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쓴 동물(맹수) 재난 영화 포스팅에서도 언급했던 얘기지만, 이 장르는 별로 메이저한 장르가 아니고 당연히 저 같은 이 장르의 팬들을 만족시킬 만큼 충분한 편수가 제작되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 장르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극장에서 본 영화는 거의 없는데, 이번에 사자가 등장하는 맹수 재난물인 ‘비스트’가 극장에 개봉해서 놓치지 않고 보러 갔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건 아주 드문 경험이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드문 경험을 하면서도 극장에서 내내 익숙한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장면들로만 도배된 ‘클리셰 쥐어 짜내기’ 영화였던 것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 '비스트'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악평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창작물에서 클리셰가 클리셰인 이유는 그만큼 잘 먹히고 효과가 있는 정형화된 방식이기 때문이고, 대부분의 경우 클리셰를 벗어나려는 무모한 시도보다는 충실하게 클리셰를 따른 작품의 만족도가 더 높습니다. 이런 장르 영화에서는 특히 더 그런 것 같아요. ‘비스트’는 맹수 재난 영화로서 꽤 완성도가 높습니다. 상당히 긴장감 넘치는 장면과 연출이 많았고 어떤 장면들은 소름 끼치게 무섭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본 공포 영화 몇 편들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임팩트가 강한 점프 스케어 장면도 두어 개 있었고요. 이 정도면 요즘의 비싼 티켓값도 아깝지 않다고 느낄만한 결과물입니다.
다만 역시 모든 장면들이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장르에서 클리셰로 도배되었다 운운하는 자체가 뭔가 모순적입니다. 클리셰란 건 그만큼 수많은 작품들에서 넘치게 지겹도록 써먹은 방식이라는 의미인데, 처음에 언급한 대로 이 장르는 그다지 제작 편수가 많지 않거든요. 저는 이 장르의 작품들을 ‘지겹도록’ 보는 것이 꿈이지만, 그렇게 볼 정로도 많은 작품들이 있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클리셰를 ‘쥐어 짜냈다’라는 표현을 쓴 겁니다. 몇 편 없는 영화들에서 억지로 클리셰라고 붙여줄 만한 요소들을 쥐어 짜내듯이 해서 만들어낸 영화라는 거죠.
사실 클리셰보다는 오마쥬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클리셰로 도배’가 아니라 ‘오마쥬로 도배’되었다고 하려니 표현이 좀 이상하긴 하네요.
이 영화는 사자가 등장하는 맹수 재난 장르입니다.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단 사자가 나오는 맹수 영화로 당장 떠오르는 건 세 편입니다. 고스트 앤 다크니스, 프레이, 로그. 물론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그나마 A급 메이저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는 건 1996년에 나온 ‘고스트 앤 다크니스’입니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발 킬머라는 유명 배우가 출연했었죠.(발 킬머는 최근에 ‘탑건: 매버릭’에 아이스맨으로 출연한 모습이 너무 반갑고 감격스러웠습니다.) 2007년작 ‘프레이’는 세 작품 중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마이너 영화이고, 네이버 영화에는 ‘먹이’라는 제목으로 등록되어 있네요. ‘로그’ 역시 그다지 메이저한 영화는 아니지만 메간 폭스라는 나름 알려진 배우가 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이 세 작품 중에서 ‘비스트’와 가장 판박이처럼 닮은 작품은 프레이입니다. 기본 플롯이 너무 유사한 게 프레이가 그다지 안 알려진 영화라서 눈치 안 보고 그대로 베낀 건가 싶을 정도입니다. 저는 처음에 비스트의 예고편을 보고 프레이의 리메이크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정보를 찾아봤는데 결국 리메이크는 아닌 듯하더군요.
사실 사자가 사람을 공격하는 내용의 영화를 만든다면 프레이와 비스트의 내용이 가장 단순하게 떠오릅니다. 아프리카를 차 타고 관광하다가 사고로 차가 고장 나서 고립되는 내용. 사자를 소재로 동물 재난 영화가 그다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배경이나 내용이 워낙에 제한되어 있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일 듯합니다. 정말 뻔하게 저런 내용 말고는 그다지 나올 만한 아이디어가 없는 게 사실이니까요. ‘고스트 앤 다크니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A급 상업 영화답게 꽤 스케일이 큰 내용을 다룬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고, ‘로그’는 단순히 맹수 재난 장르가 아니라 다른 장르의 내용을 섞어 버렸죠. 순수하게 사자에게 습격당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스트와 프레이 같은 내용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비스트와 프레이 모두 고립된 일행의 구성이 어른 한 명에 아이 두 명이라는 것이 동일합니다. 물론 중간에 어른 몇 명이 추가되기도 하고 죽기도 하면서 인원 구성에 변동이 생기는 것도 동일하고요. 가장 큰 차이점은 프레이의 주인공은 아이들의 (새)엄마이고 비스트의 주인공은 아빠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이 두 명도 프레이는 아들과 딸인데 비스트는 딸 둘입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는 사실 큰 의미는 없어요. 가족 간의 갈등이나 드라마 요소들에 차이가 생기지만 차에 갇혀서 사자에게 공격당하는 위기 상황의 그림은 크게 달라질 게 없으니까요. 프레이의 여주인공은 이런 장르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특히 ‘엄마’ 역할이라면 더더욱)남자 못지않게 용맹하고요. 그리고 아이들은 발암과 트롤 역할도 똑같이 합니다.
그래도 비스트는 이드리스 엘바와 샬토 코플리라는 유명 배우도 출연한 준-메이저급 영화이기에(극장 개봉도 했고) 전반적인 퀄리티는 프레이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가장 괜찮았던 것은 사자가 습격하는 장면의 리얼함과 박력입니다. 물론 조금 말이 안 되는 장면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자라는 맹수의 무시무시함이 이 영화에서 정말 잘 표현되었습니다. 특히 프레이에서는 사자들이 그냥 평범한 개체들인데 반해 비스트에 등장하는 사자는 전문 밀렵꾼 집단마저 속수무책으로 탈탈 털릴 만큼 범상치 않은 존재입니다.
사자의 이런 설정은 ‘고스트 앤 다크니스’와 닮았습니다. 워낙에 무시무시한 사자라서 ‘고스트’와 ‘다크니스’라는 명칭이 붙은 것처럼 비스트에서도 그런 비슷한 표현으로 원주민이 이 사자를 ‘디아볼로(악마)’라고 부릅니다. 물론 실화라는 무게감이 있고 영화에서도 엄청난 살육 장면을 보여주는 고스트 앤 다크니스에 비한다면 조금 딸리는 편이지만 그래도 프레이와 로그의 사자에 비하면 비스트에 등장하는 사자가 확실히 무섭고 인상적이었습니다.
특히 비스트에서는 사자를 굉장히 묵직하고 거대한 인상으로 그려내는데, 그래서 차 안에서 공격받는 장면은 쥬라기 공원의 티렉스 장면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에 학교 건물에서 사자와 숨바꼭질 비슷한 상황이 나오는 장면은 쥬라기 공원의 벨로시랩터 장면과도 닮았고요. 그리고 영화의 최후반부에는 주인공 이드리스 엘바가 이 무시무시한 사자와 단도 하나 들고 맞짱을 뜨는데 또 이 장면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곰과 맞짱을 뜬 ‘레버넌트’와 판박이예요.
프레이와 거의 동일한 기본 플롯 위에 또 유명한 영화의 장면들이 두루두루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만들었으니 확실히 프레이보다 훨씬 재미있고 볼거리도 많지만, 그만큼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죠. 최종 국면에서는 다른 사자 무리를 끌어들여 이이제이로 마무리를 짓는 것 역시 쥬라기 공원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서 익숙하게 봐온 방식이고요. 위기를 함께 극복하며 가족의 갈등이 봉합되는 드라마 또한 그냥 각본의 필수 요소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 대해 ‘클리셰를 쥐어 짜냈다’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 ‘쥐어 짜냈다’라는 표현의 뉘앙스를 생각해봅시다. 저는 이 표현에서 뭔가 단순 무식한 방법으로 열심히 노력하는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비스트는 클리셰든 뭐든 어떻게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장르와 소재의 명확한 한계점을 생각하면(애초에 많이 만들지 못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이 이상의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도 욕심입니다. 이드리스 엘바 같은 유명 배우가 무시무시한 사자와 목숨을 걸고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이는 광경을 극장의 큰 스크린으로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맹수 재난 장르의 팬 입장에서는 아주 만족스러운 경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이너한 장르의 팬에게는, 이런 ‘가뭄의 단비’가 매우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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