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메이크영화 리뷰
써니 Sunny 強い気持ち・強い愛
한국 영화 ‘써니’가 일본에서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에 저는 굉장히 흥분했습니다. 일단 ‘써니’가 제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영화이기 때문인 게 가장 큰 이유고요. 거기에 써니가 단순히 재미있고 좋은 영화인 걸 넘어서 정말로 한국적인 느낌의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리메이크 영화들에 늘 흥미를 가지는 요소가 바로 이것이에요. 특정 국가의 강렬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영화가 다른 나라에서 리메이크 될 때 그 특징들이 어떻게 변형되고 표현될 것인가. 저는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를 둘 다 많이 봅니다. 그리고 둘 다 좋아하죠.(사실 국적 불문하고 재미있고 좋은 영화라면 다 좋아합니다. 그게 당연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한국 영화 느낌의 일본 영화도 좋고 일본 영화 느낌의 한국 영화도 좋아요. 한국 영화 느낌의 일본 영화는 기존 일본 영화와는 다르고 한국 영화와도 다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뭔가 리메이크 같은 작업을 통한 융합으로 새로운 장르가 만들어지는 느낌이랄까요. 네, 그렇게 만들어진 일본영화 ‘써니: 강한 마음, 강한 사랑’은 제 예상과 기대대로 너무도 한국적인 느낌의 일본 영화로 완성되었습니다. 많은 기대를 했는데 충분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죠.
우선 한국 영화인 ‘써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써니는 대단한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강형철 감독도 대단한 사람이죠. 사실 진짜 대단한 게 우리나라 관객들입니다. 한국 관객들의 대단한 면모가 바로 강형철 감독의 작품들을 통해 여러 번 드러날 수 있었죠.
바로 입소문 흥행. 물론 좋은 영화가 나오면 소문이 퍼져서 더 많은 관객이 찾게 되고 예상을 뛰어넘는 흥행을 하는 것이 드문 일은 아닙니다. 드문 일이 아닐 뿐더러 신기한 일은 더더욱 아니죠. 영화가 좋은 평가를 받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관객이 들게 되는 것은 신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제가 앞 문단에서 우리나라 관객들이 대단하다고 말한 것도 이 당연한 것 같은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한국보다 훨씬 드물게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일단 관객에게 엄청 좋은 평가를 받는 영화 자체가 그렇게 흔하게 나올 수가 없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극장에서 흥행이 결정되는 요인은 관객의 평가 외에도 다양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수백만 관객들을 동원하는 히트작들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이거나 한국 영화 중에서는 쟁쟁한 캐스팅에 유명한 감독이 연출한 대형 상업 영화들입니다. 관객의 평가를 따지기 이전에 이런 기본적인 조건에서 이미 예상되는 흥행의 기대치가 극명하게 갈려 버립니다. 예를 들어 신인 감독에(지금은 유명해 졌지만) 유명한 배우라고는 출연하지도 않은 ‘위플래쉬’가 한국에서 15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자 대단한 흥행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런데 어벤져스가 한국에서 1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면 대폭망이라고 하겠죠. 어벤져스는 한국에서 개봉하면 이틀 만에 관객 수 200만 명을 찍어버리는 시리즈니까요.
입소문 흥행은 보통 가늘고 길게 가는 흥행 양상으로 이루어집니다. 개봉하자마자 폭발적인 관객 동원을 하는 게 아니라 초반에는 소소하게 관객 동원을 하다가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객 추이가 조금씩 좋아지는 것이죠. 강형철 감독의 과속스캔들은 최종흥행성적 824만 명을 동원한 초대박 흥행작입니다. 이 영화는 손익분기점이 고작 150만 명이에요. 그런데 개봉 첫날 관객 수가 고작 4만 명으로 최종적으로 손익분기점 돌파가 가능할지 걱정해야 할 정도의 성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서서히 입소문이 퍼지면서 관객 수가 증가하고 흥행 롱런을 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마어마한 성적을 기록한 것입니다.
과속스캔들도 한국 영화 입소문 롱런 흥행의 레전드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강형철 감독의 다음 작품인 ‘써니’입니다.
‘써니’의 최종 흥행성적은 745만 명입니다. 그리고 개봉 첫날 성적은 5만 5천 명입니다. ‘과속스캔들’과 비교해서 개봉 첫날 성적은 더 높고 최종 성적은 더 낮다면 결과적으로 과속스캔들 보다 롱런 흥행을 못한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하지만 두 영화의 흥행 양상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개봉 시기’ 입니다.
사실 이 ‘개봉 시기’야 말로 한국 영화의 흥행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입니다. 극장가에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 극장가의 최대 성수기로 꼽히는 시기는 7월 말부터 8월까지의 여름 휴가철 시즌입니다. 한국 영화 역대 최고 흥행작인 ‘명량’을 비롯해 ‘괴물’, ‘도둑들’ 등 천만 관객 돌파의 메가히트 흥행작 중 다수가 이 시기에 개봉했습니다. 2015년에는 ‘암살’과 ‘베테랑’이 2주 간격으로 개봉해 쌍천만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최대 성수기 다음의 두 번째 성수기가 바로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 특수로 이어지는 겨울 성수기 시즌입니다. 이 시기에도 ‘신과 함께’, ‘국제시장’ 등 많은 천만 관객 히트작이 나왔고 과속스캔들도 바로 이 시기의 개봉작입니다. 이 시기에는 특히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까지 이어지는 약 2주간의 기간 동안 어마어마한 관객이 극장으로 몰립니다. 과속스캔들의 경우 12월 초에 개봉해 크리스마스 시즌이 개봉 4주차였는데, 보통은 흥행이 어느 정도 꺾이기 시작하는 시점이지만 과속스캔들은 오히려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입소문 흥행의 탄력을 받게 됩니다. 과속스캔들이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것은 물론 영화의 재미에 대한 입소문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지만, 이런 성수기 흥행 특수의 이점을 크게 누린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 써니는 성수기 개봉작이 아닙니다. 물론 써니가 개봉한 5월 초는 따듯한 봄 날씨에 어린이날 특수도 있고 거기에 학교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나 여가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봄철 나들이 시즌으로, 극장가에서 나름 ‘준 성수기’ 정도로 꼽히는 시기이긴 합니다. 하지만 방학과 휴가,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 특수 등이 겹치는 여름과 겨울의 성수기에 비할 바는 못 되죠. 더군다나 이 시기에 흥행하는 영화는 대부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입니다. 왜냐하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대작 영화들이 4월 말과 5월 초에 개봉 시기를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아이언맨 1,2,3편과 어벤져스 1,2,3,4편이 전부 이 시기에 개봉했습니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7월 중순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개봉 러쉬가 이어지고 한국영화가 7월말 여름 성수기 부터 흥행 바통을 이어받는 것이 매년 반복되는 흐름이었습니다. 즉 써니가 개봉한 시기는 한국영화가 흥행하기에 결코 유리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개봉해서 써니는 놀라운 흥행을 이루어냅니다. 5월 첫째 주에 개봉한 영화가 7월 19일까지 박스오피스 순위 3위권을 유지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개봉했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분노의질주: 언리미티드, 토르: 천둥의 신, 소스코드,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쿵푸팬더2,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슈퍼 에이트, 트랜스포머3 입니다. 이렇게 매주 새로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들과 계속 경쟁하면서 박스오피스 순위와 일일관객수를 꾸준히 유지했던 것입니다. 똑같이 롱런 흥행을 했던 과속스캔들과 비교해봐도 일일 관객수를 3만명 이상 유지한 기간이 써니가 2주 정도 더 깁니다. 최종 흥행 성적은 과속스캔들이 높았지만 더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관객에게 사랑받은 작품은 써니인 것입니다.
써니의 흥행이 특히 놀라운 것은 이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남성 캐릭터들이 잔뜩 나오는 영화야 수도 없이 있지만 여성 캐릭터들이 주요 등장인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영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상업영화에서는 더 그렇습니다.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더더더욱 그렇고요. 실제 한국 박스오피스에서 여성 캐릭터들을 주력으로 내세운 영화 중 최고 흥행한 영화가 써니 입니다.
한국영화계에서 여배우들의 기회가 적다는 비판은 꾸준히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현실의 원인은 복합적이지만, 역시 가장 큰 원인이라면 콘텐츠 수요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여성 캐릭터들이 주력으로 등장하는 작품은 흥행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죠.
조금 아이러니한 현실이긴 합니다. 서브컬쳐 분야는 조금 예외로 두더라도, 한국 대중문화 산업에서 주요 소비층은 여성이거든요. 그런데 여성들이 소비하는 콘텐츠라고 해서 꼭 여성 아티스트의 수요가 높지는 않습니다. 매우 단적인 예로, 아이돌 산업의 경우 여성 소비자들은 주로 남자 아이돌을 소비하게 되니까요.
영화 산업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복잡해집니다. 대중문화 전반에서 여성 소비층의 영향이 큰 편이지만, 사실 영화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는 문화이기 때문에 특정 성별이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나홀로 관객’도 많기는 하지만 극장은 기본적으로 애인이나 친구 등과 어울려 함께 방문하는, 일종의 사교 활동으로서의 문화 소비 공간이기 때문에 특정 성별이나 계층을 대상으로 한 작품보다는 더욱 폭넓은 관객층을 수용할 수 있는 영화가 주로 제작되게 됩니다. 넷플릭스 같은 OTT 산업의 영향으로 앞으로 이런 구조에 변화가 생길 수 있겠지만, 적어도 최근까지는 이런 원인들로 인해 영화계에서 여배우들의 기회가 적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써니가 개봉했던 2011년에는 더더욱 그랬고요.
써니에는 많은 여배우들이 출연합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죠. 일곱 명의 여자 절친들의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가 고등학생 시절인 과거와 중년이 된 현재를 오갑니다. 이것만으로 여배우 14명입니다. 심은경, 강소라, 민효린, 유호정, 진희경, 남보라 등등... 재능 있는 여배우들이 잔뜩 캐스팅 되었죠. 거기에 써니 멤버가 아닌 주요 여성 캐릭터들도 있습니다. 천우희가 연기한 상미. 그리고 써니의 라이벌 조직인 소녀시대의 리더 김예원까지.
특히 여고생 역할을 맡을 젊은 여배우들이 잔뜩 캐스팅 되었고 이로 인해 써니의 대박 흥행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써니가 대박 터짐으로서 이 젊은 여배우들 중 다수가 지명도를 크게 올리며 배우로서 큰 성장의 기회를 잡게 되었거든요. 주인공인 심은경과 강소라는 말할 것도 없고 상미 역의 천우희도 이 영화에서 보여준 활약을 바탕으로 충무로에서 단숨에 주목받는 여배우로 급부상했죠.
써니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흥행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조건에서 놀라운 흥행을 이루어낸 영화입니다. 써니가 이렇게 크게 흥행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요? 입소문 대박 히트작이니 역시 가장 큰 요인은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역시 ‘이야기의 힘’이죠.
써니는 일반적인 상업영화로서의 장르영화가 아닙니다. 장르를 따졌을 때 멜로도 아니고, 공포나 액션도 아니고 심지어 코미디라고 하기도 뭔가 애매하죠. 내용과 캐릭터로서 분류를 하자면 하이틴 성장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이틴 스토리에 중년이 된 현재의 모습을 교차시키면서 진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조 자체가 이 영화의 매력의 핵심입니다. 영화의 메인 서사는 현재 시점의 주인공 ‘나미’가 우연히 병원에서 시한부 불치병을 앓는 친구 ‘춘화’를 만나고 춘화의 부탁으로 과거의 친구들(써니의 멤버들)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친구들을 찾게 되는 과정이 아니고 그들의 관계성(우정)입니다. 어떻게 써니의 멤버들이 우정을 쌓아 왔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는 당연히 과거 시점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주고, 그들이 함께 어떤 고교 시절을 보내며 우정을 쌓고 나누어 왔는지가 흥미롭게 묘사됩니다. 당연히 한명 한명의 캐릭터도 고교 시절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그려지고 그것이 현재 시점의 캐릭터에 투영되는 식입니다.
이런 매력적인 서사 구조 하에서 스토리와 캐릭터의 완성도도 매우 훌륭합니다. 사실 이렇다할 큰 사건이 없는 내용이지만 소소하게 전개되는 하나하나의 에피소드가 모두 완성도가 높아요. 나미가 전학을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춘화의 그룹에 합류한 후 써니가 결성되기까지 과정... 그리고 고교 시절의 최종 에피소드는 굉장히 임팩트가 큰 비극이죠. 이런 스토리 전개에서 특히 빛을 발하는 것이 강형철 감독의 스토리텔링 능력과 연출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요란하고 규모가 큰 영화보다는 이런 작은 사건과 에피소드를 다루는 영화에서 감독의 연출 실력이 빛을 발한다고 보는데요. 기본기를 바탕으로 한 충실한 영화 작법을 따르되 필요한 순간에 기교적인 연출을 활용하면서 밋밋하고 임팩트가 약할 수 있는 내용에 훌륭한 리듬감과 강약조절을 넣어주는 것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볼 때 ‘리듬감’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할 때는 1시간 반에서 길게는 2시간, 3시간씩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기에 이 시간 동안 관객의 몰입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난이도가 낮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난이도 높은 롤러코스터는 너무 높은 몰입감으로 피로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유려한 리듬감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영화가 재미있느나 없느냐를 결정하는데 스토리의 완성도나 캐릭터의 매력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이 ‘리듬감’입니다.
‘써니’는 리듬감이 굉장히 좋은 영화예요. 배우들의 호흡과 감독의 연출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경쾌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좋은 장면들이 매우 많습니다. 어떤 장면들은 뮤지컬의 연출같이 보이기도 하고요. 좋은 스토리에 매력적인 캐릭터, 연출의 리듬감까지. 이 모든 장점들이 완벽하게 결합되며 한 편의 재미있는 영화가 완성이 되는 것이죠. 써니가 입소문으로 초대박 흥행을 터트린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말에 대해서는 평가가 좀 갈리는 편입니다. 저도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또 생각해 보면 딱히 이것보다 나은 방향도 없는 것 같아요. 조금의 아쉬움은 있지만 무난하게 좋은 엔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리메이크된 일본판 써니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본판 써니에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이 ‘써니: 강한 마음, 강한 사랑’입니다. 뭔 영문을 알 수 없는 제목이 붙었어요! 일본의 부제 사랑은 유명합니다. 리메이크 작 뿐 아니라 그냥 외화가 개봉할 때도 꼭 부제를 붙입니다. 기생충도 ‘반지하의 가족’이라는 부제가 붙어서 개봉했죠. 사실 반지하의 가족 이라는 부제는 괜찮습니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이나 설정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면서 대중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게 지으면 되는 것인데, ‘반지하의 가족’은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하는 제목이니까요. 그런데 영화 내용과 무슨 상관인지도 모르겠고 대중의 흥미를 끌기도 어려운, 하여간 영문을 알 수 없는 부제도 많은 것이 문제죠. ‘써니: 강한 마음, 강한 사랑’이라니. 괜히 제목만 길어지고 의미를 알 수도 없잖아요.
사실 일본과 한국이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 차이가 있어서 한국인이 보기에 이 제목이 더 이상하게 느껴지는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모든 종류의 사랑을 포괄하고 있지만 영화 제목이나 노래 제목에 저 단어가 등장하면 보통은 연인 사이의 사랑을 의미하죠. 하지만 일본어 ‘아이(愛)’는 연인 사이의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의미는 ‘코이(恋)’라는 단어가 별도로 있고 아이(愛)는 보다 폭넓은 의미의 사랑이라는 단어로 쓰이죠. 원래 일본에서는 사랑 고백을 할 때도 ‘사랑합니다(아이시떼루)’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사랑 고백에도 ‘스키’나 ‘다이스키’를 쓰죠.
그러니 실제 저 제목이 한국인이 사용하는 의미의 단어로 바꾼다면 ‘강한 사랑’이 아니라 ‘강한 우정’이 적합하겠죠. 그런데 ‘우정’이라는 단어는 생각보다 창작물의 제목에 많이 쓰이지 않습니다. ‘사랑’처럼 단어 자체가 로맨틱한 뉘앙스를 가진 것도 아니고 은유나 상징이 아닌 직접적인 주제의 표현이라는 느낌이라 ‘우정’은 제목으로 쓰기에는 그다지 세련된 느낌이 아니죠. 세련된 제목이란 늘 빙빙 돌려서 은근하게 의미를 전달해야 하니까요.
아무튼 결코 잘 지은 부제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부제를 잘 못 지은 탓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아주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사실 흥행에 실패하는 경우가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보다 더 흔하고 일반적이기 때문에 굳이 이유를 파악하려 드는 것도 별 의미는 없어 보입니다. 흥행에 실패할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흥행에 성공할 이유가 없어서 라는 진단이 단순하지만 명확해 보입니다.
사실 일본에서 연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는 영화들은 대부분 프렌차이즈 영화들입니다. 해리포터 같은 외국의 유명 프렌차이즈 작품이나 일본 자국 내 인기 프렌차이즈 콘텐츠의 파생작들이 대부분이죠.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많고 인기 드라마의 극장판도 많습니다. 아니면 히트한 만화나 소설의 실사화 작품들도 있고요. 써니는 이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은 더더욱 오리지널 작품이 흥행하기 어려운 시장입니다. 리메이크 작품이지만 한국판 써니가 오리지널 작품인데다 일본에서 유명한 영화인 것도 아니니 사실상 일본판 써니도 오리지널 작품의 한계를 고스란히 가진 채 개봉한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여배우들이 주력으로 등장하는 영화라는 점까지! 그런데 일본은 사실 한국보다는 여배우들의 기회가 많은 편이에요. 하지만 기회는 많아도 배역이 다양하지는 않습니다. 젊은 여배우들이 주로 맡게 되는 역할이라면 하이틴 로맨스물의 여주인공이 가장 흔하고, 소년만화나 남성향 콘텐츠의 실사화 작품에서도 늘 여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이런 역할들을 주로 연기하게 되죠. 또 다시, 써니는 이 중 어느 것도 아닙니다.
써니는 굳이 분류하자면 하이틴 장르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하이틴 장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죠. 애초에 학교도 여고이고, 또래의 남학생이 등장하지도 않아요. 물론 여고생이 등장하는 성장 드라마이니 만큼 첫사랑 에피소드가 나오긴 합니다만, 이것이 작품의 핵심적인 내용이 되지는 않죠.
사실 이래서 써니의 리메이크가 흥미로운 거예요.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제작될만한 내용의 영화가 아니니까요. 다른 나라(한국)의 영화를 리메이크 함으로써 기존에 일본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내용과 스타일의 영화를 보게 된다는 것. 처음에 언급했지만 리메이크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된다면 ‘굳이 왜 리메이크를 했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죠. 사실 이런 의문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일본 영화 중에서는 ‘이런 걸 왜 만들었지?’ 싶은 영화가 정말 많거든요. 뚜렷한 복안이나 셀링포인트 공략 없이 무작정 만들어 버리는 거 같은 영화들.
그런데 사실 일본판 써니는 ‘왜 리메이크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가지고 있는 영화입니다. 그냥 동일한 내용과 캐릭터를 국적만 바꾸고 자국 내 관객에 어필하겠다 라는 단순한 리메이크 복안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에요. ‘일본판 써니’ 로서의 뚜렷한 방향성을 가지고 제작된 영화입니다.
그 방향성은 한국판 써니와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에서 드러납니다. 바로 시대 배경입니다. 한국판 써니의 경우 과거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80년대입니다. 그런데 일본판 써니는 90년대예요. 정확히는 90년대 중후반이죠. 에반게리온 덕후들이 양산되고 아무로 나미에의 Don't Wanna Cry가 울려 퍼지던 그 시절.
한국판 써니의 개봉연도는 2011년입니다. 일본판 써니는 2018년입니다. 이런 개봉 시기의 차이 때문에 작품의 시대 배경이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일본판 써니는 명백히 90년대의 일본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 목적으로 제작된 영화예요.
영화에서는 이 시대를 고갸루의 시대로 정의합니다. 영화 속 대사를 빌리자면 ‘일본 전체가 여고생에 의해 돌아가던 시대’라고 하더군요. 물론 조금은 과장된 표현이겠만.. 이 시대의 일본을 살아보지 않았으니 정확히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실 한국판과 일본판의 맥락 자체는 비슷합니다. 각각 80년대와 90년대를 청소년 계층에 있어서 ‘특수한 시대’로 규정하고 있죠. 일본판의 경우 말했듯이 고갸루의 시대입니다. 한국판은 교복자율화의 시대죠. 네, 일본의 고갸루 시대만큼이나 한국의 80년대도 청소년 계층의 매우 특수한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써니 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많이 제작되었습니다. 대한민국 고교생들이 교복이 아닌 자유로운 복장을 입고 하교길을 돌아다니는 풍경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광경이니까요. 영상으로 담아내기 좋은 특수한 풍경인거죠.
일본판 고갸루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친구들은 교복은 입고 있어요. 그런데 교복을 베이스로 한 다채로운 스타일링이 정말 극한까지 나가버렸죠. 원래 각 세대 별로 유행하는 교복 스타일이 있습니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치마의 길이나 폭이라든지 가디건이나 다양한 아우터의 매치라든지 세대별로 구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고갸루의 스타일링은 단순히 다른 세대의 교복 스타일과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딴 세상의 문화로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들이 많았죠.
일단 핵심 아이템은 루즈삭스와 가디건입니다. 가디건 정도는 무난하지만 루즈삭스 부터는 슬슬 튀어보이는 아이템입니다. 치마는 엄청 짧게 하고 머리는 금발이나 핑크 등 화려하게 염색한 후 부풀립니다. 그리고 태닝으로 피부를 어둡게 한 후 거기에 더욱 검게 메이크업을 해요. 그러고는 아이라인은 엄청 크고 도드라지게 그립니다. 다소 과하게 연출한 갸루 패션의 경우는 무슨 악역 프로레슬러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리죠. 이러고 일상생활을 했던 겁니다. 그 시절 일본 여고생들은.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특수한 유행이라는 것은 어느 시대나 있는 법이지만, 90년대 일본 고갸루 문화는 확실히 정말 신기하긴 합니다. 좀 과장되게 말해서 이세계나 외계의 종족이 현대 사회에 내려온 것 같은 풍경이었죠. 한국에도 일본의 이 신기한 광경들이 인터넷이나(때마침 한국에 인터넷 인프라가 활성화된 시기였죠) 여러 매체로 전해졌습니다. 저도 당시에 참.. 일본의 여고생들이 별나구나, 란 생각을 했었습니다.
일본판 써니는 그 시절의 고갸루 여고생들이 주요인물들로 등장합니다. 이 캐릭터들은 한국판과 마찬가지로 써니 라는 이름의 우정그룹의 멤버들입니다. 우정그룹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으로 쓰이지는 않습니다. 좀 더 익숙한 표현이라면 불량써클이죠. 불량써클이라는 말을 많이 쓰기는 했는데, 사실 이 표현도 아주 적합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한국판과 일본판 모두 그 시대 일진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일진들이지만 별로 나쁜 짓을 하는 묘사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 캐릭터들을 아주 매력 있고 귀엽게 묘사하죠. 그러니까 써니는 일종의 일진 미화물인 셈입니다.
‘일진 미화물’은 장르의 명칭으로 쓰지는 않습니다. 이건 그냥 비판적인 표현입니다. 즉 ‘나쁜 작품’이라는 거죠. 그런데 일진 미화물 이라는 비판을 들을 만한 작품들이 서브컬쳐에서는 꽤나 인기가 있고 흔하게 제작됩니다. 공부만 하는 바른 생활 범생이가 주인공인 작품은 별로 재미가 없거든요. 원래 서브컬쳐나 대중문화의 매력 중 하나가 현실을 벗어나는 일탈적 상황을 간접체험하는 쾌감이니까요. 이런 내용으로 학생들이 등장하는 장르는 보통은 학원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원물의 주인공은 대부분 일진입니다. 하지만 아주 나쁜 짓은 하면 안되기 때문에 뭔가 상식적이고 바른 정신이 박힌 ‘유사 일진’ 혹은 ‘변종 일진’이 됩니다.
그래서 이 변종 일진들이 하고 다니는 짓거리(?)에 기묘한 선이 그어져 있어요. 허용되는 행위와 허용되지 않는 행위. 일단 담배는 핍니다. 일진이면서도 나쁜 짓이라고 하는 게 없으니 담배라도 펴야죠. 당연히 술도 마시고요. 담배와 술은 청소년에게는 금지되어 있지만 성인만 되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되기 때문에 딱히 나쁜 짓이라는 인식이 없습니다. 대중문화에서 청소년이 술 마시는 모습이 나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죠.
보통 일진이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은 학폭입니다. 요즘 사회적으로도 꽤 이슈가 되고 있죠. 듣기로는 80년대, 90년대보다 요즘이 더 심하다고 하더군요. 잘은 모르겠지만 SNS나 단톡방 등 과거에는 없었던 디지털 도구와 환경들까지 활용해 아주 악랄하게 괴롭힌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학폭은 바른 정신이 박힌 변종 일진에게는 절대 금물이 되는 행위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남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행위를 하면 안 되는 거예요.
써니의 멤버들은 이런 짓을 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런 묘사가 없죠. 그런데 써니에는 써니 외에도 비슷한 일진 무리가 등장합니다. 한국판에서는 소녀시대와 상미(천우희) 패거리가 있고 일본판에서는 이 두 패거리를 합쳤습니다. 한국판의 상미 역할의 캐릭터가 일본판에서는 부리타니 라는 이름의 캐릭터로 등장하고 이 부리타니 패거리가 한국판에서 소녀시대가 했던 역할도 같이 하게 됩니다. 이 패거리는 기본적으로 써니와 대립하면서 써니가 넘지 않는 선을 넘어 진짜 일진다운 나쁜 행동을 합니다. 상미는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짓거리를 하고 다니고(학폭이죠) 부리타니는 좀 이상한 짓거리를 해요. 이게 고갸루 문화와도 관련 있는데 고갸루는 특히 일진들 사이에서 유행한 문화였고 이 때문에 고갸루에 의해 많은 사회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보통 원조교제나 입던 속옷 팔기 같은 막장 짓거리죠. 그런데 보통 이런 문제는 청소년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런 행위의 주 수요층인 어른들의 문제인 게 더 큽니다.
아무튼 고갸루가 저지르는 여러가지 일탈 행위들이 일본판 써니에서 묘사되고 있는데요. 사실 부리타니 패거리 뿐 아니라 써니 멤버 중 일부도 입던 속옷 팔기 정도는 하는 걸로 언급이 되요. 물론 말로만 나올 뿐 묘사는 없습니다. 이 대목은 살짝 아슬아슬한 줄타기 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부리타니 패거리는 확실히 막장입니다. 한국판에서 소녀시대와 상미 패거리가 나눠서 보여주는 일탈 행각을 일본판에서는 부리타니 패거리가 전부 다 하니까 이게 한층 더 심각해 보입니다. 한국판에서 유명한 빙의 장면도 일본판에서는 부리타니 패거리가 원조교제나 속옷 판매 같은 미끼로 유인해 낸 아저씨를 협박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벌어지게 됩니다. 아저씨를 폭행하고 돈을 거의 강탈하려고 하는데 아주 심각한 범죄 행위죠. 거기에 당연히 한국판 상미의 본드 사건도 부리타니가 저지릅니다. 부리타니는 본드가 아니라 무슨 약을 했다고 하는데 어떤 약인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이 부리타니 패거리가 하는 행각으로만 봐서는 일본판 써니가 한국판 보다 훨씬 리얼하고 어두운 작품일 거 같은데요. 실상은 반대입니다. 한국판과 비교하면 일본판은 오히려 매우 순한 맛인 느낌이에요. 이건 내용이나 작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일본 하이틴 영화를 보면 강간이나 폭력 같은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는데도 별로 어두운 느낌이 안 드는 영화가 많아요. 물론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요. 나카시마 테츠야 같이 청소년들의 비행과 막장 행각을 정말 리얼하고 어둡게 그려 내는 영화 감독도 있긴 하죠. 하지만 대체로 일본영화의 하이틴 장르는 밝고 가벼운 분위기고, 그 안에 벌어지는 일탈을 넘어선 범죄 행위들을 그다지 심각하거나 리얼하게 묘사하지 않아요.
일본판 써니는 어떨까요? 일본판 써니는 일반적인 일본 하이틴 장르의 영화들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 영화를 리메이크한 일본 영화는 확실히 보통의 일본 영화와는 다른, 뭔가 한국 영화스러운 분위기와 스타일을 가지게 됩니다. 애초에 일본판 써니는 꽤나 원작에 충실한 형태로 리메이크 되었습니다. 내용이 수정된 게 거의 없고, 한국판의 정서와 분위기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갔어요. 그런데도 한국판과 비교하면 상당히 다릅니다. 이게 좀 신기한 일이긴 한데.. 같은 내용에 비슷한 스타일로 제작되었지만 단지 일본 영화라는 이유만으로 한국 영화와는 이렇게 느낌이 달라지는 겁니다. 단지 출연배우가 일본인이고 언어가 일본어라서 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영화 산업 전반의 제작 관행과 구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원작에 충실하게 제작되었지만 그래도 뭔가 일본 정서나 환경에서 맞지 않고 미묘하게 수정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었고 그런 부분들을 조금씩 건드리다 보니 한국판과는 완연히 다른 느낌을 가진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언급했듯 일반적인 일본 하이틴 영화와도 달라요. 한국판 써니와도 다르고, 다른 일본 하이틴물과도 다른 독특한 작품이 나온 거죠. 그래서 일본판 써니가 흥미롭고 감상하기에 독특한 재미를 주는 겁니다. 저는 이 작품을 굉장히 흥미롭게 보았어요.
한국판 써니처럼 어둡지도 않고 평범한 일본 하이틴 영화처럼 가볍고 밝지도 않습니다. 딱 그 중간입니다. 그런데 한국판과 일본판의 차이를 만들어낸 가장 결정적인 요인 한 가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상미와 부리타니 입니다.
앞에서 상미와 부리타니의 차이에 대해 조금 언급하긴 했는데요. 사실 진짜 결정적인 차이는 캐릭터의 모습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나죠. 상미를 연기한 배우는 천우희입니다. 써니에 출연할 당시에도 매우 주목받는 젊은 유망주 배우였고 써니의 히트로 최고 수혜를 입은 배우 중 한 명입니다. 천우희는 이 영화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합니다. 써니 멤버가 아니라서 비중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등장하는 장면마다 주연배우인 심은경과 강소라 못지않은 엄청난 존재감과 무게감을 보여줍니다.
그 반면 일본판의 부리타니는 한국판의 상미와는 전혀 달라요. 한국판의 소녀시대 리더 캐릭터까지 흡수해서 비중은 늘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한국판의 상미와 같은 카리스마는 사라져 버렸죠. 약간 개그 캐릭터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한국판의 분위기를 어둡고 무겁게 만들었던 핵심요소인 상미 캐릭터가 일본판에서 거의 개그 캐릭터가 되어 버렸으니 이로 인해 작품 전체의 분위기에 큰 변화가 생긴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일본판 제작진이 처음부터 한국판의 상미 캐릭터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대해 우려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천우희가 연기한 상미는 너무나도 강렬했으니까요. 나카시마 테츠야의 ‘갈증’ 같은 영화라면 이런 캐릭터가 등장해도 문제는 없겠죠.(실제로 ‘갈증’에는 상미를 순한 맛으로 느끼게 만들 막장 끝판왕 여고생이 등장합니다. 배우가 무려 고마츠 나나...) 하지만 써니는 일본의 90년대를 즐겁게 추억하는 분위기의 작품이 되어야 했고 그렇다면 상미 캐릭터를 절대 그대로 쓸 수가 없죠. 사실 이 캐릭터를 수정하는 방법은 매우 간단했습니다. 바로 캐스팅입니다. 천우희 보다 훨씬 둥글둥글 하고 개그 캐릭터 느낌을 주는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노 카린’이라는 배우가 부리타니 역으로 캐스팅 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고갸루 패션을 하고 있지만 써니 멤버들은(특히 주인공인 나미) 메이크업이 별로 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리타니 패거리는 거의 분장 수준의 메이크업을 하였고 그 중에서도 부리타니가 특히 심하죠. 오노 카린이 원래는 나름 귀엽고 매력 있는 외모인데 이 영화에서는 좀 난감한 비주얼로 등장을 해요. 개그 캐릭터 적인 느낌을 내려고 한 것도 있지만 하여간 한국판의 천우희와는 비주얼 적으로는 완전 동떨어진 캐릭터가 되고 말았죠. 배우 자체의 인지도도 약한 편이고 한국판 천우희가 심은경이나 강소라, 민효린 같은 배우들과도 대등한 존재감을 보여준 반면 오노 카린은 히로세 스즈나 이케다 에라이자 같은 배우들과 나란히 존재감을 보여주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습니다.
사실 한국판에서 천우희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건 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일본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상미와 부리타니의 캐릭터성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전혀 다른 느낌의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다르다기 보다는 원작의 요소가 거세된 느낌이죠. 즉, 알맹이 빠진 맹탕 같은 장면이 되어버린 겁니다. 일본판에서는 여고생들이 담배피는 장면도 안나옵니다. 부리타니 패거리가 주인공 나미를 린치할 때 한국판에서는 민효린이 담배를 피며 등장하지만 일본판의 이케다 에라이자는 담배 피는 장면을 넣지 않았습니다. 사실 여리여리한 민효린에 비해 이케다 에라이자가 모델 출신답게 키도 크고 몸매도 건강미 넘치게 글래머러스 해서 훨씬 세보이는데, 이 장면을 비교해보면 여리여리한 민효린이 오히려 포스가 넘치는 반면 이케다 에라이자는 그다지 포스가 없죠. 발차기 장면만 봐도 제대로 타격감 있게 내리 꽂히는 민효린의 앞차기에 비해 이케다 에라이자는 엉거주춤 옆차기로 영 타격감이 안 살고요.
일본판의 감독이나 배우가 이 장면을 못 살린 게 아닙니다. 그냥 의도적으로 한국판과 같은 살벌하고 폭력적인 느낌을 줄인 거예요. 발차기 장면을 편집 없이 한 번에 보여준 한국판과는 달리 일본판은 짧은 편집으로 여러 컷으로 나누면서 발이 몸에 닿는 순간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판에서 담배가 빠진 것도 단순히 담배피는 모습 자체의 세고 무거운 분위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걸 넘어서서 발차기를 하기 전에 담배를 천우희의 얼굴에 팅겨서 공격하는 용도로까지 쓰기 때문이죠.
사실 한국판에서 천우희가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엄청 살벌한 연기를 보여주니(상대 배우인 심은경이 진짜 무서워서 울었다고 합니다) 민효린도 그에 맞게 엄청 센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가오 잡고 깔끔한 발차기 날리는 정도로도 확실하게 분위기가 안 잡히니까 담배빵 이라는 살벌한 장면까지 넣어 버린 거죠. 여고생끼리 싸우는데 무려 얼굴에 담배빵 선제 공격! 당연히 일본판에서는 절대 불가인 장면이었을 겁니다. 이런 장면이 들어가는 순간 90년대를 밝게 추억하는 훈훈한 하이틴 영화가 아니라 나카시마 테츠야의 갈증 같은 영화가 되어버리는 거니까요.
모든 한국 영화가 일반화될 수는 없지만 대체로 해외에서 알려진 한국영화들이 올드보이 같이 폭력적이고 어두운 영화들이라서 보통 한국영화하면 뭔가 세고 살벌한 영화가 많다는 인식이 해외에는 좀 있는 편이에요. 해외에 유명한 한국영화들 중에 그런 영화들이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써니는 어둡거나 폭력적이라고 할만한 영화가 아닌데도 그런 요소가 꽤 들어 있고 욕설이나 폭력이 많이 들어가는 건 한국 영화의 전반적인 특징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한국영화가 일본이나 중국에서 리메이크 될 때 너무 센 캐릭터나 장면은 수정되는 경우가 많고 써니의 부리타니도 그런 케이스입니다.
하지만 일본판과 한국판 써니는 원래 같은 내용입니다. 몇몇 장면이나 설정이 수정되었지만 한국판에 담긴 어두운 내용들이 대부분 일본판에 그대로 나옵니다. 어른이 된 써니 멤버 중 한 명이 술집 접대부가 된 내용도 그대로 나오죠. 전반적으로 밝은 분위기의 영화에서 이런 어두운 요소를 무심하게 담아내는 것도 굉장히 한국 영화적인 특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나오기 때문에 일본판 써니도 한국 영화적인 느낌이 묻어 나오는 것이죠.
제가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를 많이 보고 느낀 거지만 일본 영화는 살짝 유치하고 뭔가 현실보다는 환상을 품게 하는 내용의 영화들이 많아요. 하이틴 물이 특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장르, 소재 불문하고 굉장히 현실적인 성향을 띠고 그래서 유치하다고 느껴지는 일본 영화와 비교하면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이죠. 그래서 써니의 일본판을 보면 뭔가 ‘어른스러워진 일본 영화’를 보는 느낌이에요. 사실 한국 작품을 리메이크한 일본 작품 대부분이 이런 느낌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의 주인공인 히로세 스즈를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녀가 이 영화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이건 딱히 근거가 없는 얘기이긴 한데요. 굳이 근거가 있다면 히로세 스즈가 인터뷰에서 한국판 써니를 매우 좋아한다고 말한 것인데, 영화 홍보를 위한 립서비스일 가능성도 있지만 전 이게 사실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일본에는 생각보다 한국 영화 마니아들이 많고 배우나 영화 업계 종사자라면 더욱 그런 사람이 많죠.(사실 이건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한국 영화 업계 종사자 중에서 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정도 근거로 판단해 보건데 저는 써니에서 히로세 스즈가 매우 긴장하면서도 설레고 신나하며 연기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까지 유치한 일본 영화를 많이 찍었지만(히로세 스즈는 일본 하이틴 로맨스물의 히로인 역할을 많이 연기했으니까요) 이번에는 평소 동경하던 어른스러운 영화를 찍게 되었다, 라며 기뻐하는 느낌? 말했듯이 별로 근거가 없어요. 그냥 철저히 저의 주관적인 느낌입니다.
다만 그렇게 신나하며 연기하는 히로세 스즈인데도 역시 한국판의 심은경과 비교하면 많이 약했다고 생각합니다. 뭐 영화 자체가 한국판의 센 요소들이 많이 거세되었으니 상미-부리타니 뿐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도 전반적으로 한국판보다 약한 느낌이고 특히 한국판에서 심은경은 그 카리스마 넘치는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도 거의 원톱으로 하드캐리 했다고 느껴질 정도로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었던 터라 히로세 스즈가 일본 영화에서 이것을 재현하기는 무리가 있었을 겁니다. 특히 빙의 장면은... 이건 일본어 자체의 한계이기도 한데 한국 만큼 찰진 욕이 일본에는 없거든요.(야쿠자 영화인 아웃레이지 시리즈를 봐도 욕이라고는 ‘고노야로’ 밖에 안 합니다.) 감독도 배우도 이 빙의 장면은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하지만 결국 답이 없다고 결론 내리고 그냥 따라 하는 걸 포기. 조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죠.(말로 끝내버렸던 심은경과는 달리 뭔가를 집어 던집니다)
심은경 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배우들이 한국판에서 비해 아쉬운 편입니다. 특히 나미와 함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세리카(한국판의 춘화) 역의 야마모토 마이카는 한국판의 강소라에 비해 너무 포스가 떨어지더군요. 실제로 배우가 키도 작은 편이고 갸루 메이크업으로 센 느낌을 내긴 했지만 원판은 그냥 소녀소녀한 외모입니다. 눈매는 좀 세보이는 편이긴 한데..
뭐 사실 아쉬운 거라면 영화 자체가 그렇죠. 한국판 써니가 흥행 대박인 반면 일본판 써니가 흥행에 참패한 것이 영화의 질적 완성도를 대변해주는 결과 같기도 합니다. 뭐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판의 실패는 실제로는 더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이긴 하지만...
다만 그래도 전 이 작품을 좋아하는 게 원작의 팬으로서 리메이크 작이 방향성을 이탈하거나 뭔가 뜬금없이 새로운 요소를 시도 하지 않고(뮤지컬 장면이 새로운 요소이긴 하지만 딱히 튀지는 않고 괜찮았어요) 원작에 최대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을 좋게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원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롭게 볼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한국 영화와 일본 영화의 흥미로운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두 나라 영화를 모두 즐기는 입장이라면 확실히 즐겁고 새로운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트위터 @dsz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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