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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색깔 – 훈훈하지만 비현실적인 판타지

by 대서즐라 2021.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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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스타일의 잔잔하고 훈훈한 내용의 일본 영화를 좋아합니다. 한때 악착같이 이런 영화들만 찾아봤던 적이 있어요. 요즘도 많이 보고요. 특히 고바야시 사토미의 작품들이 좋았죠. ‘카모메 식당’, ‘안경’, ‘수영장’, 드라마 ‘수박’과 ‘빵, 스프, 고양이와 함께하기 좋은 날’까지. 이런 영화들을 힐링 영화, 혹은 슬로우라이프 영화(드라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일본 영화와 드라마들을 많이 찾아보다 보니 마냥 훈훈하고 기분 좋아지는 영화도 있는 반면에 뭔가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느껴지는 영화들도 있더라고요. 이번에 극장에서 보게 된 ‘가족의 색깔’도 그랬습니다.

 

가족의 색깔 포스터

 

(이 글에는 ‘가족의 색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게 이 영화가 조금 거북하게 느껴졌던 건 제목에 썼듯이 마냥 훈훈하게 보기에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일종의 ‘대안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평범한 엄마, 아빠, 자녀가 아닌 다소 독특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합니다.

 

‘슌야’라는 이름의 초등학생 소년이 등장하는데 부모가 모두 죽었습니다. 하지만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아키라’입니다. 아키라는 슌야의 새엄마입니다. 25살로 초등학생의 엄마라고 하기에는 어린 나이입니다. 슌야는 아키라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고 ‘아키라짱’이라고 부릅니다.

 

가족의 모습

 

슌야의 친엄마는 슌야를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 슌야의 아빠인 ‘슈헤이’가 혼자서 슌야를 키우다가 아키라를 만나 재혼을 하고 세 가족이 함께 살게 됩니다. 그런데 슈헤이마저 병으로 죽어 버립니다. 슌야와 단 둘이 남게 된 아키라는 여기서 평범하지 않은 선택을 합니다. 살고 있던 도쿄를 떠나서 슌야와 함께 죽은 남편의 시골 고향집으로 내려가 버린 것입니다. 고향집에는 슈헤이의 아버지, 즉 슌야의 할아버지인 ‘세츠오’가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에 아키라는 손자를 데리고 가서는 손자와 함께 자기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지내면 안 될까요?”

 

이걸 그냥 훈훈하고 아름다운 내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윗 문단에 ‘거두어 달라’라고 적었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늙고 혼자된 시아버지를 며느리가 모시고 살겠다고 하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키라는 모아놓은 돈도 없고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하고 살아왔을 뿐 정규 직장도 없습니다. 반면 세츠오는 은퇴를 앞두고는 있지만 지역 철도 회사의 운전사로 30년 넘게 근무해 왔고 몸도 정정합니다.(주위에서 은퇴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만류할 정도입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혼자 잘 살고 있는 세츠오의 집에 오갈 데 없이 된 아키라가 의탁하러 온 상황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확실히 아키라의 이 선택이 평범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25살의 어린 나이에 초등학교 3~4학년 정도 되는 혈육이 아닌 남자아이를 계속 ‘부모’ 역할을 하며 키우겠다고 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고(친부모 쪽 가족들이 있으니까요. 실제로 친모가 죽었을 때 친모 쪽 가족들이 슌야를 데려가려고 했습니다.) 시아버지 혼자 사는 시골집에 슌야를 데려가서는 셋이 같이 살겠다고 하는 것도 평범하지 않습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저는 아키라가 선택한 이 독특한 ‘가족의 형태’가 ‘새 출발을 위한 발판’인 것인지 아니면 ‘안주할 수 있는 종착지’인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25살에 남편이 죽고 (친)자식도 없는 여자라면 보통은 새 출발을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무엇보다 같이 살게 된 슌야와 세츠오는 남편인 슈헤이가 죽은 시점에서 사실상 아키라에게는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입니다. 슌야는 그래도 같이 살기라도 했지만 세츠오는 슈헤이가 죽기 전에는 만난 적도 없는 사이입니다.

 

아키라가 새 출발을 위한 발판으로서 이러한 가족의 형태를 선택한 것이라면 저로서는 그저 ‘대단한 여자구나’(좋은 의미, 나쁜 의미 다 포함해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키라는 경제적 기반이 아예 없는 상황이었기에 당장 주거를 해결하고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임시적으로 지낼 수 있는 보금자리로서 이 가족을 선택한 것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키라는 경쟁이 치열하고 집세도 비싼 도쿄를 떠나 생판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집세도 없이 지낼 곳을 얻었고 정규직 일자리도 비교적 수월하게 구했습니다. 정말 굉장한 생존 능력입니다! 그 후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집을 나와서 홀로서기를 하거나(원래 슈헤이와 결혼 전에는 혼자 살았던 듯하니까요) 새로 남자를 만나 결혼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해도 누구도 아키라를 비난하지 않을 겁니다. 원래부터 아키라가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세츠오, 슌야와 함께 사는 게 이상한 일이거든요.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실상은 전혀 이런 내용이 아닙니다. 새 출발을 위한 발판? 전혀 그런 게 아닙니다. 아키라는 정말 진심으로 슌야를 부모로서 기르고 싶어 하고 죽은 남편의 아버지이자 슌야의 할아버지인 세츠오와 함께 세 명이서 가족으로 살고 싶어서 이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런 속마음이 직접 밝혀지지는 않지만 아키라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다만 제가 앞에서 ‘새 출발을 위한 발판인지 종착지인지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확실히 이런 판단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대안 가족

 

판타지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이에요. 참 아름답고 훈훈한 이야기이긴 하죠. 하지만 솔직히... 너무 말이 안 되잖아요.

 

물론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죠. 어떻게든 말이 되는 상황으로 만들 수는 있습니다.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아키라의 배경(과거)이 중요합니다. 아키라가 이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과거부터 줄곧 결핍으로 가득한 험난한 삶을 살아왔고 안주할 수 있는 가족의 소중함(그것이 혈연관계이든 아니든)이 절실한 입장이었다면, 그런 사연이 작품에서 제대로 그려졌다면 이 이야기는 현실성 있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이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아요. 슈헤이와 결혼 전 아키라의 과거 모습은 슈헤이와 처음 만난 날의 모습이 나올 뿐입니다. 그 모습은 전혀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과 우울한 과거를 떠안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냥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평범한 아가씨의 모습이에요.

 

세츠오의 입장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혈육인 손자야 그렇다고 쳐도 처음 보는 어린 아가씨가 같이 살겠다고 하는데 이걸 별 거부감 없이 받아준다? 본인들이야 별생각 없다고 쳐도 솔직히 주변에서는 이상하게 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캐릭터들이 평범한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판단과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 배경 스토리를 굳이 보여주지 않고 관객의 상상에 맡기는 방법도 원래 존재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쓰지는 않아요. 이 영화는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기보다는 그냥 대책 없이 비워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상황과 설정들이 작위적으로 보이고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흐린 눈을 하고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손자와 할아버지

 

또 한 가지 굉장히 작위적인 내용이 있는데 바로 슌야의 담임 선생님이 미혼모가 되는 내용입니다. 이 선생님은 아키라와 동갑인 어린 나이인데 유부남과 불륜으로 임신을 해 낙태를 결심하지만 아키라의 영향으로 결국 아이를 낳고 미혼모가 됩니다. 불륜의 결과로 미혼모가 된 초등학교 여교사라면 참 시궁창 같은 내용과 상황들이 나올 법도 한데 이 작품에서는 이 내용도 마냥 훈훈하게만 그려집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냥 철저하게 훈훈한 분위기만 전달하기 위해서 현실에 존재하는 각종의 장애들과 부정적인 상황, 감정들을 필터로 걷어내 버린 거예요. 물론 원래 영화를 비롯한 대중문화 창작물들이 그런 거긴 합니다. 철저히 현실적인 내용만 보여준다면 우리가 이런 가공의 창작 스토리를 즐기는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만 아무리 그래도 어느 정도는 현실적인 요소가 반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훈훈한 내용의 작품을 ‘휴먼 드라마’라는 장르로 분류하는데 이렇게 현실성이 떨어지는 작위적인 내용만 보여준다면 캐릭터들이 전혀 ‘휴먼’으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스텝포드 패밀리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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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언급한 대로 저는 이런 내용의 일본 영화를 정말 많이 봤습니다. 일본 영화들이 보여주는 다소 비현실적인 훈훈한 판타지들이 지금도 마냥 좋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색깔’에서는 이런 내용들이 왜 이렇게 거북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보기 힘들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실 감상 자체는 다른 일본 힐링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훈훈함과 잔잔한 감동을 느끼며 즐겁게 보기는 했습니다.(특히 철도 관련 내용은 꽤 흥미롭더군요.) 다만 역시 보면서 이런저런 잡생각이 계속 드는 영화였습니다.

 

주인공 아키라를 연기한 배우가 아리무라 카스미였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때때로 이 배우에 대해서 ‘교과서적인 연기를 하는 여배우’라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가끔 이 배우를 보다 보면 사람이 아니라 인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정말 스텝포드 와이프 같은 느낌으로요. 아리무라 카스미는 훈훈하고 마냥 선량하기만 한 캐릭터를 연기한 경우가 많은데요. 이런 캐릭터를 연기할 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캐릭터가 맞지만, 그런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새엄마

 

쓰다 보니 영화와 배우에 대해 엄청난 악평을 하게 된 것 같은데요. 실제로 그렇게 나쁜 느낌을 받은 건 아니에요. 아리무라 카스미의 연기에 대해 진짜로 혹평할 마음이 드는 건 실사판 ‘바람의 검심’의 토모에 역할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주 매력적이고 좋은 연기를 많이 보여준 훌륭한 배우입니다. 이 작품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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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아키라가 철도 운전사가 되는 스토리는 꽤 재미있고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이것도 꽤 작위적인 내용이기는 합니다. 학벌도 경력도 심지어 운전면허도 없는 여자가 지역 철도 회사 운전사라는 번듯한 정규직 직장에 이렇게 쉽게 취직이 되다니??? 아무튼 이 내용이 특히 좋았던 이유는 아리무라 카스미를 무명 신인에서 라이징 배우로 도약시켜 준 작품인 드라마 ‘아마짱’의 내용과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마짱에서도 가족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지역 철도의 디젤 엔진 열차가 주요 소재이자 내용으로 등장합니다. 드라마 아마짱 1화의 첫 장면이 아리무라 카스미가 인파를 헤집고 디젤 열차에 탑승하는 장면이에요. 그 장면이 가족의 색깔에서 아키라가 열차를 운전하는 장면과 이어지면서 흥미로운 감흥이 느껴지더군요. 아마짱이 나온 지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아리무라 카스미는 줄곧 톱배우의 위치에 있으면서 꾸준히 좋은 활약을 이어왔죠.

 

운전사가 된 아키라

 

일본 영화는 확실히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한국 영화가 생생한 날것의 느낌이 매력적이라면 일본 영화는 현실을 잊게 해주는 판타지가 필요할 때 찾게 되는 별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지만 결국은 이렇게 서로 다른 개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나라의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즐기는 입장에서는 개성과 다양성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가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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