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원래 2021년에 개봉할 예정이었던 영화입니다. 2021년 칸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으니 정상대로라면 2021년 여름에 개봉했을 겁니다. 그런데 개봉이 계속 밀리고 결국 해를 넘겨서 칸 영화제 첫 공개 후 1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개봉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비상선언의 개봉 연기와 관련해서 블로그 포스팅도 썼었고, 꾸준히 한국 영화 최고 기대작 중 하나라고 여러 포스팅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영화가 개봉 후 평가가 엄청 안 좋은데도 무조건 보고 와서 리뷰 포스팅은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이 안 좋기는 하지만 초중반까지는 괜찮다는 반응이었고 소재와 내용은 확실히 제 취향이었으니 그다지 돈 아까울 거라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이 글에는 영화 ‘비상선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보고 온 감상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예상보다는 양호’입니다. 일단 초반과 중반까지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정말 딱 제 취향인 스타일로 만들어졌고 이 정도 완성도로 마지막까지 유지가 된다면 올해 본 영화 중 TOP 5 안에는 들겠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소문 자자한 종반은 역시 최악이었는데,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던 터라 내상(?)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극장이 아니라 집에서 컴퓨터 모니터로 보고 있었다면 종반부는 내내 휴대폰이나 들여다보고 있었을 거 같네요. 사실 극장에서도 계속 손이 휴대폰으로 가려고 근질근질했습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휴대폰 액정 불빛을 밝히는 민폐 짓을 할 수는 없으니 간신히 참았어요.
‘예상보다는 양호’라고 했는데, 초중반까지는 기대 이상이고 종반은 혹평 리뷰를 보고 딱 각오했던 수준 정도라서 종합하면 예상보다는 좋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중반까지 전개에서 기대를 뛰어넘었던 부분은 비행기에서 진행되는 재난의 과정과 지상에서 송강호 시점으로 밝혀지는 재난의 진상이 투 트랙으로 매우 잘 설계되었다는 점입니다. 저는 사실 작년부터 이 영화의 스틸컷이나 예고편을 볼 때 비행기 재난 영화인데 송강호 같은 주연급 배우가 비행기도 아닌 지상에서 뭔 뻘짓(?)을 하고 있는 건지 내내 궁금했거든요. 뭔가 지상 쪽 스토리는 쓸데없는 사족이거나 무리수 전개일 거 같아서 신경이 쓰였습니다. 물론 종반에서는 확실히 그렇게 되지만 중반까지는 송강호가 이끄는 지상 쪽 스토리가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특히 저는 이런 재난 영화에서 처음에는 그저 평범하고 탈 없는 일상이 시작되다가 요상한 조짐이 감지되고 점점 일상이 깨지는 상황들이 벌어지며 위기를 고조시키는 전개를 너무 좋아하거든요. 뭐 대부분의 영화 플롯들이 다 그런 거 아니냐 하겠지만, 이렇게 자연스럽게 흐름을 타면서 서서히 일상이 비일상으로 바뀌는 빌드업으로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전개를 잘 연출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이 영화처럼 비행기와 지상의 상황을 투 트랙으로 전개시키는 건 더욱 난이도가 높고요.
비행기의 상황 전개도 초반에 공항에서부터 작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들로 분위기를 잘 다져놓고 재난이 본격화되는 상황으로 빌드업을 잘 이끌어 갑니다. 지상을 송강호가 캐리했다면 비행기는 역시 테러범 역의 임시완이 훌륭하게 이끌어 갔습니다. 형사와 테러범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입장의 두 캐릭터가 투 트랙으로 나눠진 빌드업을 마치 비행기의 양 날개 엔진 동력처럼 완벽한 호흡으로 각각 이끌어가는 플롯 구조가 굉장히 완성도가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잘 설계된 플롯 구조가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 영화의 완성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려 줍니다. 이 영화의 초중반 빌드업은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최상급의 수준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투 트랙을 이끄는 한 축이었던 임시완이 너무 빨리 퇴장하면서 영화의 플롯 구조가 삐걱거리게 됩니다. 물론 테러범이 빨리 제압당하고 사망하기까지 한 것은 전개 자체로만 봤을 때 아주 나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러범이 퇴장한 후 비행기 쪽의 새로운 국면 전개를 더욱 흥미롭게 풀어나갈 아이디어가 준비되어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선택이죠. 그런데 이 영화는 바로 그 부분에서 실패한 거고요.
그래도 종반에 이르기 직전까지는 지상에서 그나마 송강호가 동력을 유지한 채 이럭저럭 영화를 이끌어가긴 합니다. 전도연은 송강호에 비해 비중은 적었지만 그래도 적절히 보조를 맞춰주며 제 역할을 해내고요.
하지만 비행기 쪽 상황은 점점 지루해지고 지상에서 송강호의 동력도 꺼져가는데 영화는 새롭게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연료를 전혀 공급해주지 못합니다. 종반부 하이라이트를 이끌어갈 새로운 전개가 필요한데 영화는 여기서 너무 나쁜 선택을 해버리죠. 연료가 떨어져 가는 비행기에 공중 급유를 하면서 항공유가 아니라 올리브유를 주입해버린 꼴입니다.
하와이에서 미국이 착륙 불가 통보를 해서 회항하게 되는 전개까지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저 비행기가 돌아오는 여정 자체가 어마어마한 위기가 되는 거고, 항공 재난 영화에서 이런 상항의 위기를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는 사실 뻔한 정답이 존재하죠.
전혀 분위기가 다르긴 하지만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해피 플라이트’라는 영화에 이것과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해피 플라이트’에서는 테러가 아니라 이륙 시 발생한 버드 스트라이크로 인해 나중에 기체 이상이 발생하면서 하와이로 가던 도중 회항하게 되는 전개인데요. 기체에 이상이 생기고 공항에는 태풍이 불며 연료는 아슬아슬하고 기장은 손목 부상까지 당한 상황에서 뭔가 믿음직스럽지 못한 부기장이 비바람 몰아치는 공항으로 아주 위험한 각도로 착륙해야 하는 비상 상황을 정말 흥미진진한 전개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비행기 안과 지상의 여러 전문가들이 프로페셔널한 능력과 지식을 발휘해서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결국 무사 착륙이라는 엔딩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그냥 뻔한 재난 영화 플롯이지만 대중 상업 영화에서 이보다 나은 해답이 마땅히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비상선언’이 이런 뻔하고 무난한 재난 영화의 전개를 선택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감독이 뭔가 이 영화를 통해서 사회적 메시지를 던져주려는 의도에 너무 치중했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단순히 뻔한 전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것. 물론 실제 감독의 의도는 알 수가 없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모두 맞을 수도 있고, 둘 중 하나만 맞을 수도 있고, 둘 다 아니라 뭔가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 대한 항공기 전문가의 의견을 보니까 고증이 엉망이라고 하는데요. 저도 전문가는 아니지만 대형 민항기를 가지고 아주 매버릭 수준의 말도 안 되는 곡예비행을 하는 장면들이 어이가 없게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사실 해피 플라이트처럼 뻔한 항공 재난 플롯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전문적으로 고증해서 다양한 항공기의 위기 상황을 그려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게 어려우니까 비상선언이 종반에 그런 선택을 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종반의 내용이 정해졌기에 전문적인 고증에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무래도 후자 쪽 가능성이 높기는 하겠죠.
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느낀 점은 비행기 재난 같은 큰 규모의 소재를 다루는 대형 상업 영화를 최상의 완성도로 뽑아내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중반까지 정말 훌륭하게 잘 이끌어왔으니, 종반도 훌륭할 거야- 라는 기대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초중반을 잘했다고 마지막까지 무조건 최고의 결과물이 따라오는 건 아니에요. 시험지를 풀 때도 중간까지는 수월하게 잘 풀어나가다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와르르 무너져본 경험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을 겁니다. 비상선언은 한국 재난 블록버스터 장르의 명작이 될 수도 있었으나 종반의 잘못된 선택으로 와르르 무너져버린 안타까운 결과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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