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걸그룹 오디션 ‘방과 후 설렘’이 사실상 ‘예선전’의 연장이었던 입학시험을 끝내고 학년당 10명씩 총 40명으로 추려진 본 경연 참가자들로 ‘1학기 중간고사’라고 명명된 1차 경연에 돌입하게 되었습니다. 1차 경연은 같은 학년이 하나의 팀이 되어 학년대항전으로 벌어집니다. 1학년과 2학년이 대결하고, 3학년과 4학년이 대결해서 각각 두 팀씩 승자 팀과 패자 팀이 나오고 승자 팀은 탈락자 없이 전원 생존이지만 패자 팀에서는 탈락자가 나오게 됩니다.
사실상 이제부터 본격적인 오디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독특하고 잔인하기도 했던 입학시험을 거치며 시청률은 1화 1.9프로에서 3화 1.0프로까지 떨어졌는데, 4화부터 진행될 1차 경연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지 않으면 앞으로 시청률이 회생할 기회는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
다만 저는 예고편에서 일부 공개된 1차 경연의 무대들을 보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게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이 맞나?’라는 의문. 사실 입학시험 때부터 그랬지만, 이건 너무.... ‘걸크러쉬 일변도’가 아닙니까.
현재 아이돌 걸그룹 판에서 걸크러쉬 컨셉이 대세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까지 그 많은 무대들을 죄다 걸크러쉬 판으로 채운다는 게 과연 바람직한 선택일까요. 이래서야 ‘스우파’와 다른 게 뭔가 하는 생각까지 들고 있습니다. 시청률도 낮고 여러 가지 문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방과 후 설렘’이 지금처럼 계속 걸크러쉬 일변도의 무대를 내세워 과연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지... 이 프로그램에 대해 지적하고 싶은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이번 포스팅에서는 지나치게 걸크러시로만 치우치고 있는 경연 무대의 컨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걸크러쉬에 몰빵한 오디션
걸크러쉬, 걸크러쉬, 걸크러쉬... 온통 걸크러쉬 판입니다. 사실 걸그룹 컨셉이 걸크러쉬가 대세가 되는 것은 오래전부터 예고가 된 일입니다. 케이팝의 해외 시장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특히 서구권에서 새로운 시장이 개척이 되고 있는데 아시아권이라면 모를까 서구권에서는 귀엽고 청순한 컨셉 보다는 섹시하고 멋진 걸크러쉬 컨셉의 선호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선호를 따지기 이전에 문화적인 차이도 큽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권에서는 성인 여성이라도 애교를 부리고 귀여운 행동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서구권에서는 어린이들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죠. 더 나아가서는 이런 귀엽고 (그들의 관점으로는)어린이 같은 행동을 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는 로리콘이나 소아성애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즉 청순이나 큐티 컨셉의 걸그룹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범죄자 취급을 받을 수도 있는 거예요. 특히 서구권 남성 문화는 마초적인 성향이 강해서 비단 큐티 컨셉뿐 아니라 케이팝 전체가 게이들이나 즐기는 문화라고 매도되기도 합니다.
이런 인식 기반이 존재하기 때문에 케이팝 아이돌이 서구권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세고 멋있는 것, 특히 서구권 남성들이 듣는 주류 음악 장르 중 하나인 힙합 기반의 강렬한 음악들로 승부하는 것이 승산이 높습니다.
아이돌 대형 기획사 중에서 힙합 기반의 강렬한 음악과 컨셉을 가장 잘하는 것이 YG이고, 결국 YG는 블랙핑크라는 완성도 높은 걸크러쉬 컨셉의 아이돌을 만들어 전세계적인 대히트를 이루었습니다. 블랙핑크 멤버들 모두 뛰어난 재능과 매력이 있지만 이들이 만약 걸크러쉬가 아닌 큐티나 청순 컨셉의 곡을 불렀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글로벌한 인기는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블랙핑크는 모든 걸그룹 제작사들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모든 아이돌 제작사들은 ‘제2의 블랙핑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핵심 열쇠는 역시 걸크러쉬입니다.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4세대 걸그룹의 판도는 완전히 ‘걸크러쉬 전쟁’이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고 있습니다.
‘방과 후 설렘’을 통해 완성될 걸그룹 또한 2022년 상반기 중으로 데뷔해 4세대 걸그룹 전쟁에 참전할 것입니다. 컨셉은 걸크러쉬가 매우 유력합니다. 오디션 방송이 데뷔 그룹의 컨셉을 미리 공개하는 경우는 없지만 현재 방송의 내용만 보더라도 완전히 걸크러쉬 그룹을 만들기 위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 뻔히 보이고 있습니다. 방송의 시그널 송마저도 ‘픽 미’나 ‘내꺼야’같은 귀여운 곡이 아니라 ‘Same Same Different’라는 강렬한 비트의 걸크러쉬 곡입니다.
입학시험에서 보여준 수많은 무대들도 대부분 걸크러쉬 컨셉이었고 4화부터 진행될 ‘1학기 중간고사’의 무대도 모두 걸크러쉬입니다. 1학년은 에버글로우의 ‘Adios’, 2학년은 ITZY의 ‘WANNABE’, 3학년은 블랙핑크의 ‘Pretty Savage’, 4학년은 에스파의 ‘Black Mamba’를 경연 곡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건 한 마디로.... ‘걸크러쉬에 진심이구나’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선곡입니다. 정말 걸크러쉬 일변도, 걸크러쉬 몰빵, 걸크러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는 수준입니다.
물론 이런 선택이 무조건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현재 걸그룹 컨셉 판도에서 완전히 걸크러쉬가 대세가 된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며, 대세를 거스르는 선택은 모험이 됩니다. 하지만 때로는 뻔히 보이는 해답이 오히려 하책일 수 있습니다. 걸크러쉬가 대세라고 무조건 따라가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몇 가지 불안 요인이 있습니다.
일단 가장 큰 불안 요인은 대세 흐름에서는 당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는 ‘레드오션’ 현상입니다. 모든 걸그룹이 걸크러쉬 컨셉을 하게 되면 당연히 경쟁은 치열해지고 그 안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내는 것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앞으로 4세대 걸그룹 판도의 치열한 경쟁 구도는 갈수록 점입가경이 될텐데 어느 그룹이라도 성공을 장담하기가 힘들 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4세대 걸그룹 판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걸크러쉬 컨셉을 하더라도 거기서 추가적으로 더 눈에 띄는 특출난 요소, 즉 ‘플러스 알파’가 필요합니다. 방과 후 설렘이 아직 방송 초반이긴 하지만 이런 부분을 너무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걸크러쉬 몰빵으로만 가는 건 그다지 현명한 행보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한 가지의 불안 요인은 현재 방송에서 보여주는 무대들은 완성된 걸그룹의 무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오디션의 경연 무대라는 점입니다. 오디션에서는 단기간에 많은 다양한 무대들을 펼쳐 보이게 되는데 말 그대로 ‘다양한’ 무대가 되려면 컨셉 자체도 다양해야 합니다. 이런 무대 컨셉의 선택은 방송 자체의 재미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모든 무대가 걸크러쉬 일변도로 꾸며진다면 방송 자체가 자칫 지루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돌은 원래 곡과 무대만으로 팬들을 끌어모으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보여주는 멋진 모습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활동과 소통 콘텐츠를 통해서 다양한 측면의 매력들을 대중들에게 어필하고 팬층을 확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디션 방송이 잠재적 팬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것도 무대뿐 아니라 참가자들의 다양한 매력과 입덕 요소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과 후 설렘은 이런 오디션 방송의 본질적인 성격을 망각한 채 걸그룹 오디션 보다는 ‘스우파’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걸크러쉬 라는 방향성이 무대 뿐 아니라 무대 이면의 모습에서까지 너무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요. 참가자들 간의 케미라든지 귀여운 입덕 포인트를 조명하기보다는 계속 센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팀 간의 살벌한 경쟁과 무대의 강렬함만을 부각하고 있죠. 정말 스우파스러운 모습입니다.
방과 후 설렘의 제작진 입장에서는 이것이 프로듀스를 비롯한 다른 아이돌 오디션과 차별화된 방향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또한 이건 무조건 잘못되었고 실패할 것이다 라고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오디션으로서 새로운 방향성을 선택한다고 해서 그 결과로 스우파의 짝퉁 같은 방송이 되어버린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차별화’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며 제가 느끼기로는 이런 걸크러쉬 분위기를 일변도로 밀어붙인 것이 원인이 되어 방송 자체가 점점 지루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1학기 중간고사 경연이 펼쳐지고 실제로 인터넷의 반응이나 시청률에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현재로서는 가히 좋은 상황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느낌입니다.
보컬은 신경도 안 쓰나
방과 후 설렘이 걸크러쉬에 몰빵하면서 발생하고 있는 가장 큰 부작용 중 하나는 참가자들의 보컬 역량이 전혀 부각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이돌에게 댄스와 무대 퍼포먼스가 중요한 요소라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아이돌도 가수입니다. 팬들이 아이돌을 소비하는 형태도 무대 영상이나 뮤직 비디오 등 영상 콘텐츠도 있지만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음원입니다. 아무리 비주얼이 좋고 무대를 멋지게 잘해도 음원으로 좋은 사운드를 들려주지 못하면 그 아이돌은 소비할 수가 없습니다. 매력적인 음색과 뛰어난 보컬 역량을 가진 멤버는 아이돌 그룹의 성공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방과 후 설렘은 댄스 경연 방송인 ‘스우파’의 짝퉁 같은 상황이 돼버려서 보컬에는 너무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다른 걸그룹 오디션들을 보면 경연에서 보컬 역량에만 초점을 둔 무대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JYP의 ‘니지 프로젝트’에서는 몇몇 보컬 역량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댄스가 거의 없이 오로지 보컬만을 선보이는 무대를 보여주기도 했고 엠넷의 ‘걸스 플래닛 999’ 또한 아예 경연의 분야를 보컬, 랩, 댄스 등으로 분류해서 해당 분야끼리만 경쟁하는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걸스 플래닛 999 vs 니지 프로젝트 – 아이돌 오디션의 두 가지 방식
아이돌 오디션을 많이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춤 잘 추는 참가자는 많아도 보컬이 뛰어난 참가자는 정말 드물고 이들이 생각보다 잘 살아남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오디션의 최종 단계쯤 가서는 ‘보컬 멤이 없다’는 앓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심지어 방과 후 설렘은 데뷔 그룹 멤버가 7명으로 예상되어 티오가 더욱 빡빡한 상황이라 여기에 괜찮은 보컬 멤버가 단 한 명이라도 포함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현재까지 방송 내용에서는 보컬 역량이 뛰어나거나 매력적인 음색을 가진 참가자들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고 있습니다. 데뷔 티오가 엄청 빡빡한데도 제작진 픽으로 푸시하는 멤버들이 너무 많아서 벌써 티오가 다 차 버렸다고 생각될 정도인데 이 시점에서 보컬 멤버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않으면 데뷔 그룹에 정말 제대로 된 보컬 멤버가 한 명도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댄스팀 뽑는 게 아니잖아요. 아이돌도 가수입니다. 이렇게 걸크러쉬 몰빵한다고 스우파 같은 방송을 만들어 버리면 그 결과 제대로된 아이돌 그룹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매우 불안합니다.
과연 걸크러쉬 일변도를 선택한 방과 후 설렘이 제 불안과는 달리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진행될 1차 경연 동안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될지, 시청률은 반등할 수 있을지 앞으로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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