화라고 하니 뭐... 하여간 정말 요지경 세상이에요.
16위 도그빌 (Dogville, 2003)
도그빌은 발암 영화로도 유명하지만 영화 자체도 상당한 걸작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라스 폰 트리에라는 거장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이고 할리우드 톱 여배우 니콜 키드먼의 대표작이기도 하죠. 도그빌이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 그레이스 라는 이름의 미모의 젊은 여성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서 오게 되는데, 처음에는 그레이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잘 대해주던 마을 사람들이 차츰 그레이스의 정체를 의심하며 적대감을 가지다가 결국 노예처럼 학대하고 괴롭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심한 괴롭힘이 많이 벌어지고 영화의 중반까지 발암도가 엄청 높아지는데, 이 순위에서 16위라는 낮은 순위를 매긴 이유는 결말 때문입니다. 꽤 놀라운 반전 스포일러라서 자세한 내용은 말할 수 없지만 결말 덕분에 발암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됩니다.
15위 어톤먼트 (Atonement, 2007)
아역 시절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어톤먼트의 ‘브리오니’는 영화 속 유명한 발암 캐릭터 중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엄청난 밉상 캐릭터를 연기했음에도 시얼샤 로넌은 이 영화로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현재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젊은 여배우 중 하나로 성장했죠. 이 영화로 시얼샤 로넌이 주목받은 것은 그만큼 브리오니가 단순한 밉상 발암 캐릭터가 아니라 굉장히 입체적이고 흥미로운 캐릭터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얼샤 로넌의 브리오니 외에도 주노 템플과 베네딕트 컴버배치(셜록으로 인기 배우가 되기 전)가 또 다른 발암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모두 제가 호감을 가진 배우들인데 이런 배우들이 하나같이 발암 캐릭터를 연기해서 그 자체로 저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영화였습니다.
14위 마더! (Mother!, 2017)
포털 사이트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아주 인상적인 네티즌 한 줄 비평을 읽었습니다. “제니퍼 로렌스 몸에서 사리 나오는 영화” 정말 딱 그대로입니다. 거장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 ‘마더!’는 엄청 철학적인 메타포로 가득 채워진 난해한 영화이지만 그냥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 일차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여주인공 제니퍼 로렌스가 당하는 ‘끝도 없는 수난’입니다. 몸에서 사리가 나온다는 것도 그냥 비유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물론 ‘사리’가 아니긴 하지만 그냥 사리라고 생각하는 게 쉽게 납득이 되는 장면이긴 해요. 영화 속 캐릭터의 상황에 몰입이 잘 되는 사람이라면 본인도 몸에 사리가 생기는 걸 느낄 만큼 발암도가 아주 센 영화입니다. 멀쩡한 정신으로 보고 있기가 좀 힘들어요.
13위 디트로이트 (Detroit, 2017)
캐스린 비글로는 여성 감독인데도 거친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의 연출이 일품인 감독입니다. 그저 ‘일품’ 정도가 아니라 현존 감독 중에서 최고 수준이에요. 그가 만든 2017년작 ‘디트로이트’는 1967년 디트로이트 폭동 당시에 벌어진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살인 사건을 다룬 실화 바탕의 영화입니다. 미국에서 자주 벌어지고 여러번 큰 논란으로 번졌던 ‘백인 경찰이 무고한 흑인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이에요. 실화 바탕이기도 하고 배우들의 명연기와 캐스린 비글로 감독의 사실감 넘치는 연출이 더해져 매우 부당한 공권력의 폭력이 벌어지는 상황을 극한의 긴장감으로 생생하게 묘사해서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윌 폴터는 정말 얼굴만 봐도 ‘밉상 캐릭터’의 본좌 배우라는 느낌입니다. 아역 시절부터 ‘나니아 연대기: 새벽출정호의 항해’에서 밉상 꼬맹이 유스터스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더니 디트로이트에서도 최고의 밉상 비호감 캐릭터를 완벽하게 보여주었습니다.
12위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우리가 보통 아이들은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정말 악마나 다름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아이들입니다. 발암 영화 중에서도 어린이가 맹활약(?)하는 영화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케빈에 대하여’에 나오는 케빈은 보통의 어린이가 아니라 사이코패스라서 더욱 심각한 케이스고요. 케빈은 어린 아기 때부터 시작해서 에즈라 밀러가 연기하는 청소년 시기가 될 때까지 영화에서 참 다양한 발암 행각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를 보면 아이 키우는 게 참 무섭다는 생각도 들게 되는데 저출산의 늪에 허덕이는 대한민국에서는 가히 권장할만한 영화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굉장한 걸작입니다.
11위 체인질링 (Changeling, 2008)
이 순위에 포함된 스무 편의 영화 중에서 제가 극장에서 본 영화는 딱 두 편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체인질링’입니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내용이라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한 엄마의 노력을 담은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발암 내용에 경악을 했습니다. 실종사건을 해결하지 못해 시민의 질타를 받던 경찰이 상황을 타게 하기 위해 어디서 전혀 엉뚱한 아이를 데려와서는 실종된 아이를 찾았다고 하면서 사건을 해결했다고 해버립니다. 당연히 엄마는 경찰이 찾았다는 아이가 자기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에 항의하지만 결과는 ‘자기 아들을 못 알아보다니 이 엄마는 미쳤군’하면서 정신병원 감금... 이 어이없는 내용이 실화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라는 걸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면서 거의 멘붕을 해버렸습니다. 하지만 굉장히 재미있고 잘 만든 영화입니다. 거장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도 좋고 안젤리나 졸리의 연기도 정말 훌륭했습니다.
10위 미스틱 리버 (Mystic River, 2003)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이 영화를 봤다면 충격이 어마어마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영화를 굉장히 늦게 봤습니다. 사실 너무 유명한 걸작 영화들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보지 않았는데 본 것처럼 생각되는 영화들’이죠. 저도 이 영화를 안 본 상태에서도 워낙 유명한 영화이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듣게 되는 얘기나 정보들로 대충 영화 내용은 알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각 잡고 드디어 영화를 봤는데, 다 아는 내용인데도 꽤 충격적이긴 하더라고요. 내용도 충격적이고, 숀 펜, 케빈 베이컨, 팀 로빈슨 같은 명배우들의 연기가 정말 무시무시하더군요. 그야말로 발암, 멘붕 영화로는 빼먹을 수 없는 최고의 걸작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9위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Martyrs, 2008)
2005년에 일라이 로스의 호스텔 1편이 나오고, 2007년에 호스텔 2편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2008년에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이 나왔죠. 그리고 이런 영화들을 통칭하는 표현으로 ‘고문 포르노’라는 단어가 등장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 표현이 너무 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이런 종류의 영화들을 어떤 마음으로 감상해야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은 저에게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입니다. 보고 있기가 너무 괴로워요. 발암도도 높은 편인데, 영화 자체가 너무 암울하고 고통스럽죠. 이 순위에 포함된 대부분의 영화들이 발암 영화이면서도 나름 대중적인 재미를 갖추고 있는데, ‘마터스: 천국을 보는 눈’ 정도라면 명백히 대중성과는 아주 거리가 먼, 아주 마니악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발암 영화를 챙겨 본다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8위 도가니 (2011)
생생한 날것의 표현으로 감정을 뒤흔드는 영화를 상당히 잘 만드는 나라가 바로 한국입니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나 신파 영화, 그리고 발암 영화까지 모두 한국 영화가 잘하는 분야입니다. 이 순위에도 상위권 발암 영화에 한국 영화가 두 편 있고, 그 중 하나가 2011년에 나온 황동혁 감독의 영화 ‘도가니’입니다. 황동혁 감독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보여줬듯이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능한 감독입니다. 앞 순위에서 소개한 체인질링과 함께 도가니도 제가 극장에서 본 영화인데, 영화를 보다가 다소 지칠 정도로 감정이 심하게 요동치는 경험을 했습니다. 울컥울컥하다가 진짜 암 걸릴 것 같은 기분. 특히 장광이 연기한 악당 캐릭터가 정말 굉장합니다. 한국 영화 사상 역대급 발암 캐릭터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인간말종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영화로 인해 장광이라는 배우의 이미지 자체가 사악한 권력자의 캐릭터로 굳어져 버렸죠.
7위 어둠 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0)
발암 영화인데도 굉장히 특이하게 뮤지컬 장르인 영화입니다. 뮤지컬 장르에서도 다양한 내용과 감정을 다룰 수 있지만 사실 유명한 인기 뮤지컬 영화들은 대부분 밝고 희망찬 내용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암울한 내용을 뮤지컬로 본다는 게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사실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만 봐도 이렇게 멘붕 발암 영화일 거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뭔가 엄청 감동적인 휴먼 드라마 같은 느낌이잖아요. 그런데 영화의 실상은... 주인공의 처지가 너무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결말도 정말 멘붕이죠. 너무 화가 나고 암울한 내용이지만, 그래도 영화가 워낙 명작이라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비요크의 연기도 너무 훌륭했고요.
6위 아메리칸 크라임 (An American Crime, 2007)
1965년에 있었던 ‘실비아 리킨스 살인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사건은 천인공노할 범죄인 아동학대 살인 사건입니다. 물론 피해자인 실비아는 16세로 아주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어른의 돌봄을 받아야 할 미성년자인 건 틀림없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혈연도 아닌데, 실비아의 부모가 여러 지역을 돌아다녀야 하는 직업이라 아는 사이였던 가해자의 집에 양육비를 지불하고 자녀를 맡겨둔 것이었죠. 그런데 부모로부터 양육비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것을 계기로 실비아에 대한 학대가 시작되었고, 몇 달 동안 차마 말하기도 힘든 끔찍한 행위들이 자행됩니다. 그런 끔찍한 학대의 끝에 실비아는 결국 어린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이런 내용의 영화인지라 보고 있기가 굉장히 괴롭고, 발암도가 엄청납니다. 가해자 역의 캐서린 키너도, 피해자 역의 엘렌 페이지(지금은 성전환을 하고 이름을 엘리엇 페이지로 바꿨죠)도 영화를 찍을 때 아주 고생을 했을 것 같습니다.
5위 한공주 (2013)
이수진 감독의 2013년 작품 ‘한공주’는 2004년에 있었던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소재로 만든 영화입니다. 실제 사건을 그대로 영화화한 건 아니고, 배경 지역이나 이름 등은 모두 바꿨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도 사건 당시가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뒤의 상황을 다룹니다. 다만 끔찍한 사건의 실상은 과거 장면으로 간간이 등장하는데, 역시 보고 있기가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2차 가해(인터넷에 유포된 영상, 합의를 요구하는 가해자 부모의 겁박 등)도 너무나도 끔찍합니다. 어느 정도 대중적인 작법으로 만들어진 도가니와는 달리 아트하우스 독립영화로 만들어진 작품이기에 더욱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는 어려운 영화입니다. 한공주 역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준 천우희가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런 작은 영화에 유명하지 않은 제가 큰 상을 받았다’는 수상 소감이 화제가 되었죠.
4위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 2007)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발암 영화이기도 하지만,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남성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영화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지금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고, 평범한 남성 누구에게든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전철에서 치한으로 누명을 쓴 한 남성이 누명을 벗고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법정 싸움을 벌이는 내용입니다. 내용 자체는 상당한 발암 전개인데 의외로 영화의 분위기는 그다지 암울하지도 않고 살짝 희망적인 가능성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인공을 도와주는 사람도 많고 뭔가 잘 풀리는 것 같은 상황들도 나오거든요. 하지만 결말은... 얄짤없죠. 영화를 보면서 물론 어이없고 화도 날 테지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내가 저런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고민도 당연히 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의 엔딩에 나온 주인공의 독백이 특히 저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진실은 오직 신만이 알고 있다, 라고 말한 판사가 있다고 한다. 그건 틀린 말이다. 적어도 단 한 명, 나 자신은 내가 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알고 있다.” 나는 하지 않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이 나뿐일 때, 그리고 진실을 모르는 판사가 나를 유죄라고 판결할 때 그 절망과 분노는 말도 못 할 것입니다. 그저 이런 일이 나에게 벌어지지 않기를, 천재지변을 피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도 없습니다.
3위 더 헌트 (Jagten, 2012)
발암영화 중에서 어린이들이 활약(?)하는 영화들이 많다고 앞에서 언급했는데요. ‘더 헌트’에서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은 어린 소녀 ‘클라라’는 이런 발암 어린이들 중에서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라는 나이가 너무 어려서 아는 것도 없고 순진하기 때문에 더욱 답도 없는 존재입니다. ‘더 헌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어린이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선입견이 많이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뻔히 알 수 있는데, 왜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는 거짓말을 안 한다’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어린이뿐 아니죠.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은 잘못된 것이지만, 거짓말에 속아서 누군가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제나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일에는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말고 중립기어를 박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헌트’에서 클라라의 거짓말로 수난을 당하는 루카스와 그를 비난하고 따돌리고 공격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요즘 시대에 우리가 인터넷 세상에서 보게 되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입니다. ‘더 헌트’는 발암 영화이면서도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훌륭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위 퍼니 게임 (Funny Games, 1997)
이쯤 되면 싸우자는 거지요? 미카엘 하네케라는 거장 감독이 대놓고 관객에게 싸우자고 시비거는 영화, ‘퍼니 게임’입니다. 기본적으로 침입자 플롯의 영화인데, 20세기에 나온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범함은 21세기에 나온 이 장르의 어떤 영화도 따라갈 수 없는 수준입니다. 발암 영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며, 말 그대로 이 장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퍼니 게임을 보지 않고는 아예 발암 영화를 논할 수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예요.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전개. 압도적인 무력감. 보는 사람의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로운 영화입니다. 반대로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 영화를 아주 즐겁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미카엘 하네케 감독 본인이 똑같은 내용으로 국적만 바꿔서 리메이크 영화까지 만들었죠. 사실상 같은 영화를 두 번 만든 셈입니다. 같은 감독이 만든 같은 내용의 영화라서 리메이크 판은 볼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많지만, 나오미 왓츠나 팀 로스 같은 우리에게 익숙한 유명 배우들이 나오기 때문에 원작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색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저도 발암 영화로서 퍼니 게임의 진수를 제대로 만끽하려면 원작과 리메이크 모두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1위 이든 레이크 (Eden Lake, 2008)
발암 영화의 대명사인 퍼니 게임을 꺾고 발암 영화 1위를 차지한 영화는(저의 주관적인 순위이지만) 2008년에 나온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영화 이든 레이크입니다. 방금 안 사실인데 이런 엄청난 영화가 놀랍게도 나무위키에 문서조차 없습니다.(포스팅 작성 시점 기준) 이 영화가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유명하지 않은 걸까요? 확실히 감독이나 출연배우들도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마이클 패스밴더는 2009년에 나온 쿠엔틴 타란티노의 ‘바스터즈: 거진 녀석들’ 이후로 본격적인 유명세를 얻었고 이든 레이크가 개봉할 당시에는 무명 배우였었죠. 아무튼 이 영화는 참... 발암 영화의 완전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을 빡치게 만드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습니다. 우선 싸가지 없는 꼬맹이들이 잔뜩 나오고... 불친절하고 비협조적인 마을 사람들, 부당하고 잔인한 폭력, 모든 상황을 꼬이게 만드는 말도 안 되는 불운의 연속.... 거기에 결말까지 갓-벽 합니다. 특히 결말! 결말이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듭니다. 발암 영화의 모든 것, 발암 영화의 완전체. 그것이 바로 이 영화, ‘이든 레이크’입니다.
이상으로 저의 주관적인 감상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긴 스무 편의 발암영화들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포스팅을 쓰면서 느낀 점은, 사람을 화나게 하는 영화라고 해서 나쁜 영화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순위의 영화 대부분이 상당히 훌륭한 영화들입니다. 걸작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한 영화도 있고요. 하지만 역시 정신 건강에는 별로 좋지 않으니, 적극적으로 권장할만한 영화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적당한 ‘화’로 마음을 정화하거나(그런 게 실제로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멘탈을 단련하려는 목적이라면 이 영화들이 (아마도)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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