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업영화의 대형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가장 길게 이어져 온 캐릭터는 말할 것도 없이 007 시리즈의 제임스 본드이고 20세기의 대표 액션 프랜차이즈 캐릭터는 실베스타 스탤론의 ‘존 람보’(람보 시리즈)와 브루스 윌리스의 ‘존 맥클레인’(다이하드 시리즈)을 꼽을 수 있습니다. 21세기라면 새로운 배우들로 물갈이를 하면서 영원히 프랜차이즈를 이어가고 있는 제임스 본드와 함께 톰 크루즈의 ‘이단 헌트’(미션 임파서블), 빈 디젤의 ‘도미닉 토레토’(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대표적인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라고 할 수 있겠죠.
앞 문단에서 언급한 수많은 상업영화의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 중에서도 도미닉 토레토는 가장 이질적이고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이 캐릭터가 처음에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주인공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주인공은 폴 워커가 연기한 ‘브라이언 오코너’이고 도미닉 토레토는 1편의 악역 역할이었죠. 하지만 악역이긴 해도 굉장히 입체적인 캐릭터였습니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정하고 마음의 교감을 나누는 특별한 관계성을 구축했습니다. 악역이지만 사실상 주인공과 동급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주인공은 브라이언이었기 때문에 분노의 질주의 속편에 도미닉은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작품인 도쿄 드리프트에는 브라이언과 도미닉 둘 다 안 나왔고요.(도미닉은 카메오 수준으로 잠깐 출연하긴 합니다.) 따지고 보면 도미닉 토레토라는 캐릭터뿐 아니라 분노의 질주 시리즈 전체가 굉장히 독특한 변형과 업그레이드의 과정을 거쳐왔습니다. 지금처럼 ‘도미닉 패밀리’가 중심이 되는 초대형 액션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로서의 면모를 갖춘 건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이 나온 시점부터입니다. 정확히는 5편부터 ‘업그레이드’가 시작되었고 폴 워커의 유작이 된 7편이 월드와이드 흥행 15억 불의 초대박 메가히트를 터트리며 업그레이드가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죠.
시리즈의 규모와 정체성이 업그레이드되면서 도미닉 토레토의 캐릭터도 1편의 설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간단히 요약하면 운전 좀 하는 동네 양아치 캐릭터가 어벤져스 급의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초능력이나 특수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인류 최강 수준의 운전 실력과 격투, 맷집 능력을 보면 사실상 슈퍼히어로와 다름이 없는 수준이죠. 영화에서 하는 역할도 딱 슈퍼히어로의 그것이고요.
분노의 질주 시리즈 1편을 찍을 당시에 빈 디젤이 도미닉 토레토가 장차 이런 괴물 같은 초대형 상업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로 성장할 거라고 상상이라도 했을까요? 절대 그럴 리는 없겠죠. 누구라도 상상 못 했을 겁니다.
사실 빈 디젤이라는 배우 자체만 보면 20세기의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 배우인 실베스타 스탤론, 아놀드 슈왈제네거, 브루스 윌리스의 뒤를 이어 21세기의 대형 액션 스타 배우가 될 자질을 일찍부터 보여주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대표 작품과 캐릭터가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도미닉 토레토일 거라고는 많은 이들이 쉽게 예상은 못했죠.
분노의 질주 1편은 2001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빈 디젤의 배우로서의 명성을 높여준 대표작들이 두 작품 더 있었죠. 바로 2000년에 나온 ‘에일리언 2020’과 2002년에 나온 ‘트리플 엑스(XXX)’입니다.
에일리언 2020은 딱히 시리즈화를 염두에 둔 작품은 아니었는데 빈 디젤이 연기한 ‘리딕’이라는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 있고 인상적이라서 결국 ‘리딕 연대기’라는 프랜차이즈로 시리즈화되었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거둔 건 아니지만 나름 SF 마니아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죠.
트리플 엑스는 분노의 질주와 같은 감독(롭 코헨)이 만들었는데 분노의 질주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저도 비슷한 시기에 두 작품을 보고 트리플 엑스가 훨씬 기억에 남았고 빈 디젤도 트리플 엑스 시리즈와 함께 앞으로 대형 액션 스타로 성장할 거라고 예상을 했습니다. 애초에 분노의 질주에서는 빈 디젤이 주인공도 아니었고 속편에 출연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요. 근데 어이가 없는 건 트리플 엑스의 속편에도 빈 디젤이 출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질주라면 모를까, 트리플 엑스의 속편에 빈 디젤이 출연하지 않은 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뭔가 스케줄이 맞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다지 납득이 안됩니다. 아무튼 트리플 엑스의 속편은 빈 디젤이 아닌 아이스 큐브를 주인공으로 출연시켰고 그 결과 흥행은 전작에 비해 겨우 1/4 수준을 찍었습니다. 제작비도 저렴하게 찍어서 손해는 안 봤다고 하지만... 2017년에 빈 디젤이 다시 트리플 엑스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에서 주인공으로 돌아왔는데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죠. 4편도 찍는다고 했는데 몇 년째 감감무소식인 걸 보면 조만간 공식적으로 엎어졌다는 소식이 뜨지 않을까 싶네요.
분노의 질주와 트리플 엑스라는 빈 디젤의 대표작 두 작품의 향후 엇갈린 운명을 보면 뭔가 트리플 엑스의 잠재력을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흡수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있습니다. 사실 현재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서 도미닉 토레토가 보여주는 제임스 본드와 이단 헌트를 방불케 하는 무적의 첩보요원 같은 면모는 트리플 엑스의 1편에서 보여준 캐릭터가 분노의 질주로 이식된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이런 것은 물론 작품 내 공식적인 설정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빈 디젤이라는 배우의 활동 이력이 캐릭터의 이미지에 흥미롭게 이식되면서 뭔가 어이없게 납득이 가는 캐릭터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도미닉 토레토의 캐릭터가 또 한 번의 흥미로운 변화를 맞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또 일어납니다. 바로 전 세계 영화팬들을 큰 충격에 빠뜨렸던 사건인 배우 폴 워커의 죽음입니다. 폴 워커가 연기한 브라이언이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본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고 실제로 분노의 질주 프랜차이즈 전체와 나아가서는 할리우드 상업 영화 전반의 판도에도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폴 워커의 죽음은 너무도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분노의 질주 시리즈와 도미닉 토레토의 캐릭터는 한 차원 진화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도니믹 토레토 라는 캐릭터가 가진 감성적인 면모에 확실한 설득력을 부여함으로써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내세우는 핵심 주제인 ‘가족애’가 더욱 대중들의 마음에 와닿게 되었습니다.
가족애는 도미닉 토레토의 캐릭터성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핵심 코드입니다. 그런데 도미닉이 말하는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가족의 개념과 범주와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사실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내내 가족 타령을 하는 것이 조금 무리수라는 생각도 드는데요. 이 시리즈는 매 작품마다 마지막 장면을 이른바 ‘가족 만찬’으로 마무리짓습니다.
보통은 이런 ‘집단의 관계성’을 동료애나 우정 정도로 묘사하기 때문에 여기에 가족이라는 칭호를 붙여버리는 건 적어도 분노의 질주 시리즈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차별화의 요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좀 친해졌다고 가족, 가족 하는 건 확실히 조금 무리수로 보입니다. 하지만 폴 워커의 사망 이후 도미닉 캐릭터가 굉장히 감성적인 면모를 가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분노의 질주 시리즈가 보여주는 가족애의 코드가 대중의 감성에 큰 설득력으로 다가오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분노의 질주는 007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시리즈를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11편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발표가 나왔고 2021년에 9편이 나왔으니 이제 두 작품이 남은 셈입니다. 참고로 6편까지 나온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앞으로 두 작품이 더 나오고 끝이라고 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은 마지막 편이 2024년에 나온다고 발표했는데 어쩌면 분노의 질주 시리즈도 같은 해에 마무리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노의 질주 시리즈의 팬들은 도미닉 토레토의 마지막을 어떻게 끝낼지 상당히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그냥 지금까지 시리즈에서 내내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가족 만찬으로 하하호호 끝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장기 시리즈의 주인공을 죽음으로 최후를 장식하게 하는 것도 우리가 여러 작품들에서 흔하게 보아온 엔딩입니다. 다만 저는 역시 도미닉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오히려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 쪽이 훨씬 불안감이 크고 도미닉은 크게 걱정은 안 되는데요.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폴 워커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이겠죠. 영화 속 내용이 아니라 현실에서 너무 큰 비극을 겪은 시리즈이기에(영화 속에서 브라이언은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영화의 내용에서까지 큰 비극을 담아내는 선택은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시 ‘가족 만찬’ 엔딩의 확률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고, 영화에서 살아있는 걸로 되어 있지만 배우가 사망했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브라이언 캐릭터도 시리즈의 마지막 순간에는 CG로 등장시켜서 도미닉과 함께 있는 모습이 나오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그게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가장 멋지게 마무리 짓는 방식이겠죠.
정말 좋아하는 시리즈고 캐릭터이지만, 11편까지 나온다면 아쉽다고 말할 필요도 없이 정말 넘칠 만큼 해먹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즐거웠다’ 하고 깔끔하게 보내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남은 두 작품에서 끝내주게 멋진 모습을 보여준 후, 최고의 액션 프랜차이즈 스타 캐릭터 ‘도미닉 토레토’의 여정이 부디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캐릭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릭터 이야기] 오비완 케노비 (스타워즈 시리즈) (5) | 2022.03.11 |
---|---|
[캐릭터 이야기] 메피스토 (디아블로 2) (1) | 2022.02.12 |
[캐릭터 이야기] 죽음 Death (샌드맨) (1) | 2021.11.01 |
[캐릭터 이야기] 유스타스 '캡틴' 키드 (원피스) (3) | 2021.10.31 |
[캐릭터 이야기] 조상우 (오징어 게임) (0) | 2021.10.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