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쓴 포스팅의 제목은 뉘앙스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습니다. ‘뛰어난 인재가 너무 많아도 문제다’라고 적었는데 모든 것이 잘 돼가고 여유 있는 상황에서 억지 투정을 부리는 걸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진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런 제목을 쓴 것입니다. 서바이벌 방송의 참가자들이 재능과 역량이 뛰어나다면 당연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좋지 않고 적정한 균형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아이돌 서바이벌 오디션 방송에서 ‘얘는 무조건 데뷔다’ 싶은 느낌을 주는 참가자가 너무 많은 것은 결코 좋지 않습니다. 서바이벌의 핵심인 경쟁의 재미가 사라지게 만들고 방송 과정을 통해 반전을 보여주는 언더독의 서사 등도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솔직히 방과후 설렘의 지금 상황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시청률이 낮은 것도 ‘원래 아이돌 오디션은 그런거야~’라고 의미 없이 넘길 일은 아닌 것 같고 방송의 화제성이 너무 오르지 않고 있어요. 냉정하게 현실을 보면 더이상 이런 종류의 걸그룹 서바이벌을 소비할 파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 같습니다. 완전히 척박한 땅을 개척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상황인 거예요. 1,2화까지 방송된 내용을 보면 제작진이 아직까지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지는 않았지만 뭔가 분위기가 아슬아슬합니다. 여러 가지 불안 요소들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고 앞으로 점점 반응이 안 좋아질 거 같은 조짐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 요소들을 미리미리 면밀히 분석해서 앞으로의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시작부터 데뷔조의 윤곽이 나와버렸다?
프로듀스 조작 사태에 따른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엠넷의 새 오디션 ‘걸스 플래닛 999’에는 그다지 많은 지원자가 몰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돌 서바이벌로 스타가 되기를 꿈꾸는 지망생들은 걸스 플래닛 999 이후에 열리는 MBC의 방과후 설렘에 더 관심을 보였고 결국 제작진의 당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8만 명이 넘는 인원이 이 오디션에 참가 지원을 했습니다. 여기서 최종 참가자 83명을 선발했으니 경쟁률은 1000 분의 1인 셈이고 최종 데뷔 멤버로까지 좁히면 무려 10000 분의 1의 경쟁률입니다.
많은 지원자, 압도적인 경쟁률... 그 결과로 당연히 참가자들의 레벨은 엄청나게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형 기획사에 소속된 인재들을 제외하면 현 대한민국 아이돌 지망생들 중 최고의 인재들이 방과후 설렘에 총집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참가자들의 높은 수준은 1화와 2화 방송을 통해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그야말로 출중한 비주얼과 뛰어난 실력들의 향연이었죠. 보자마자 ‘얘는 무조건 데뷔네’라는 생각이 드는 참가자가 한 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무조건 데뷔다 싶은 참가자가 너무 많다 보니 최종 데뷔 멤버의 티오가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모조리 차 버린 것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시작하자마자 데뷔조 윤곽은 나와버렸고 이미 서바이벌은 끝났습니다. 짐작건대 제작진 차원에서는 이미 데뷔조의 윤곽이 90% 이상은 확정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서바이벌 방송이든 ‘제작진 픽’이란 것은 존재합니다. 방송의 제작사와 데뷔 그룹을 운영할 기획사의 관점에서는 전문적인 분석을 통해 최적의 데뷔 그룹 멤버를 당연히 자체적으로 구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데뷔 멤버를 뽑는 것은 시청자의 투표이기 때문에 제작진은 분량 배분이나 편집 등을 편파적으로 하면서 원하는 최종 데뷔 멤버를 완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게 되죠.
1화와 2화의 방송 내용을 보면 제작진이 ‘무조건 최종 데뷔 멤버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최고의 결과를 만들고야 말겠다’라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분량 배분이 심하게 편파적이지는 않았지만 결정적인 건 합격/탈락을 결정지은 방식입니다. 현재 네이버와 리얼라이브 앱을 통해 시청자 투표가 이루어지고는 있지만 1,2화에서 진행된 ‘입학시험’ 경연에서는 이 시청자 투표 결과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일반인 비대면 평가단이 1차 심사를 하고 2차를 4인의 전문 심사위원이 평가했는데 사실상 최종 결정권이 2차 전문 심사단에게 있기 때문에 입학시험 내용만 본다면 방과후 설렘은 프로듀스 같은 시청자 투표 오디션이 아니라 식스틴과 니지 프로젝트 같은 JYP 오디션과 유사한 형태의 오디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걸스 플래닛 999 vs 니지 프로젝트 – 아이돌 오디션의 두 가지 방식
물론 입학시험의 내용 자체만 보면 오디션의 본 경연이라기보다는 ‘예선전의 연장’이라는 느낌이고 원래 시청자 투표 오디션에서도 예선부터 시청자의 투표가 반영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예선전 핑계를 대기에는 참가자들이 몇 주간 준비한 무대를 방송에서 제대로 보여줬고 사실상 본 경연과 다름없는 수준으로 심사와 선발이 진행되었습니다.
입학시험의 결과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소위 말하는 ‘트롤픽’이 될 수 있는 참가자들이 대부분 걸러졌다는 것입니다. 걸스 플래닛 999를 비롯한 기존 걸그룹 오디션에서 제작진들이 트롤픽을 걸러내기 위해 방송 편집으로 온갖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직 시청자 투표가 반영되지 않은 입학시험 단계에서 트롤픽을 대부분 걸러내 버렸다는 것은 그만큼 이 오디션이 최대한 제작진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과후 설렘은 앞으로 이루어질 경연들에서 어떤 방식으로 선발이 이루어지는지 미리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이 투표는 하고 있지만 이게 제대로 결과에 반영이 될지도 모르고 투표하고 있는 상황인 거예요.
심지어 투표앱에 들어가 보면 현재 학년별로 1,2위를 기록하고 있는 참가자가 상시 공개되어 있습니다. 초반부터 주목받는 참가자들에게 표가 몰리도록 노골적으로 유도하고 있고 제작진이 원하지 않는 의외의 결과가 나오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고 있는 시스템인 것입니다.
솔직히 정말 맥이 빠집니다. 물론 제작진이 원하는 최선의 데뷔조 구성은 대체로 시청자들도 납득할 수 있는 ‘정답’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서바이벌 오디션이잖아요. 이렇게 시작부터 결과를 다 확정 짓고는 노골적으로 시청자를 정해진 길로 유도하는 것은 서바이벌 오디션의 본질에서 완전히 어긋나는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노골적인 제작진 픽이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 데뷔 티오에서 3분의 1이나 최대 절반 정도만 먹는 정도라야지... 이건 뭐 티오가 한 자리도 안남을 정도로 확정급 참가자들이 많으니 나머지 참가자들은 그냥 들러리 신세만 된 꼴이잖아요.
데뷔 그룹 멤버는 정말로 7명일까?
역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데뷔 그룹의 멤버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7명이라니!
물론 현재 케이팝 걸그룹 판에서는 점점 그룹의 멤버 수를 축소하는 추세이긴 합니다. 3세대 대표 걸그룹 블랙핑크와 4세대의 선두주자로 치고 나간 에스파는 둘 다 멤버가 고작 4명인 소수 인원 그룹이고 3세대 트와이스의 뒤를 이어 4세대에서 활약할 JYP의 신인 걸그룹도 트와이스보다 2명이 적은 7명의 멤버로 데뷔할 예정입니다. 걸스 플래닛 999로 데뷔하는 케플러는 9명으로 다인원이긴 하지만 이것도 10명 이상씩 선발해오던 프로듀스 시리즈에 비하면 인원이 줄어든 것입니다.
걸스 플래닛 999 결산 총평 – 데뷔 그룹 케플러(Kep1er) 성공 가능성은?
아이돌 그룹의 인원이 너무 많으면 운영하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 단점들이 생깁니다. 그런데 프로듀스 시리즈 등 기존 아이돌 오디션에서 데뷔 그룹을 10인 이상의 다인원으로 구성했던 것은 오디션을 통한 코어 팬덤 확보라는 목표에서 가능한 최대한의 성과를 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케이팝 아이돌들의 평균적인 퍼포먼스 레벨이 올라가고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터라 최상의 퀄리티를 내기 위한 적정 멤버 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대략 4~7인 정도의 인원이 최선이라는 것이 여러 기획사들의 선택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방과후 설렘의 데뷔조 멤버 수가 7명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가 된 것은 아닙니다. 아직 공식 발표되지 않은 데뷔 멤버 수와 앞으로 진행될 구체적인 선발 방식에 대해서 저는 이미 확정된 사항들의 발표를 미루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진이 여러 가지 반응들과 방송이 진행되는 상황을 지켜보며 유동적인 선택을 내릴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데뷔 멤버가 7명이라는 추측은 현재 진행 중인 투표가 한 번에 7명을 투표하도록 되어 있고 1화에서 이 오디션의 마지막 방영일인 2022년 2월 13일에 남게 될 인원수가 ‘7명’이라는 화면이 등장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공식적인 확정 발표는 없었고 7명에서 추가 발탁으로 한 두 명 정도 더 선발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보고 있습니다.
앞에서 현재 ‘데뷔 확정급’의 참가자가 너무 많은 상황이라고 언급했는데, 그 수가 7명의 티오를 꽉 채우는 걸 넘어서 아예 초과해버렸습니다. 즉 데뷔 멤버 수가 7명으로 확정이라면 데뷔 확정급이라는 느낌을 준 쟁쟁한 참가자들 중에서도 몇 명은 최종 탈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작진이 유동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이 있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데뷔 멤버의 수가 7명인 것이 매우 유력한 상황이긴 하고, 극히 낮은 확률로 추가 멤버가 발탁되더라도 1~2명 정도일 것입니다. 9명이라면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 이하의 티오라면 확실히 너무 빡빡한 상황입니다.
1,2화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장면이 없었던 참가자는 사실상 기회가 없는 것이고, 나이가 가장 어린 1학년 참가자도 데뷔 확률은 매우 희박합니다. 사실 학교 컨셉을 내세워 참가자들을 나이별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구분지은 것 자체가 매우 편파적인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학년 구분이 별 의미가 없는 게 아니라 입학시험 이후의 첫 번째 본 경연에서 학년 간의 대결로 심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절대 대등한 팀 대결이 아니라 명백히 유리한 팀과 불리한 팀이 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나이’라는 것부터가 아이돌에게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속성입니다. 아이돌 데뷔 멤버의 나이로 가장 적절한 나이대의 그룹은 3학년이고, 그다음이 2학년입니다. 그리고 나이대로 봤을 때 가장 불리한 그룹은 1학년입니다.
그리고 학년이 곧 실력을 대표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경험과 연습기간 면에서는 높은 학년일수록 유리합니다. 여기서도 가장 불리한 것은 역시 1학년이고요.
종합적으로 봤을 때 가장 유리하고 데뷔 확률이 높은 건 3학년이고, 그다음은 실력으로 메리트가 있는 4학년과 나이로 메리트가 있는 2학년인데 나이는 개인이 커버를 못하지만 실력은 나이가 어려도 특출 난 인재가 나올 수 있으니 역시 4학년보다는 2학년이 좀 더 유리한 입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학년을 구분 지음으로써 1학년 그룹은 들러리이고 3학년이 주력이 되는 상황에서 2학년과 4학년의 가장 특출 난 인원 소수를 포함하는 데뷔 그룹의 구성을 제작진이 유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3학년에 눈에 띄는 인재가 압도적으로 많은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1학년 참가자들의 경우는 현실적으로 데뷔가 목표라기 보다는 방송을 보는 기획사 캐스팅 팀의 눈에 들어 연습생으로 뽑히는 정도를 노려야 하겠죠.
사실상 방과후 설렘은 엠넷의 프로듀스 시리즈와는 이미 전혀 다른 양상의 오디션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0명에 육박하는 다인원 참가자가 치열한 투표 경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제작진이 처음부터 낙점한 극소수의 정예 참가자들이 고작 7명의 데뷔 멤버로 뽑히기 위해 그들만의 경쟁을 벌이는 판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치열한 경쟁이긴 합니다. 들러리 수준의 참가자들에게는 기회가 거의 사라진 것과 동시에 제작진이 밀어주는 뛰어난 참가자라도 절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 주어진 것이죠.
소수 정예가 그들만의 경쟁을 벌이게 되는 양상이 오디션 프로그램으로서 얼마나 흥미진진한 전개를 만들어낼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적어도 엠넷의 프로듀스 시리즈의 성공은 이런 방식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봐도 제작진은 그저 ‘최상의 데뷔 멤버’를 선발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 같고 그것을 위해 아주 노골적으로 편파적인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물론 프로듀스 시리즈는 편파의 극치인 '조작'이라는 불법적 수단을 썼지만 표면적으로는 데뷔권을 혼돈 상태로 만들어 놓고 치열한 투표 경쟁을 유발시켜 시청자들의 과몰입을 유도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돌 오디션 방송의 근본적인 목적은 화제성을 올리고 많은 코어층이 붙게 해서 데뷔 그룹을 지탱할 든든한 팬덤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엠넷의 오디션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방과후 설렘이 원하는 데뷔 멤버 구성과 팬덤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을까요? 기존 오디션과는 다른 새로운 길로 향해가고 있는 이 오디션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낼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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