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진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JTBC의 2020년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국내를 넘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끈 한류 드라마 히트작입니다. 특히 한류 드라마 팬이 많은 일본에서는 ‘사랑의 불시착’과 함께 4차 한류 붐의 주역이었습니다. 코로나 시국으로 OTT 산업이 급성장하던 시기에 특히 넷플릭스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크게 확산되었고 그 흐름을 이끌었던 두 작품이 바로 이태원 클라쓰와 사랑의 불시착이었죠.
이태원 클라쓰는 드라마가 나온 지 2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일본 넷플리스 순위 TOP 10 안에 있을 만큼 일본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는 한류 드라마의 대표 작품답게 한국적인 재미와 장점들도 가지고 있지만 그와 함께 일본 시청자들에게도 폭넓게 어필할만한 특징들도 가지고 있는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이태원 클라쓰의 내용과 정서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와 닮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뭔가 열혈물스러운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한자와 나오키를 비롯한 일본 콘텐츠와 확실히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사랑의 불시착의 경우 내용이 일본에서 리메이크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이태원 클라쓰는 리메이크 작품을 만들기에 딱 좋은 내용입니다. 사실 국내 히트작을 다른 나라에서 리메이크한다고 했을 때 안 좋은 반응이 꽤 나오는 편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좋은 원작을 망쳐버리는 경우에 대한 우려감이죠. 특히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의 퀄리티 격차가 꽤 벌어진 상황이라 한국에서 크게 성공한 완성도 높은 작품을 일본에서 리메이크 한다면 원작에서 매우 열화된 버전의 리메이크작이 나올 거라고 당연하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작품을 해외에서 리메이크로 제작한다는 것은 콘텐츠 산업의 확산성의 측면에서는 분명히 좋은 방향입니다. 사실 ‘써니’와 ‘수상한 그녀’ 시절부터 한국 콘텐츠 기업들은 주도적으로 한국 작품의 해외 리메이크 사업을 추진해왔고 이태원 클라쓰 또한 한국 제작사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일본에서 리메이크가 이루어졌습니다. 원작과 비교해서 완성도가 어떠하든 리메이크 작품의 제작을 통해 꾸준히 새로운 가치들이 창출되는 거니까요.
저는 이태원 클라쓰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에 이 작품이 일본에서 ‘롯폰기 클라쓰’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대를 했고 몇 달이나 이 리메이크작의 방영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한국에서도 티빙을 통해 동 주에 공개가 되는 줄 알았는데 몇 주 정도 늦게 공개가 되더군요. 그래서 그 몇 주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자막도 없이 실시간으로 일본에서 방영되는 걸 봤습니다. 롯폰기 클라쓰가 방영되는 TV아사히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간으로 방영되는 걸 볼 수 있더군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태원 클라쓰의 일본 리메이크 롯폰기 클라쓰는 매우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원작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꽤 볼만한 완성도로 나왔고, 시청률도 잘 나왔습니다. 첫 화는 기대 이하의 시청률로 출발했고 이후 3화까지 시청률이 계속 하락해 안 좋은 분위기가 있었지만 4화부터 시청률이 반등했고 후반부는 동시기 일본 내 방영 드라마 중 시청률 1,2위를 다툴 정도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원작 내용 자체가 엄청나게 재미있고 일본 시청자들의 취향에도 잘 맞기 때문에 리메이크 작에서도 거의 내용 각색을 하지 않고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만든 것이 성공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폰기 클라쓰는 ‘왜 리메이크를 만드는가?’에 대한 훌륭한 해답이기도 합니다. 좋은 원작을 그대로 따라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성공적인 작품이 뚝딱 튀어나오니까요. 물론 그렇게 만드는 것도 말처럼 간단하고 쉬운 일은 당연히 아닙니다.
제가 블로그에 쓴 여러 포스팅에서 몇 번 언급한 사실이지만 저는 기본적으론 ‘원작 중시파’입니다. 리메이크 작품도 그렇고 소설이나 만화, 게임을 영화화할 때 되도록이면 원작의 재미와 장점을 충실하게 살리는 방향으로 작품이 제작되는 것을 선호합니다. 원작을 좋아하는 이유가 리메이크나 실사화 작품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원작 팬의 당연한 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폰기 클라쓰는 원작 이태원 클라쓰를 거의 카피하는 수준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내용도 완전히 똑같고 중요 장면이나 대사까지 원작을 그대로 복붙한 수준입니다. 리메이크 작품에서는 흔한 케이스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까지 판박이 수준으로 똑같이 만든 경우는 생각 외로 드뭅니다. 16부작인 원작을 리메이크에서는 13부작으로 만들었고 회당 분량도 더 짧기 때문에 당연히 원작의 모든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어서 일부 덜어낸 내용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새로 추가되거나 변경된 내용은 아예 없는 수준입니다. 가게의 주방 담당 직원인 리쿠(마현이)의 과거 공장 시절 회상 장면 정도가 원작에 없는 새로 추가된 장면일 거예요. 그 외에는 이 드라마의 모든 장면이 원작의 장면을 대사까지 그대로 가져와서 똑같이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작품의 느낌은 굉장히 다릅니다. 이게 매우 신기한 일이기는 한데, 같은 행동과 같은 대사를 하더라도 나라가 달라지고 언어가 달라지고 배우가 달라지니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원작 중시파가 늘 받게 되는 공격인 ‘원작과 똑같이 만든 거라면 굳이 리메이크를 보는 이유가 있느냐’라는 지적에 대해 반론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원작과 똑같이 만들어서 원작의 장점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그저 나라가 달라지고 배우가 달라지는 것만으로 새로운 느낌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리메이크작을 즐기는 최고의 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폰기 클라쓰는 그런 이점의 완벽한 수준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고요.
나라와 배우가 달라진 차이뿐 아니라 같은 장면과 같은 대사에서도 미묘하게 차이를 만들어낸 부분들도 존재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리메이크가 원작보다 분량이 현저히 짧아졌기 때문에(그래도 13화 분량은 일본 드라마 평균으로는 꽤 긴 분량입니다) 자잘하게 쳐낸 부분들이 많은데 대사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많습니다. 특정 대화씬을 완전히 덜어낸 것이 아니라 동일한 대화인데 대사 몇 마디가 사라져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수아(유카)와 조이서(아오이)가 카페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너 같은 부류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나 같은 부류가 어떤 부류인데요?’,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온실 속 화초’ 다음으로 한국판에서는 조이서가 ‘SNS 몇 번 보고 절 좀 파악하셨나봐요?’라고 대꾸하지만 일본판에서는 이 대사가 사라졌죠. 대화의 분위기나 뉘앙스가 모두 동일한데 이 정도는 없어도 괜찮겠다 싶은 대사는 이런 식으로 다 쳐낸 겁니다. 아주 자잘한 부분에서 어떻게든 분량을 줄이기 위해 엄청 노력을 한 것이죠.
이태원 클라쓰는 중후반부에 조금 늘어지는 전개가 있기 때문에 분량이 줄어든 것이 무조건 단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온 대화 장면에서 몇몇 대사를 쳐낸 경우 대부분 원작 같은 느낌이 살지 못한, 아쉬운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저 개인적으로 리메이크판에서 사라져서 가장 아쉬운 대사는 오수아(유카)가 박새로이(아라타)에게 한 ‘나한테 와’라는 대사입니다. 전체는 ‘복수 같은 거 다 잊고, 나한테 와. 우리도 이제 행복해지자’라는 대사인데 리메이크판에서는 여기서 ‘나한테 와’가 사라져 버렸죠. 이게 약간 애절하게 고백 비슷한 걸 하는 장면이라 굉장히 결정적인 대사였는데 이걸 없애버린 게 굉장히 아쉬웠습니다.
그리고 대사뿐 아니라 화면 구도나 연출에서도 같은 장면을 다른 느낌으로 만든 장면이 많습니다. 분량을 줄이기 위해서이거나, 조금 다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의도로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장면들은 그저 단순히 원작과 조금이라도 달라 보이기 위해서 화면 구도나 연출을 바꾼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당연히 원작보다 훨씬 못한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최승권(료타)이 깡패들에게 명함을 보여주며 ‘내가 이태원 클라쓰 본부장이거든’ 하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태원 클라쓰 팬들이 정말 좋아하는 장면이고 리메이크판에서 어떻게 나올지 상당히 기대를 했는데 너무 실망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연출이 달라진 장면들 중에서는 원작과 다른 느낌이지만 원작 못지않게 좋았던 장면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장면은 경찰서 앞에서 장근원(류가)이 박새로이(아라타)에게 ‘쳐봐(나구레)’라고 도발하는 장면입니다. 한국판에서는 장근원이 박새로이의 몸통을 얼굴로 툭툭 들이밀면서 쳐, 쳐, 쳐 하고 도발하는데 일본판에서는 류가가 얼굴을 들고 아라타의 눈을 바로 앞에서 마주 보면서 나구레~ 나구레~ 나~구~레~ 하는 식으로 도발하죠. 한국판에서도 굉장히 좋아하는 장면인데 일본판에서 다른 식으로 연출했어도 아주 마음이 들더군요.
그리고 앞에서 말한 ‘나한테 와’ 장면에서도 대사가 빠진 건 아쉬웠지만 한국판에서 오수아가 눈물까지는 흘리지 않는데 일본판에서는 유카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오열하는 장면이 나와서 상당히 좋은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장면을 비롯해서 일본판이 한국판에 비해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실 방금 쓴 문장이 이태원 클라쓰와 롯폰기 클라쓰의 가장 핵심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건 개별 작품의 차이라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전반적인 콘텐츠 성향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해외에서 ‘한국 콘텐츠’라고 하면 ‘올드보이’나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작품으로 대표되는 거칠고 살벌한 이미지가 있고 꼭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콘텐츠가 아니라도 생생한 날 것의 거친 느낌은 한국 콘텐츠의 전반적인 특징이기도 합니다. 욕설 같은 경우만 생각해도 그저 ‘고노야로’만 끝도 없이 외쳐대는 일본 야쿠자 영화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그냥 평범한 장르의 콘텐츠에서도 거친 욕설들이 자주 나오죠. 이태원 클라쓰에서도 오수아 같은 아름다운 여성의 입에서 ‘지랄하지마’ 같은 대사가 튀어나옵니다.
그런데 일본 콘텐츠에서는 이런 살벌하고 날 선 느낌이 거의 없습니다. 이태원 클라쓰만 해도 주인공 박새로이부터가 어디 아는 조폭 형님 한두 명은 있을 거 같은(실제로 있죠) 고독한 늑대 같은 느낌의 캐릭터이고 마냥 말랑말랑한 로맨스나 성장물의 분위기는 아닌데 롯폰기 클라쓰에서는 원작의 거칠고 날 선 느낌이 모두 사라지고 그냥 말랑말랑한 소년만화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거의 모든 장면과 대사를 원작 그대로 복붙하듯이 만들었는데도 이렇게 분위기 차이가 엄청나게 나는 리메이크가 되어버린 거예요.
같은 내용인데도 이렇게 큰 분위기의 차이를 만들어낸 핵심 요인은 바로 주인공의 캐스팅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정리해서 한국판에서 박서준이 연기한 박새로이는 ‘야생의 고독한 늑대’이고, 일본판에서 타케우치 료마가 연기한 미야베 아라타는 ‘소년만화 주인공’입니다. 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미야베 아라타와 비슷한 만화 주인공은 ‘미스터 초밥왕’의 ‘세키구치 쇼타’인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태원 클라쓰의 내용 자체가 ‘한자와 나오키’를 비롯해 닮은 일본 작품이 많다고 언급했는데, 그중 하나가 미스터 초밥왕입니다. 거대 요식 기업에 괴롭힘을 당하는 작은 식당의 후계자가 절치부심 노력하여 성공 신화를 이룬다는 내용이라 이태원 클라쓰와 꽤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의 성격도 닮았고요. 심지어 머리스타일까지.
사실 이태원 클라쓰의 리메이크가 일본에서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주인공이 박새로이 머리를 그대로 따라 할 지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가진 사안 중 하나였는데요. 비슷하게 짧은 머리를 했지만 박새로이 머리는 고급 미용실에서 비싼 돈 주고 빡세게 멋 부린 머리라면 아라타의 머리는 그냥 동네 미용실에서 대충 짧게 자른, 견습 요리사 같은 머리가 되어 버렸죠. 타케우치 료마가 인터뷰에서 ‘제작진과 다양하게 의견을 나눈 끝에 머리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밝혔지만 정확히 이런 머리로 결정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타케우치 료마의 얼굴에 박새로이 머리스타일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거나 아니면 모발 특성상 연출하기 어려운 스타일이라서 못한 걸 수도 있지만, 좀 더 순둥순둥하고 말랑말랑한 느낌의 소년만화 주인공 느낌을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스타일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롯폰기 클라쓰의 미야베 아라타는 이태원 클라쓰의 박새로이와 상당히 다른 느낌의 캐릭터가 되었고 당연히 ‘주인공’이라는 절대적인 영향력에 의해 작품 전체의 분위기도 전혀 다르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태원 클라쓰에서 박새로이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살벌하게 소리를 지르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는데 롯폰기 클라쓰에서는 아라타가 같은 장면에서 비슷하게 소리를 지르기는 하지만 살벌한 분위기는 전혀 없습니다.
이런 장면들이 굉장히 임팩트가 있기 때문에 리메이크판에서 이런 임팩트가 사라져 버린 게 확실히 아쉽기는 합니다. 대표적으로 경찰서 앞에서 조이서가 ‘지금만 한번 참고 넘어가면’ 이라고 하자 박새로이가 ‘지금 한번!’이라고 외치며 화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원작의 강렬한 느낌에 비해 리메이크판은 너무 밋밋하게 만들어 버렸죠. 원작에서 박새로이가 ‘지금 한번!’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조이서가 벙찌는 표정이 되어서(이때 조이서의 머리에 박새로이라는 인물이 박히게 되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어버버버 하는 순간을 보여주는 연출이 굉장히 좋았는데 일본판에서는 아오이가 ‘한번 정도는 참아도 되잖아요’라고 해서 아라타가 ‘한번 정도는이 뭐야!’라고 받아치면서 뭔가 임팩트도 없이 어정쩡하게 티격대는 장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박새로이의 그런 날 선 야생의 느낌이 사라져서 반대로 리메이크판의 느낌이 좋았던 장면도 있습니다. 박새로이가 조이서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고 당황하면서 ‘내가 왜 너한테 이런 미안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데’라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는데 일본판에서 아라타는 마냥 순둥하고 말랑한 느낌이라 같은 대사를 하면서 화를 내는데도 로맨틱하게 투정 부리는 장면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아오이가 그런 아라타를 귀여워하며 ‘카와이~’ 하고 외치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게 한국판에서는 없는 추가된(드물게도) 대사거든요. 이런 장면들은 저 개인적으로는 확실히 리메이크판이 원작보다 나았던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새로이-아라타도 그렇지만 사실 원작과 가장 느낌이 다른 것은 여주인공인 조이서-아오이입니다. 여주인공에 대해서는 좀 냉정하게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이태원 클라쓰 방영 당시에도 김다미에 대해서 역할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어느 정도 있었었죠. 별로라기보다는 조금 아쉽다는 정도인데 일본파에서 히라테 유리나는 정말 이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역할에 어울렸습니다.
히라테 유리나는 케야키자카46의 센터로 활동할 때 이상한 안무를 허우적거리며 열심히 추던 모습과 제가 영화에서 본 가장 기괴한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히비키’의 모습으로만 기억에 남아 있는데 롯폰기 클라쓰를 보고 생각보다 너무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와서 정말 놀랐고, 동시에 기뻤습니다. 저는 애초에 이 작품의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도 여주인공의 매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히라테 유리나가 아사미야 아오이로서 어떤 비주얼과 매력을 보여줄지가 가장 큰 관심사였거든요. 그런데 포스터가 공개되었을 때 뭔가 사진 셀렉이 이상해서 실망감에 ‘히라테 유리나도 감당 안 되는 조이서 머리?’라는 제목의 포스팅까지 썼었는데 막상 드라마를 보니 스타일링도 완벽하게 제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비주얼 그대로 등장하더군요. 물론 첫 등장 장면이 하필이면 걸그룹 출신이라고 믿을 수 없는 엉터리 춤을 클럽에서 추거나 어설픈 발음으로 영어 대사를 하는 장면이라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요.
역시 핵심은 ‘캐스팅’이었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이 리메이크의 성공 요인을 ‘원작에서 거의 내용 각색을 하지 않고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듯이 만든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을 통해서 원작의 재미를 충실하게 살렸다면 탁월한 캐스팅을 통해서는 원작과는 다른 리메이크만의 매력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케우치 료마, 히라테 유리나뿐 아니라 다른 주요 배역의 캐스팅도 다 괜찮았습니다. 특히 저는 정말 괜찮았던 배우가 원작에서 안보현이 연기한 장근원(나가야 류가) 역의 배우인 사오토메 타이치입니다. 이 배우가 1화에서 노랑머리로 뭔가 만화 코스프레 같은 비주얼로 등장해서 움짤이나 캡쳐 이미지가 국내 커뮤니티에 올라오며 ‘원작과 비교해 수준 떨어지는 리메이크가 나왔다’고 조롱당하는 근거로 쓰이기도 했는데 이 작품을 제대로 본다면 사오토메 타이치가 정말 맡은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판에서도 안보현이 굉장히 훌륭한 연기를 보여줘서 일본판 배우가 아무리 열심히 잘하더라도 한국판보다는 못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잘해서 거의 안보현과 동급으로 느껴지더군요.
애초에 이 캐릭터 자체가 표면적으로는 박새로이(아라타), 조이서(아오이), 오수아(유카), 장회장(나가야) 다음의 다섯 번째 비중의 캐릭터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박새로이, 조이서 다음의 세 번째라고 해도 될 정도로 은근히 임팩트가 강한 캐릭터라서 배우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배우로 히라테 유리나 다음 두 번째로 사오토메 타이치를 꼽을 만큼 이 배우가 굉장히 훌륭한 연기와 캐릭터를 보여줬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오토메 타이치가 등장한 모든 장면이 원작과 비교해서 아쉬움이 거의 없었습니다.
유카 역의 아라키 유코도 매우 좋은 캐스팅이었습니다. 이태원 클라쓰의 권나라의 경우 아주 예쁘고 매력적이긴 했지만 오히려 그 점이 조금 문제로 느껴지기도 했죠. 특히 캐릭터 설정상 오수아가 ‘상큼이’라고 부르는 조이서에게 미모의 ‘화려함’과 ‘강렬함’에서 어느 정도 기가 죽는 구도가 나와야 하는데 권나라는 누구 앞에 서더라도 화려함과 강렬함에서 밀리는 비주얼이 아니니까요. 즉, 이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미녀라는 말이죠.
그 반면 아라키 유코는 미인이긴 하지만 화려하고 강렬함보다는 야마토 나데시코 타입의 수수한 느낌이 있어서 이 역할에 매우 잘 어울렸습니다. 특히 정말 강렬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히라테 유리나와의 투샷은 이태원 클라쓰의 조이서-오수아의 투샷보다 훨씬 작품의 분위기에 잘 맞았습니다. 연기력도 매우 좋았고요. 물론 1~2화까지는 너무 티 나는 가발을 쓰고 나와서 조금 보기에 난감했지만. 사실 드라마 초반에는 모든 배우들이 뭔가 정돈되지 않은 투박한 느낌으로 등장했었죠. 그러다가 3~4화를 지나면서 안정적인 그림이 나오기 시작하고 시청률도 오르게 되었고요.
나가야 회장 역의 카가와 테루유키는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가장 큰 화제와 기대를 모았던 배우인데 역시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캐릭터도 주인공 아라타와 마찬가지로 원작과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똑같이 소년만화 버전의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아라타가 소년만화 주인공이라면 나가야 회장은 소년만화 악당이 된 거죠.
이태원 클라쓰에서 유재명이 연기한 장회장은 악당이긴 해도 인자하고 담대한 어르신의 느낌도 나고 있었는데 롯폰기 클라쓰의 나가야 회장은 교활함과 비열함이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전형적인 악당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첫 등장부터 ‘도게자 해라!’를 외쳐서 한자와 나오키의 오오와다를 그냥 그대로 데려온 줄 알았습니다. 원작과 비교해서 확실히 투박한 캐릭터가 되었지만 주인공 아라타의 대칭점에서 소년만화 갬-성으로 이 드라마를 이끌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후반부에 병으로 시한부 처지가 되면서 골골 거리는 상태의 연기는 확실히 베테랑 대배우다운 연기 내공을 보여주더군요. 다만 드라마가 방영되는 도중에 카가와 테루유키의 성추문이 터지면서 뭔가 아슬아슬한 상황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크게 마이너스 요인이 되지는 않고 작품이 잘 마무리되었지만요.
그 외의 나머지 배역들도 배우들이 다 매력 있고 연기도 잘했습니다. 류지(장근수) 역의 스즈카 오지는 처음에는 뭔가 배우 같지도 않고 귀여운(남자) 컨셉의 아이돌같은 외모라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보면 볼수록 굉장히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마스크더군요. 이 배우가 넷플릭스에서 제작되는 ‘너에게 닿기를’ 드라마에서 주인공 카제하야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고 하는데 굉장히 기대가 됩니다. 가게 크루인 리쿠(마현이)와 료타(최승권) 역의 배우 사토 호나미와 나카오 아키요시도 괜찮았지만 원작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편이었습니다. 원작에서 마현이 역을 연기한 이주영의 중성적인 미녀 느낌과 최승권 역을 연기한 류경수의 잘 빼입었을 때 나오는 훈남 포스가 리메이크판 배우들에게는 다소 부족했어요. 그래도 역할 자체에는 어울리는 캐스팅이었고 연기도 잘했습니다. 키리노(이호진) 역의 야모토 유마도 좋아하는 캐릭터를 좋아하는 배우가 연기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원작에서 이호진을 연기한 이다윗보다 야모토 유마가 확실히 더 찐따 분위기(?)를 잘 내서 역할에 굉장히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원작 크루 중에서 김토니는 리메이크판에서는 삭제되었습니다. 분량을 많이 줄여야 하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한 자잘한 요소들 뿐 아니라 큼직하게 쳐낸 요소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게 바로 토니입니다. 사실 토니는 외국인이 많이 살고 있는 이태원이라는 지역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한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롯폰기 클라쓰에는 이 캐릭터를 빼고 원작에서 홍석천의 캐릭터를 일본계 브라질리언 여성 캐릭터로 등장시켜서 일본적인 특색으로 대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분량 문제를 언급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리메이크판이 원작보다 열악한 점은 바로 제작비입니다. 롯폰기 클라쓰의 제작비는 원작 이태원 클라쓰의 고작 1/5 수준입니다. 이런 제작비 규모의 차이가 현재 한국과 일본의 영상 콘텐츠 제작 수준의 차이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량 문제 이전에 그저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서 날려버린 장면들이 많은데 특히 마지막화는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죠. 마지막화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박새로이의 주주총회 연설 장면이 리메이크판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수아(유카)가 퇴사한 후 가게를 열었는데 그 가게 모습도 원작에서는 나오지만 리메이크에서는 나오지 않죠. 두 장면 모두 리메이크판에서 어떻게 나올지 제가 굉장히 기대한 장면이라 실망감이 정말 컸습니다.
앞에서 저는 이 리메이크 작품을 ‘성공적이라고’ 좋게 평가하면서도 ‘당연히 원작보다는 완성도가 떨어지지만’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제작비나 분량, 일본의 영상 콘텐츠 제작 시스템과 창작 정서 등 모든 요인으로 따지고 봤을 때 이태원 클라쓰를 일본에서 리메이크해서 원작보다 나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태원 클라쓰보다는 못하더라도 충분히 훌륭하다고 평가할만한 성공적인 리메이크 작품이 나왔습니다. 분량도 많이 줄고 제작비도 한국의 1/5밖에 안 되는 상황에서 이 정도 결과물이 나왔다는 건 솔직히 기대 이상입니다. 이런 좋은 리메이크 작품을 볼 때마다 원작이 가지고 있는 재미와 가치가 2배, 3배로 증폭되는 느낌입니다. 롯폰기 클라쓰가 성공적인 결과를 냈으니 앞으로도 좋은 한국 작품의 해외 리메이크가 꾸준히 추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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