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락’ 드웨인 존슨은 히어로 장르의 치트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역할이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히어로의 이미지에 딱 부합하니까요. 드웨인 존슨이 2000년대 초반부터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서야 그가 블랙 아담이라는 캐릭터로 히어로 장르에 등장한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사실 2000년대 초반에 히어로 장르를 상업영화의 대세 장르로 끌어올리기 시작한 건 완전무결한 강인함을 보여주는 무적 기믹의 히어로가 아니라 스파이더맨, 엑스맨처럼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서사와 기믹을 가진 캐릭터들이었죠. 뭔가 순서가 뒤바뀐 느낌인데 반듯한 정석 히어로의 표본인 ‘캡틴 아메리카’의 첫 번째 영화(퍼스트 어벤져)가 나왔을 때도 괴짜 투성이인 히어로 판에서 모범적인 성품의 히어로는 오히려 이레귤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드웨인 존슨의 ‘블랙 아담’은 너무도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는 ‘졸라 짱센’ 기믹을 들고 나왔고 이런 뻔한 정공법이 이제는 히어로 장르를 구원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로까지 느껴지는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 이건 그냥 순서가 뒤바뀐 거예요. 맨 앞에 선두주자로 등장했어야 할 캐릭터들을 뒤늦게 비장의 카드로 내놓는 것은 전혀 최적의 활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캡틴 아메리카는 너무 늦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블랙 아담은 명백히 너무 늦게 등장한 치트키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드웨인 존슨이라는 무적 기믹의 액션 배우를 히어로 장르에 등판시켰다는 사실 자체는 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의 대사에서도 나오듯이 구린 계획이 무계획보다는 낫다는 거죠.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이미 늦은 거지만 그래도 손 놓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드웨인 존슨이라는 치트키는 어쨌든 쓰긴 써야 합니다. 블랙 아담은 현재 흥행 전망도 좋지 않고 평가도 어중간합니다. 개별 작품으로서는 ‘실패’라는 성적표를 받아 들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DCEU라는 세계관, 나아가서는 히어로 영화라는 장르 전체로 봤을 때는 액션 배우로서 최강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드웨인 존슨이 졸라 짱쎈 히어로 캐릭터로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 자체는 아주 긍정적이고 상징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블랙 아담은 못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블랙 아담이라는 캐릭터의 강력한 전투력을 엄청난 임팩트로 잘 표현했고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히어로 4인방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벤져스’나 ‘저스티스 리그’같이 제대로 각 잡고 만든 팀업 무비는 아니지만(표면적으로는 블랙 아담의 단독 영화니까요) 거의 그런 영화들에 준할 만큼 히어로 팀업 무비로서의 재미를 보여주었습니다. 빌런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원시원한 액션으로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채우며 영화 티켓값만큼의 재미는 충분히 느끼게 해 주었어요.
그냥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늦게 나왔다는 사실 그 자체입니다.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캐릭터들도 사실 굉장히 오래된 캐릭터들입니다. 호크맨이나 닥터 페이트 등 거의 히어로 장르의 원로라고 볼수 있는 캐릭터들인데 이미 MCU로 엄청나게 인지도를 높인 팔콘, 닥터 스트레인지, 앤트맨 같은 캐릭터들과 컨셉이나 능력이 비슷하다 보니 뒤늦게 영화로 등장한 원로들이 되려 짝퉁 아류처럼 보이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마블과 DC에 비슷한 능력의 캐릭터가 많다는 것은 이제는 많이 알려져 있고 단순히 영화에 등장한 시점을 기준으로 성급하게 원조를 판단하는 히어로 영화 팬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래도 어디서 본 것 같고 식상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호크맨이 외형은 팔콘과 비슷해도 능력이나 전투력 면에서는 차원이 다른 퍼포먼스를 보여준 것이나 피어스 브로스넌의 훌륭한 연기력과 캐릭터 표현으로 이 영화뿐 아니라 DCEU 전체를 통틀어서도 최고 수준의 매력과 활약을 보여준 닥터 페이트라는 캐릭터의 임팩트를 감안하더라도 말이죠.
주인공 블랙 아담이 무지막지한 전투력으로 보여주는 시원시원한 액션씬들 또한 히어로 장르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완벽에 가깝게 충족시켜줍니다. ‘완벽’이 아니라 ‘완벽에 가깝게’라고 말한 것은 빌런들이 너무 맹탕이라 접수가 시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무려 사탄의 챔피언까지 등장했는데 생각보다 시시하게 결판이 나버렸죠.
아무튼 저스티스 소사이어티의 인상 깊은 활약이나 블랙 아담의 시원시원한 액션 등 분명히 히어로 블록버스터로서 거의 정공법이라고 할 수 있는 장점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영화이지만 지난 20년의 세월 동안 너무 많고 다양한 히어로 영화들에 찌들어버린 관객들의 의식에 이 영화가 보여주는 정공법의 임팩트는 온전하게 와닿지는 못합니다. 졸라 짱 세고 강렬한 것이 눈으로는 보이는데 심장의 감흥으로까지는 도달하지 못하는 거죠.
한 10년만 일찍 나왔더라면... 아니면 아쿠아맨이 월드와이드 11억 불 흥행을 찍으며 DC의 분위기가 한창 좋았던 시기에 나왔더라면... 아니면 최소한 샤잠보다 먼저 나왔더라면...
모두가 아는 대로 지금 DCEU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죠. 너무 중요한 차기작들인 ‘더 플래시’와 ‘아쿠아맨과 로스트 킹덤’이 배우 문제로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고 평가나 흥행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더 배트맨’ 또한 세계관 내에서 뭔가 미묘한 위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늦게 등장한 드웨인 존슨이라는 치트키가 드라마틱한 구세주 역할을 하기는 역부족일 거라는 건 모두가 예상했습니다. 영화 블랙 아담은 흥행과 평가에서 좋지 않은 성적표를 받아 들게 되었고 이로 인해 DC의 침체된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블랙 아담이 향후 DCEU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는 씨앗을 뿌려준 역할은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존 최고의 액션 배우인 드웨인 존슨이 연기하는 강력한 히어로 ‘블랙 아담’을 이 세계관에 등장시켰다는 자체가 최고의 진전이고 저스티스 소사이어티 역시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신고식을 치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쿠키 영상에서는 무려 헨리 카빌의 슈퍼맨이 등장했죠. 이 장면은 사실상 워너의 새 경영진이 현재 난장판이 되어버린 DCEU의 세계관을 다시 제대로 된 구심점을 만들고 온전한 형태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선언처럼 보였습니다.
난잡하고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도 DC의 영화들은 매년 꾸준히 나왔고 그동안 매력적인 재료들은 충분히 쌓였습니다. 워너-DC는 다시 이 세계관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고 블랙 아담을 통해 어느 정도 방향성과 의욕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블랙 아담이 뿌린 씨앗으로 인해 이제 다시 DC의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제 안에 싹텄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으로 또 그 말을(이제는 거의 절규가 되고 있는) 외치겠습니다. DC 붐은 온다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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