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룡팔부: 교봉전’은 신필 김용 작가의 장편 무협 소설 ‘천룡팔부’의 일부 내용을 각색해서 견자단 주연의 무협 액션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견자단은 이 작품에서 주연뿐 아니라 감독까지 맡았습니다. 영화는 나름 볼만하게 만들어졌고 견자단이 내한해서 아침마당, 런닝맨 등 공중파 방송들과 국내 유명 유튜브 채널에 많이 출연해 홍보도 열심히 했지만 흥행은 전국 관객 2만 명을 조금 넘기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저도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극장에서 봤습니다. 원래 원작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극장에서 무협 액션 장르를 본 지도 워낙 오래돼서 한 번쯤 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거든요.
(이 글에는 본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천룡팔부에 대한 포스팅은 예전에 한번 썼습니다. 천룡팔부의 주인공 중 하나인 ‘단예’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목완청’에 대한 포스팅이었죠. 그런데 ‘천룡팔부: 교봉전’에 목완청이 안 나오더군요.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사실 단예도 안 나올 거라고 예상했는데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첫 장면부터 단예와 구마지가 등장해서 오히려 놀랐습니다.
단예는 천룡팔부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천룡팔부는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닙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순서대로 단예, 교봉, 허죽이라는 세 명의 주인공이 있고 이 셋이 나중에 의형제를 맺습니다. 나이 순으로 교봉이 큰 형이고 허죽이 둘째, 단예가 막내가 되죠.
등장순서는 단예가 가장 먼저이지만 작품 전체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주인공다운 느낌의 캐릭터는 교봉입니다. 사실 무협지 팬들은 교봉이라는 이름보다는 ‘소봉’으로 더 많이 부릅니다. 영화 ‘천룡팔부: 교봉전’에서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내용인데 교봉의 친아버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이름이 ‘소원산’이라고 밝혀집니다. 그래서 교봉이 성을 바꾸고 소봉이 됩니다. 영화에서는 이게 거의 끝에 등장하는 내용이라 굳이 성을 바꾸는 장면까지는 나오지 않아서 사실상 영화 내내 교봉으로만 불립니다. 만약 영화의 속편이 나온다면 ‘소봉전’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게 전후편 내용 구성에 딱 맞는 제목이 될 것 같네요. 성씨 자체에 캐릭터의 정체성이 담겨 있기도 하니까요.
저도 원래는 소봉이라고만 부르는데(목완청의 포스팅을 쓸 때도 ‘교봉’이라는 단어는 한 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영화에 대한 포스팅이고 내내 영화에서 교봉이라고만 불리니 이 포스팅에서는 소봉이 아니라 교봉이라고 칭하겠습니다.
사실 중국에서 무협 액션 대작 영화를 만든다면 김용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들을 영화화하는 것이 흥행과 대중성에서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그리고 점점 문화적으로 폐쇄적인 국가가 되어가는 중국이 그나마 다른 나라에 콘텐츠 장사를 한다면 견자단 같은 글로벌 인지도를 가진 배우가 전면에 나서야 하죠. 김용+견자단의 조합이라면 선택지는 딱 하나뿐입니다. 바로 ‘교봉’이죠.
견자단 나이에 곽정, 양과, 장무기, 영호충, 위소보를 연기할 수는 없으니까요. 단예와 허죽도 안됩니다. 그나마 견자단 나이에 가장 가까운 김용 소설 주인공은 교봉입니다. 물론 견자단의 현재 나이는 60에 가깝고 교봉의 작중 나이가 30대 초반 정도라서 이것도 좀 무리수로 느껴지기는 하지만요. 그래도 과거에 비해 현대의 미용술과 분장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했고(이 작품의 여주인공 ‘아주’가 보여주는 분장술은 현대의 기술보다 더 뛰어나 보이긴 하지만) 수명도 길어졌기에 견자단이 연기하는 교봉이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서 교봉의 나이가 언급이 안되기 때문에 소설 내용을 모르고 영화만 본다면 교봉이 40대쯤 되려나...고 생각할만한 비주얼이기는 합니다. 뭐 그 정도도 견자단의 실제 나이에 비해 훨씬 젊게 보는 것이긴 하지만요.
사실 나이보다는 견자단의 체구가 작은 편이라 교봉 역할에 조금 안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소설 묘사에 따르면 교봉은 키도 크고 우람한 근육질의 거한입니다. 천룡팔부 드라마에서도 교봉 역할은 우람한 근육질까지는 아니어도 대체로 키가 크고 덩치가 어느 정도 있는 배우들이 맡아왔죠.
그런데 바로 이 점이 견자단이라는 배우의 대단한 점이기도 한 거 같습니다. 견자단이 연기한 유명한 캐릭터 중에서는 삼국지의 ‘관우’도 있습니다. 관우는 키가 무려 9척이라고(2미터가 넘는!) 알려져 있는데 견자단이 그보다 훨씬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공개된 프로필에 170대 초반 정도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70 아래일 것으로 추정) 관우라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어마어마한 기백과 위압감을 제대로 표현했습니다. 이건 위엄 있어 보이는 외모와 뛰어난 무술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액션 배우로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그의 커리어가 만들어낸 아우라 덕분이기도 할 것입니다.
견자단의 교봉 역할 또한 완벽하게 어울렸습니다. 교봉의 덩치는 표현이 안되었지만 피상적으로 보이는 ‘사이즈’를 넘어선 교봉이라는 캐릭터의 기백과 그릇을 훌륭하게 표현했더군요. 보통 주인공의 성장형 서사가 그려지는 다른 김용 소설들과 달리 천룡팔부의 교봉은 소설 시작 시점에 이미 무림 최대의 조직인 개방의 방주이고 무공 실력도 최강인 데다 10대 중반 시절부터 시작해 20년 가까이 강호를 누비며 온갖 산전수전을 겪고 경험치 만렙을 찍은 관록의 대협입니다. 이런 점은 영화 밖의 현실에서 견자단이 무렵 액션 배우로서 가지고 있는 위상과 비슷하죠. 그래서 영화에서 견자단이 처음 등장할 때의 위풍당당한 모습에 약간 울컥한 감정까지 느껴졌습니다. 역시 교봉이야말로 지금 시점에 견자단이 무협 액션 영화에서 연기할만한 최고의 캐릭터입니다.
소설 ‘천룡팔부’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천룡팔부는 김용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김용은 총 15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중에서는 내용이 아주 짧은 단편 소설 ‘월녀검’을 비롯해서 무협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그다지 분량이 길지 않은 작품들도 많습니다. 이런 짧은 소설들보다는 역시 방대한 분량의 대작들이 김용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그 방대한 분량의 대표작이라면 흔히 ‘사조삼부곡’, 한국에서는 ‘영웅문 3부작’으로 알려진 세 작품,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가 있고, 그 외 이 작품들과 비슷하거나 더 긴 분량의 세 편의 대작이 있는데 바로 소오강호, 녹정기, 천룡팔부입니다. 보통 이 여섯 작품이 김용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그런데 천룡팔부는 이 여섯 대표작들 중에서 인기나 인지도가 가장 떨어집니다. 다른 대표작들과는 달리 오직 천룡팔부만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특징이라면 역시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 세 명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점이 다른 대표작들에 비해 천룡팔부의 인기가 떨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이 세 명이기 때문에 그만큼 내용도 복잡하고, 전개가 산만해서 몰입도도 떨어집니다. 저도 김용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가장 읽기가 힘들었던 게 바로 천룡팔부였습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읽을 때는 힘들었지만 이 작품에 대해 평가를 내리자면 내용도 굉장히 재미있고 캐릭터도 아주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인정하게 됩니다. 사실 천룡팔부는 김용 작품 중에서도 우리가 인식하는 ‘무협지스러운 재미’를 가장 충실하게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김용 소설에는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스케일이 큰 무공 묘사는 별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특히 녹정기나 비호외전 같이 청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더욱 그렇죠. 시대 배경이 오래된 작품일수록 그나마 스케일이 큰 무공 묘사가 등장하는데, 천룡팔부는 김용 소설 중에서 가장 오래전 시대가 배경인 작품입니다. 춘추시대 배경인 단편 ‘월녀검’을 제외하면요.
그래서 김용 작품의 세계관에서는 ‘후대로 갈수록 무공이 약해진다’라는 것이 무협 독자들 사이에서는 공인된 설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요. 그런데 김용 본인이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이런 설정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언급했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사실 작품마다 등장하는 무공 묘사의 밸런스가 조금 오락가락하는 면도 있어서 ‘후대의 무공이 무조건 약하다’고 단정 짓기가 애매하긴 합니다. 그래도 천룡팔부의 무공 묘사가 김용의 다른 소설들에 비하면 블록버스터 같은 거대하고 호쾌한 묘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천룡팔부에는 소위 말하는 먼치킨급의 고수들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합니다. 무협지 팬들은 김용 세계관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고수들을 ‘오절급 고수’라고 칭하는데요. 사조영웅전에서는 오절급이 황약사, 구양봉, 홍칠공, 일등대사, 주백통까지 다섯 명 등장하고 곽정과 구천인이 오절급에 거의 근접한 수준으로 나옵니다. 신조협려에서는 홍칠공과 구양봉이 죽지만 그 자리에 곽정과 양과가 새로운 오절로 들어가고, 악역인 금륜법왕 또한 오절급 고수입니다. 그리고 소용녀가 오절급에 근접한 레벨이고요. 그리고 의천도룡기에는 오절급이 장삼봉과 장무기 둘 뿐입니다.
그런데 천룡팔부에서는 오절급이라고 볼 수 있는 고수가 주인공 3인방인 교봉, 허죽, 단예뿐 아니라 무애자, 이추수, 천산동모 같은 소요파 고수들과 구마지, 정춘추, 유탄지 등 악역 캐릭터, 그리고 후반부에 정체를 드러내는 소원산, 모용박까지 해서 두 자릿수 이상 등장합니다. 이들 중에서는 사조삼부곡의 천하오절보다 윗급으로 평가받는 고수들도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이 엄청난 고수들이 전혀 상대도 되지 않을 만큼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급의 압도적인 고수가 한 명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캐릭터가 바로 ‘무명승’인데, 사실상 김용 세계관 통틀어서 최강자라고 평가받는 캐릭터입니다.(그런데 달마, 황상, 독고구패 등 김용 소설에서 본편 등장인물이 아니라 과거 인물로 언급되는 캐릭터들까지 포함하면 ‘세계관 최강자 논쟁’이 좀 더 복잡해집니다.)
무협지에 고수가 많이 등장하고 무공 묘사의 스케일이 크다고 해서 작품이 무조건 재미있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천룡팔부에는 수많은 최강급 고수가 등장하지만 이 캐릭터들이 하나하나 개성이 있고 각자의 서사도 다채롭습니다. 처음부터 완성형 고수로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있고 단예, 허죽, 유탄지처럼 기연으로 고수가 되는 캐릭터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수 캐릭터들뿐 아니라 이들과 복잡한 사연으로 얽히는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각자의 개성과 매력이 살아 있어서 읽을수록 새롭게 발견되는 재미의 포인트가 무궁무진하게 존재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산만하다’는 단점은 있고, 독자가 이 작품의 재미를 온전히 잘 따라가기 위해서는 기억력과 집중력을 상당히 끌어올릴 필요는 있습니다.
사실 저도 소설을 읽고, 드라마를 보고, 만화책까지 읽었기에 이 작품의 전체 내용을 거의 완전하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완전한 것이지 100%는 아닙니다. 사실 천룡팔부의 내용이 이해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작품이 일종의 추리 소설 같은 면모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모는 소설의 일부 내용만 나온 영화 ‘천룡팔부: 교봉전’의 내용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영화의 초반부에 교봉의 양부모와 사부님을 죽인 범인에 대한 미스터리가 던져지고 중반 이후에는 안문관에서 소원산 일가를 습격한 무리의 대장을 찾아내는 것이 소봉의 주요 행적이 됩니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풀다가 상황이 꼬이면서 이 작품의 가장 안타까운 비극-여주인공 아주의 죽음-이 일어나게 되죠.
영화에서는 양부모와 사부를 죽인 범인은 밝혀지지만 안문관 습격 무리의 대장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이 부분의 내용 전개는 한국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는 자막이 좀 이상해서 원작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오해할 수도 있겠더군요. 기억이 좀 애매하긴 한데 안문관 습격 무리의 대장을 ‘맏형님’인지 뭔지 하여튼 이상한 칭호로 자막을 붙였던데 교봉이 이 인물을 원수로 여기고 추적한다는 내용이 원작을 모르면 잘 이해가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강민에게 속아서 교봉이 그 인물을 단정순(여주인공 아주의 친아버지)으로 오해하고 결국 아주가 단정순으로 변장해서 아버지 대신 죽게 되는 전개까지 상황이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영화의 이 내용에는 사실 훨씬 복잡한 전후 사정이 엮여 있고 영화에 나온 것은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엄청난 바람둥이인 단정순이 이 작품 속 수많은 등장인물의 친아버지로 밝혀지는 막장 드라마 스토리는 사실 교봉과 아주보다는 또 다른 주인공인 ‘단예’와 관련된 핵심 내용이고 안문관 습격 무리 대장의 진짜 정체에 대한 진실은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인 ‘허죽’과 엮여 있는 굉장히 복잡한 스토리입니다. 즉, 영화에서 단예와 허죽을 빼고 교봉 스토리만 다룬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모든 인물들의 스토리가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독립적으로 완성된 플롯을 구성하기 어려운 거예요.
저는 영화가 특별히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원작을 모르면 분명히 내용 이해가 안 될 테지만 작품을 즐길 때 전체 내용을 반드시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한번 봐서 내용 이해가 되지 않는 작품들은 수도 없이 많고, 요즘은 영화를 본 후 나무위키나 유튜브 해설 영상(예를 들어 2022년에 나온 조던 필 감독의 ‘놉’을 보고 나서 바로 유튜브에서 이동진의 해설 영상을 보면 아주 좋습니다)을 보며 ‘보충’을 하는 과정도 영화 한 편을 길게 즐기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영화의 경험이라는 것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제가 아주 어린 시절이었던 ‘홍콩 무협 영화 전성기’ 시절에도 대부분 내용도 잘 모른 채 무협 영화들을 봤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소오강호, 동방불패, 절교쌍교같은 영화들을 나중에 원작을 읽고 나서야 캐릭터들의 관계나 장면의 의미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애초에 원작과 다르게 내용 각색이 된 부분도 많았고 내용의 정확한 디테일보다는 큰 사건의 ‘결과’ 위주로도 재미와 감흥을 느끼기는 충분했으니까요.
‘천룡팔부: 교봉전’의 경우는 교봉과 아주의 사랑, 그리고 교봉이 아주를 죽이게 된 비극적인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 세부적인 사정을 잘 모르더라도 이 내용 자체는 강렬한 임팩트로 남게 됩니다. 그리고 무협 액션 영화로서의 피날레는 모용복과의 대결이 그려졌는데 이 내용은 원작과는 상당히 다르게 각색이 된 것이죠. 모용복이 사실 천룡팔부에서 굉장히 복잡한 인물인데 작품 중반까지는 선악의 경계에서 애매한 포지션이다가 후반부에 결국 정춘추, 유탄지 쪽의 악역 사이드로 빠집니다. 영화에서는 정춘추와 유탄지가 등장하지 않고 구마지는 오프닝 액션씬에서 대결하기 때문에 최종 대결 상대는 모용복이 되는 것이 당연한 전개이긴 합니다.
다만 원작을 아는 사람들은 이 각색이 조금 애매하게 느껴지긴 할 거예요. 모용복이 천룡팔부의 대표 악역 캐릭터들 중에서는(허접한 애들 제외하고 ‘상위 고수급’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악역 중에서) 무공 실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거든요. 물론 ‘남모용, 북교봉’이라 불리며 교봉과 함께 남쪽과 북쪽을 대표하는 최강 고수의 명성을 양분하고 있을 정도로 평판이 높기는 하지만 제대로 실력 비교를 하면 교봉에게는 현저히 밀리는 수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에서 교봉과 대등한 대결을 벌일 정도로 각색을 한 게 완전히 터무니없는 건 또 아니고요.
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은 각 고수 캐릭터들이 사용하는 주력 무공을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 같은 필살기 느낌으로 표현을 한 점입니다. 모용복이 ‘두전성이’라는 신기한 기술을 쓰는데 이게 상대의 공격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무공이라서 어마어마한 무공이 많이 등장하는(대부분 소요파 무공이지만) 천룡팔부에서도 나름 임팩트가 있습니다. 특히 모용 가문이 두전성이의 실체를 잘 숨겼기 때문에 무림에서는 그냥 ‘모용 가문은 무림의 모든 무공을 다 알고 있어서 상대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든 그것을 똑같이 사용해서 제압한다’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이 두전성이를 사용하고도 소설에서는 모용복이 최강급 고수들을 상대로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영화에서는 이게 ‘최종보스 필살기’처럼 묘사가 돼서 교봉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모용복과 두전성이를 소설보다 임팩트 있게 묘사해서 영화의 하이라이트 위기로 그려낸 것은 나름 적절한 각색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용복과의 최종 결전 외에도 영화에서 중요한 액션씬이 2개 더 등장하는데 바로 오프닝에서 구마지와 대결과 원작 소설에서도 가장 유명한 싸움 중 하나인 취현장의 혈투입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시작부터 단예와 구마지가 등장해서 깜짝 놀랐는데 사실 교봉 이야기만 따로 영화 한 편으로 만든다면 이 둘은 등장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실제로 구마지와의 오프닝 대결은 이후 진행되는 본편 스토리의 흐름과 전혀 연관이 없습니다. 다만 주인공 교봉을 소개하는 기능적인 시퀀스이고 어느 정도는 팬서비스 차원의 의미라고도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오프닝 액션 장면이 굉장히 훌륭해서(무협 영화에서 ‘객잔’이 등장하면 몇 분 후 그 객잔은 풍비박산이 난다는 무협 영화의 클리셰도 제대로 보여줬고) 시작부터 영화에 대한 몰입감을 엄청나게 끌어올려줍니다. 특히 교봉과 구마지의 대결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각자의 주력 무공인 ‘화염도’와 ‘항룡십팔장’을 필살기처럼 묘사해서 임팩트 있게 씬을 마무리 지은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취현장 혈투도 영화에서 꽤 볼만하게 그려졌지만 오프닝 구마지와의 대결을 보고 기대치가 높아진 상황이라 조금은 아쉽기도 했습니다. 이 싸움에서 무림 고수들이 교봉의 손에 엄청나게 죽어 나가는데 그런 처절한 혈투의 느낌이 조금 약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청불 영화가 아니니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한 걸로 볼 수도 있겠고요. 심지어 긴박하게 싸우는 와중에 아주가 수십 명을 막고 있는 교봉의 한쪽 팔을 붙잡는 어이없는 트롤을 저지르는 등 뭔가 연출이 이상한 장면들도 있었죠.
그리고 이 장면에 유탄지가 등장하지 않은 것도 좀 의외였습니다. 영화의 내용상 전혀 나올 일이 없는 허죽조차도 뜬금없는 장면에 딱 한번 등장해서 자기소개까지 하며 시그니쳐 대사(‘눈에 살기가 있소!’)를 날려주기까지 하는데 말이죠. 취현장 혈투에서는 나와야 할 유탄지도 나오지 않아서 영화의 속편은 나오지 않는다는 암시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취현장에서 유탄지가 나와서 교봉에게 복수를 다짐하고 후반부 아주의 동생인 아자가 등장할 때 정춘추 관련 떡밥이나 아니면 정춘추 본인이 직접 한두 장면 살짝 등장했더라면 속편이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겠다라고 생각했을 텐데 말이죠.
그런데 영화의 속편이 나올지 안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죠. 이번 편 제목이 ‘교봉전’이었으니 ‘소봉전’이라는 제목으로 속편이 나오면 딱이긴 하지만 영화의 뒷이야기는 아무래도 이번 작품처럼 소봉 원톱 주인공으로 이끌어가기는 어렵고 다른 두 주인공인 단예, 허죽, 그리고 유탄지의 스토리에도 꽤 분량을 할당해야 하거든요. 뭐 어떻게든 각색을 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요.
교봉을 연기한 견자단 외에 영화에서 특별히 언급해야 할 배우라면 역시 여주인공 아주 역의 진옥기입니다. 진옥기는 2019 의천도룡기에서 여주인공 조민 역을 연기해서 한국에서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배우입니다. 의천도룡기의 여주인공에 이어서 천룡팔부의 여주인공까지 연기하면서 뭔가 무협 장르 여배우의 왕도를 걸어가는 느낌인데요. 이런 커리어 행보는 유역비가 전성기 시절에 천룡팔부의 왕어언과 신조협려의 소용녀를 연속해서 연기한 행보를 떠올리게도 합니다.
천룡팔부는 주인공이 세 명인 만큼 여주인공 또한 한 명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비중 있는 여자 캐릭터가 여러 명 등장하는데 드라마에서는 제일 예쁘고 잘 나가는 배우들은 보통 왕어언이나 목완청 역을 연기합니다. 그리고 아주 역은 상대적으로 미모가 떨어지는 배우가 연기했었죠. 그런데 이번 영화는 교봉만을 원톱 주연으로 내세우기에 여주인공도 아주 한 명으로 정해졌고 이 역을 엄청 예쁘고 잘나가는 여배우인 진옥기가 연기하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저 개인적으로는 2003년 드라마에서 아주를 연기한 ‘류타오’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가 천룡팔부의 여자 캐릭터 중 성격이나 포지션이 왕어언, 목완청 같은 캐릭터에 비해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외적 인상이 좀 약한 편이지만 뭔가 ‘힘숨찐’ 느낌으로 내면의 매력이 크게 와닿는 캐릭터거든요. 다른 사이드에서 엄청 화려한 미녀들이 활약하는 와중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아주가 교봉을 향한 애절한 로맨스로 가장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에서도 몇 번 나온 중요한 대사로 교봉이 아주에게 ‘둘이 멀리 떠나서 소와 양을 기르며 삽시다’라고 하는 대사가 있는데 이게 아주라는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의 핵심입니다. 외딴곳에서 사랑하는 남자와 소와 양을 기르며 살아가는 여인. 진옥기가 예쁘긴 하지만 살짝 이런 이미지의 표현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외에 주요 여자 캐릭터는 강민과 아자가 등장했는데 둘 다 김용 세계관의 대표적인 여자 악역들이죠. 물론 아자의 경우 영화의 속편이 나와야 본격적인 악행을 볼 수 있을 테고 이번 편에서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주지는 않았습니다. 강민을 얼굴을 망쳐버리긴 했지만 이건 강민의 악행에 대한 응징이었고요.
강민은 악역인데도 천룡팔부에서 상당한 임팩트를 보여주는 캐릭터인데 영화에서 캐스팅도 괜찮았고 이중적인 면모를 가진 악역 캐릭터로서의 표현이 매우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교봉전에서 등장하는 내용이 천룡팔부 전체 내용에서 강민이 가장 활약(?)하는 파트이기도 하고 여주인공 아주와 거의 동등한 수준으로 등장 비중이 커서 또 다른 여주인공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그런데 강민 역을 연기한 ‘왕군형’이라는 배우는 포털에 검색해 봐도 정보가 거의 없더군요.
아주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모용복과 함께 왕어언과 아벽도 등장하는데 이 장면도 조금 재미있긴 했습니다. 아벽이야 아주나 왕어언보다 비중이 크게 떨어지니까 그냥 ‘모용복 옆에 있는 듣보 엑스트라 여인1’ 느낌으로 대충 나와도 상관없지만 왕어언은 그래도 김용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 소용녀와 함께 최고 미녀 투톱으로 꼽히는 캐릭터인데 아벽과 묶여서 ‘듣보 엑스트라 여인2’ 취급받는 게 조금 안습이더군요.
그런데 왕어언이 갈수록 위상이 떨어지고 있는 캐릭터라서 이런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천룡팔부를 비롯해서 김용 작품들은 작품이 완성된 이후에도 내용 수정이 꾸준히 이루어진 걸로 유명한데(가장 유명한 내용 수정이 신조협려의 주인공인 양과의 어머니가 진남금에서 목염자로 바뀐 것) 왕어언이 이 내용 수정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캐릭터죠. 원래 주인공인 단예와 맺어지는 결말이었는데 내용이 수정되면서 단예를 떠나 모용복에게 가버렸으니... 그냥 여주인공의 지위를 ‘박탈’당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드라마 천룡팔부 2003에서 당시 절정의 미모를 보여주던 유역비가 연기한 왕어언을 떠올리면 이번 영화에서 엑스트라처럼 등장하는 왕어언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물론 원래 교봉 스토리에서 왕어언의 비중은 거의 없으니까 딱히 유명한 배우를 쓸 필요도 없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엑스트라 느낌으로 등장했어도 왕어언 역의 배우가 묘하게 눈길을 끄는 외모이긴 하더군요. 유역비나 진옥기처럼 엄청 아름다운 미녀는 아니더라도 뭔가 눈에 확 들어오는 개성이 있는... 아벽과 둘이서 세트로 등장해도 ‘이 사람이 왕어언이다’ 하고 집어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용에 대한 포스팅을 쓸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김용 작품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많은 것 같습니다. 김용은 2018년에 세상을 떠났지만(향년 94세) 그의 작품의 생명력은 영원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책도 꾸준히 읽히겠지만 중화권에서는 김용 작품의 미디어믹스 콘텐츠가 끝없이 나오고 있으니까요. 할리우드에서는 해리포터나 마블 코믹스 같은 IP로 초대형 영화 프랜차이즈를 쏟아내고 있는데 비할리우드 권에서 그런 거대한 상업영화 프랜차이즈가 완성될 수 있는 잠재력의 IP라면 역시 첫 손으로 꼽히는 것이 김용의 작품입니다. 저는 김용 작품을 엄청 좋아하는 입장에서 언젠가 김용의 대작들이 할리우드의 해리포터 시리즈나 MCU 영화들처럼 완성도 높은 장기 블록버스터 시리즈로 나올 것을 기대하기도 했었는데요. 하지만 중국이라는 나라가 점점 비정상 국가가 되어가고 있고 문화 예술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중국이 제작하는 콘텐츠에 기대를 가지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견자단이 내한해서 열심히 홍보도 했지만 ‘천룡팔부: 교봉전’에는 관객이 전혀 들지 않았고요.
그래도 저는 ‘천룡팔부: 교봉전’을 극장에서 보면서 지금은 사라져 버린 예전의 ‘기대’가 조금은 충족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실 김용 소설 원작의 무협 액션 영화가 한국 극장에 개봉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하고 있었기에 김용의 팬으로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게 된 것이 조금은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기대도 없고 예상도 못한 상황에서 본 ‘천룡팔부: 교봉전’이 제법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주었기에 극장에서 더욱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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