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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영화사이

[소설과 영화사이] 악의 교전

by 대서즐라 2021.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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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원작영화 리뷰

*스포일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

악의 교전 悪の教典 Lesson of the Evil

‘사이코패스’는 호러나 미스터리 장르의 창작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사이코패스인 살인마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르물은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캐릭터의 전형성은 일반적으로 정립되어 있다고 판단하기 쉬운데 실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이코패스의 전형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면 어떤 캐릭터를 꼽을 수 있을까요? 사실 창작물에 등장하는 유명한 살인마 캐릭터들은 사이코패스의 사전적 정의에서 다소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텍사스 전기톱 학살’이나 ‘할로윈’ 시리즈에 나오는 살인마 캐릭터를 사이코패스의 전형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살인마들보다는 차라리 ‘공공의 적’에 나온 조규환 같은 캐릭터가 더욱 사이코패스의 사전적 정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살인마 캐릭터들 모두 공감 능력의 부재로 타인을 해치는 것에 대해 망설임이 없다는 점에서는 사이코패스의 범주에 들어가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공감 능력의 부재 만으로 정신 나간 대량 학살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항상 뭔가 추가적인 정신병적인 요소가 섞여 들어가 있죠. 

공감 능력의 부재는 살인을 망설이게 만드는 심리적 장치가 망가진 케이스, 즉 자동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멈춰 있던 차가 앞으로 굴러가지는 않습니다. 차가 굴러가려면 엔진에 시동이 걸려야 하고 엔진을 가동 시킬 연료도 필요합니다. 그런 엔진이나 연료 같은 역할을 하는 살인마의 심리적 요인은 다양하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공공의 적


예컨대 ‘쾌락살인마’라고 불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살인을 성욕이나 혹은 보다 복합적인 욕구의 해소로서 저지르게 되는 케이스인데, 말 그대로 이들에게는 살인이 삶의 가장 큰 기쁨이자 쾌락입니다. 통제되지 못한 성적 욕구가 강력 범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흔한 어두운 일면 중 하나입니다. 혹은 범죄까지는 아니어도 성적 행위에 폭력을 동반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나타날 수 있는 성향입니다. SM 플레이가 대표적이고(본격적인 하드코어 SM 플레이라면 일반적인 영역을 벗어난 특이 취향이라 할 수 있지만, 욕설 등 거친 언어적 표현이나 스팽킹 정도의 소프트한 행위라면 평범한 사람들도 시도해보는 범주입니다), 애초에 성행위 자체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은 수반하고 있으니까요.

보편적으로 알려진 ‘정신병’이 원인이 되어 살인을 저지르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망상장애나 조울증, 조현병 같은 심각한 정신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는 케이스죠. 아니면 단순히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고요. 사실 너무 화가 나서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치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난다면 역시 정상의 범주를 벗어난 정신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공감 능력이 부재한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면 대량 살인마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런 비정상적인 정신병적 요인이 없이(혹은 매우 희박한 상태로) 단지 공감능력의 부재 만으로 대량 살인을 벌이는 캐릭터가 있다면 이런 캐릭터야 말로 사이코패스 라는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행동 양태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본 창작물 속 대량 살인마 캐릭터 중에서 그런 양태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 기시 유스케의 스릴러 소설 ‘악의 교전’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 하스미 세이지 입니다. 


물론 하스미 역시 단순히 공감능력의 부재 만으로 살인을 반복해서 저지르는 성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조현병이나 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보기는 어렵고 쾌락살인마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스미 스스로가 ‘왜 살인을 저지르는가’ 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대해 ‘익스트림 스포츠’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정확히는 그런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마니아들과 자신의 살인 동기가 유사하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예시로서 든 것 뿐이긴 하지만요. 하지만 그런 예시로서 굳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언급했다는 건 하스미가 살인을 거침없이 저지르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이 어느 정도는 그런 방향과 연관이 있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에서 하스미와는 다른 완전한 쾌락살인마인 캐릭터를 따로 등장시킴으로써 하스미의 성향을 쾌락살인마와 분리시키기는 합니다. 본 이야기의 진행 시점이 아닌 하스미의 과거 회상에 등장하는 캐릭터로 클레이 라는 이름의 쾌락살인마입니다. 이 캐릭터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창작물 속 살인마 캐릭터와 닮아 있습니다. 하스미는 클레이가 자신과 비슷한 존재라고 느껴 결국 친구가 되고 그와 함께 살인을 저지르며 여러 가지를 배우지만, 본질적으로는 자신과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알게 되고 결국 그를 죽이게 됩니다. 

하스미가 클레이를 살해한 것은 순전히 합리적인 뒷수습의 차원이었습니다. 물론 연쇄 살인의 본원 자체는 클레이가 맞았지만 하스미 역시 살인에 동참했기에, 자기 몫의 혐의까지 모두 클레이에게 떠넘겨 말끔히 뒷수습을 한 것이었죠. 이렇듯 하스미의 살인은 대부분 특정한 상황을 해결하고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이루어집니다. 불안정한 정신병적 요인이 아닌, 철저히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죠. 적어도 하스미 본인은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했듯 하스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에 대해서 익스트림 스포츠 마니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또한 작품에 ‘게임’ 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죠. 하스미에게 살인은 그 상황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지만, 그가 살인을 저지르면서 스릴과 함께 일종의 오락적인 재미를 느끼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익스트림 스포츠


하스미는 욕망에 충실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다양한 대가와 보상들을 ‘성취’해내는 순간의 자극에 대단히 큰 만족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좀 의미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결국은 인간의 삶 자체가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켜 줄 보상을 획득하기 위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하스미의 동기는 평범한 사람의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공감능력의 부재라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더해져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침 없이 살인을 일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하스미 세이지를 순수하게 사이코패스의 정의에 가장 가까운 살인마 캐릭터로 꼽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하스미가 살인을 하면서 느끼는 일종의 오락적인 재미를 일반적으로 게임 등을 하면서 얻게 되는 성취감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스미가 예로 든 것처럼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심리의 경우, 그 행위 자체의 즐거움도 크겠지만 그보다는 보통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상당히 무뎌진 상태인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경계에 대한 무뎌짐은 반복된 성취에 의해 과도하게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 즉 과신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들이 이성적으로 위험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죠. 하지만 그런 행위(살인과 익스트림 스포츠)에서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 위험을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들에게 거침없이 그런 행위에 뛰어들게 만드는 심리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의 교전’의 후반부 클라이막스에서 하스미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행위를 결단성 있게 저지르고 만 것은 그가 그동안 살면서 쌓아온 수많은 살인의 경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정말로 어렵고 위험한 순간들이 수도 없이 있었을 테고, 그런 순간들을 하스미는 계속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며 살아 왔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그는 자기 부모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강도 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자기 몸에도 칼을 쑤셔 박았습니다. 어설프게 한 것도 아니고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정도의 큰 상처를 스스로 자기 몸에 입힌 것입니다. 본인의 혐의를 벗겨줄 거짓말에 리얼리티를 부여하기 위하여. 이런 어려운 게임들을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극복하여 온 것이 하스미의 인생인 것입니다. 그의 선천적인 성향과 함께, 후천적인 경험치의 누적이 더욱 그를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로 완성시켰던 것이죠. 

기시 유스케의 소설 ‘악의 교전’은 여러모로 놀라운 작품입니다. 하스미 세이지 라는 사이코패스 캐릭터의 완성도는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가 작중 저지르는 충격적인 사건들은 이런 종류의 자극적인 창작물의 내용에 익숙해진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엄청난 경악을 안겨 줍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기시 유스케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되었고 영화와 만화로도 만들어질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영화와 만화 역시 원작 소설에 누를 끼치지 않을 훌륭한 완성도를 보여줍니다. 

만화는 원작에 굉장히 충실하게 만들어졌습니다. 대사와 세부적인 장면들까지 원작에 나오는 묘사를 매우 충실하게 만화책 지면으로 옮겨냈죠. 물론 생략되거나 추가된 내용이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엔딩에서 원작 보다 더 긴 후일담을 그려낸 것이 아주 좋았습니다. 원작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끝나지만, 만화책에서는 그것이 현실이 된 상황을 보여주면서 막을 내리죠.(물론 마지막 장면의 경우 그저 상상일 뿐일 가능성이 있지만요)


영화는 당연히 만화처럼 원작에 충실하게 만들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영화 한 편에 담기에는 원작의 분량이 상당히 많습니다. 영화 보다는 시즌제 드라마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내용입니다. 내용도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많습니다. 그 많은 등장인물들 하나하나가 개성이 넘치고 그들만의 어둡고 무거운 드라마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영화판에서는 많은 내용이 축소되고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인 흐름과 큰 사건들은 동일하게 전개됩니다. 소설과 만화판을 다 읽었지만, 영화판에서 삭제되어 아쉽다고 생각한 내용이나 캐릭터는 딱히 없었습니다. 영화의 내용만 놓고 보더라도 딱히 부족한 부분은 보이지 않으며, 원작 내용에서 말끔하게 다이어트를 한 느낌입니다. 더 날렵하고 리듬감 넘치는 작품이 되었죠.

영화판이 공개되기 전에 TV 드라마판으로 제작된 2시간 분량의 프롤로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롤로그의 내용이 영화판에 미처 넣지 못한 원작의 내용을 담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작에 없던 내용을 추가해서 작품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악의 교전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완벽한 것이기에 드라마판의 내용은 불필요한 사족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드라마판의 내용을 보지 않더라도 영화판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어려움이 없습니다. 거기에 드라마판을 본다고 해서 영화판의 내용이 더 깊게 와닿는 것도 아니고요.(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요)


드라마판의 주요 내용은 원작에서 하스미의 회상으로만 간략하게 언급되던 미국 시절 이야기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과, 학교의 상담교사 미즈오치 사토코의 이야기가 원작과는 전혀 다른 비중으로 그려지는 것입니다. 전자는 의미 있는 확장이지만 후자는 확실히 사족 느낌이 듭니다. 미즈오치 선생은 괜히 비중만 늘어서 어이없는 희생양이 된 꼴이죠. 원작에서는 별 탈 없이 살아남았으니까요.

그런데 드라판에서 거의 페이크 주인공(혹은 페이크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츠리이인데, 원작에서도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이므로 드라마판에서 이 인물을 비중 있게 그려낸 건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츠리이의 어두운 비밀은 영화판만 보더라도 확실하게 밝혀지는 내용입니다. 츠리이의 방에 피 묻은 지렛대가 놓여 있는 장면이 확실히 나오고 사망 후 츠리이의 집 지하에서 아내로 추정되는 시체가 발견된 소식도 학생들에 의해 언급이 되거든요. 

확실히 이 드라마판의 내용은 별로 필요도 없고 영화판의 내용만으로 (거의)완벽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했듯이 원작의 내용 중 꽤 많은 내용이 삭제되었는데 전체적인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거든요. 차라리 빼버린 게 나았다 싶은 에피소드도 몇 가지 있고요. 대표적인 것이 열혈 교사 사나다의 에피소드입니다. 사나다는 아예 드라마판과 영화판에 등장조차 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비슷한 소노다 선생 역시 삭제되었죠. 

하스미가 살면서 저지른 무수한 살인과 범죄 행위들은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과감한 과정들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스미가 본 스토리 진행 시점에서 저지르는 범죄들 외에 과거의 사건들은 그 디테일한 내용이 작품에서 거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본 스토리에서 전개되는 하스미의 디테일한 범죄 행위들을 보면 과거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아슬아슬한 행위들을 해왔단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디테일한 전개를 보면 완벽한 계획 처럼 보이면서도 굉장히 운이 좋게 상황이 풀린 경우가 많거든요. 그 중 가장 아슬아슬한 사건이 바로 사나다에게 음주운전과 살인미수를 뒤집어 씌우고 학교를 그만두게 만든 사건입니다. 


사나다가 여학생 중 누군가가 교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물론 그 교사는 하스미 입니다) 진상을 파헤치려 하자 하스미는 당장에 사나다를 제거할 계획을 세웁니다. 이 계획이 매우 즉흥적이면서도 과감했는데 하스미의 과거 범죄들도 이런 식으로 즉흥적으로 저질러 왔다면 그 동안 체포되지 않고 멀쩡히 살아온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냥 기적적으로 운이 좋았다 라고 밖에 설명이 안 되거든요. 

영화판 악의 교전을 보고 개연성도 없고 말도 안 되는 내용이다 라고 혹평하는 반응도 꽤 있습니다. 사나다의 에피소드가 삭제된 건 이런 반응이 그나마 덜 나오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기여를 했을 것입니다. 

사나다와 이름이 비슷한 체육교사 소노다 역시 영화판에서는 삭제된 원작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입니다. 삭제되었다기 보다는 두 명인 체육교사 캐릭터를 한 명으로 합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야마다 타카유키가 연기한 체육교사 시바하라는 원작의 소노다가 보여준 활약상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하스미를 막기 위해 대치하다가 살해당하는 내용은 똑같지만 소설에서 하스미를 죽음의 궁지까지 몰아넣었던 소노다와는 달리 시바하라는 아무것도 못하고 간단히 제거되어 버리거든요.

사실 시바하라를 연기한 야마다 타카유키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의문인 캐스팅입니다. 이 영화에 유명한 배우들이 꽤 출연하고 있는데 하스미 역의 이토 히데아키가 그야말로 영화 전체를 압도적으로 지배하다 보니 그다지 다른 배우들은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하스미 외에도 흥미로운 캐릭터들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지만 영화판에서는 그 많은 캐릭터들 하나하나의 개성을 만족스럽게 부각시키는 것은 애초에 무리이고, 하스미 캐릭터 한 명에 초점을 맞추고 사건 전개에 집중한 것은 매우 타당한 선택입니다. 다만 그래도 몇몇 중요 배역들은 유명 배우를 캐스팅했는데 한국도 그렇지만 역시 영화를 흥행시키기 위해서는 출연 배우들의 이름값이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연인 이토 히데아키가 충분히 이름값 높은 배우이긴 하지만 그 외에도 두 세 명은 더 필요하거든요. 야마다 타카유키, 니카이도 후미, 소메타니 쇼타 같은 유명 배우들이 그런 사연으로 합류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죠.


다만 니카이도 후미와 소메타니 쇼타의 경우 영화판에서 비중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원작 기준 중요 인물인 게 분명한데 야마다 타카유키의 시바하라는 그런 중요 배역과는 성격이 다른 캐릭터입니다. 물론 나름 비중은 있습니다. 애초에 작품의 후반부에 하스미가 저지르는 충격적인 사건의 발단 자체가 시바하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시바하라가 야스하라 미야 라는 여학생을 협박하여 성희롱 하는 것을 해결해주는 과정에서 하스미와 미야의 부적절한 관계가 시작되었고 결국 이것이 미야를 비롯한 학생들 전체의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는 내용이거든요.

원작 기준으로 시바하라는 그냥 쓰레기 캐릭터예요. 소설에서는 교사가 아니라 야쿠자 똘마니나 해야 될 것 같은 인물이라고 묘사되는데 만화판에서의 캐릭터 디자인을 보면 정말 혐오스러운 캐릭터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영화판에서 이 캐릭터를 연기한 야마다 타카유키는 미남입니다. 로맨스물의 주인공 역할도 자주 맡았었고 그냥 일본 영화계에서 상당한 지명도를 가진 인기 배우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볼품없는 추리닝 복장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최대한 잘생긴 외모를 억제(?)하고 등장하긴 하지만... 그래도 원작의 시바하라 같은 막장 쓰레기 교사 느낌은 1도 나지 않습니다. 


영화에서 시바하라가 미야를 은밀한 장소로 불러내는 장면을 보면 원작에서와 같은 추악한 희롱이 아니라 그냥 교사와 학생이 밀회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납니다. 실제로 미야는 나중에 하스미와 그런 식으로 밀회를 하게 되는 캐릭터고요. 거기에 시바하라가 멋진 드럼 연주를 선보이며 밴드부 학생들에게 호감을 사는 장면도 영화판에서 새로 추가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야마다 타카유키 정도의 배우를 캐스팅하다 보니 시바하라의 캐릭터 자체가 원작보다 상당히 이미지 개선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소설에서 진짜 목숨을 걸고 학생들을 지키려고 했던 소노다의 캐릭터도 합쳐져 있다 보니 분명히 원작과는 다른 이미지가 된 게 사실입니다. 물론 소설의 소노다 처럼 하스미와 혈투를 벌인 건 아니지만(소노다는 결국 죽지만 하스미도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나름 하스미를 제압하려는 시도 자체는 했습니다. 하스미가 총을 든 걸 보고도 용감하게 달려드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원작의 시바하라는 이런 모습과는 전혀 거리가 멀거든요. 그런데 또 어이없는 게 하스미에게 달려들다가 하스미가 던져준 미야의 팬티를 받아들고는 냄새를 맡고 ‘미야?’ 하고 마지막 대사를 날린 뒤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게 영화판 시바하라의 최후입니다. 이런 모습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해 봤을 때 야마다 타카유키의 시바하라 캐릭터는 뭔가 농담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애초에 감독이 미이케 다카시. 살벌한 분위기의 스릴러 장르에서도 은근히 장난 스러운 블랙 유머를 빠뜨리지 않죠.


블랙 유머라고 하니, 이 영화에서 제가 본 최고의 블랙 유머 명장면이 나옵니다. 사실 원작에도 있는 장면인데, 영화판에서 정말 맛깔나게 잘 살렸죠. 바로 동경대를 목표로 하는 전교 1등 와타라이의 최후입니다. 와타라이가 하스미에게 ‘선생님, 저 토다이(동대=동경대)에 가야 돼요’ 라고 하자 하스미가 ‘유 아 고잉 투다이’ 라고 재치 있게 받아치며 한 방에 죽여버리는 장면이죠. 사실 원작에서 와타라이가 꽤나 밉살스러운 캐릭터라서(자기가 살기 위해 교묘하게 친구들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 넣습니다) 하스미가 재치 있게 받아치며 죽이는 장면이 묘한 카타르시스가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스플래터 영화처럼 유쾌하게 살육을 즐기는 장르는 아니지만, 이런 악취미스러운 블랙 유머의 센스는 확실히 감탄이 나오게 하는 면이 있어요.

영화판에서는 이 장면이 간단하면서도 더 임팩트 있게 처리됩니다. 와타라이가 토다이에 가야 한다는 말을 하자 하스미가 ‘응? 투다이?’ 라고 짧게 받아친 후 바로 총을 쏴버리죠. 원작과 상당히 느낌이 다른데 저는 영화판이 블랙 유머의 느낌이 더 강해져서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정말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하스미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연출이었거든요. 이 장면에서 이토 히데아키의 연기가 정말 일품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이토 히데아키 외에는 배우들이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소메타니 쇼타와 니카이도 후미 정도의 유명 배우는 아무리 원작에 비해 비중이 축소되었다고 해도 역시 어느 정도는 눈에 띕니다. 둘 다 중요 배역이기도 하고요. 소메타니 쇼타와 니카이도 후미는 소노 시온의 ‘두더지’에 출연하며 둘 다 놀라운 연기를 선보여 큰 주목을 받았고 일본을 대표하는 젊은 남녀 배우의 반열에 올라갔습니다. 두더지와 악의 교전이 개봉한 시기를 생각해보면 두더지에 출연한 직후 두 사람이 함께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혹은 제작 위원회의) 눈에 들어 나란히 캐스팅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더지


원작과 비교해 봤을 때 소메타니 쇼타는 살짝 미스캐스팅입니다. 순수하게 비주얼 싱크로의 측면에서 본다면 말이죠. 소메나티 쇼타가 연기한 하야미 케이스케는 원작 기준 키도 크고 날라리 느낌이 나지만 똑똑해서 성적은 우수한, 학원물에서 흔히 보는 일종의 치트키 캐릭터입니다. 다만 그런 비현실적인 치트키 캐릭터에서 뭔가 2프로 정도는 부족한(현실적인) 느낌입니다. 예를 들어 데스노트의 야가미 라이토 같은 느낌이 나는데 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천재는 아니고 거기에 좀 더 날라리틱해졌죠. 다만 이런 캐릭터의 특성상 하스미와의 대립은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하스미의 상대가 될 만한 인물은 없지만 그나마 하야미와의 두뇌 싸움이 어느 정도 이 작품 내에서 긴장감을 주는 대결입니다. 당연히 결과는 하스미의 완승이었지만 하스미도 이 승리를 위해 꽤 많은 노력과 연구를 했거든요. 그런데 영화판에서는 이 내용도 축소가 되었기 때문에 대결 자체도 시시하게 끝납니다.

대결 내용도 축소되었고 캐릭터의 비중도 줄었지만 그래도 영화판만 보더라도 하야미는 기억에 남는 캐릭터입니다. 아무리 원작 보다 비중이 줄었어도 하스미의 비밀 중 하나(도청기)를 찾아낸 성과는 얻은데다(하스미가 ‘Excellent!’ 하고 칭찬합니다) 어찌되었든 하스미와 대결 자체는 한 셈이니까요. 거기에 소설 이미지와 비교하면 미스캐스팅이라고 했지만 영화판 자체의 역할로만 놓고 보면 소메나티 쇼타의 캐스팅은 매우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보다 비중이 줄었지만 하야미는 매우 중요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짧지만 확실한 임팩트를 만들만한 배우의 역량이 필요한데 소메타니 쇼타가 그걸 매우 훌륭하게 해냈죠. 사실 원작의 하야미 처럼 소메타니 쇼타도 날라리 느낌과 똑똑이 느낌을 동시에 낼 수 있는 배우니까요. 


이토 히데아키와 소메타니 쇼타는 악의 교전을 찍고 2년 쯤 뒤에 야구치 시노부 감독의 ‘우드잡’에 함께 출연합니다. 대부분의 좋은 배우들이 그렇듯이 두 사람도 연기와 이미지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고, 우드잡에서는 악의 교전과는 전혀 딴판의 캐릭터를 선보이는데 당연히 훌륭한 연기와 캐릭터 소화력을 보여줍니다. 우드잡도 제가 악의 교전 못지않게 좋아하는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 중 하나가 두 배우의 케미였습니다. 악의 교전과 우드잡에서 두 배우가 함께 있는 장면이 전혀 다른 분위기가 나서 비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우드잡


니카이도 후미가 연기한 카타기리 레이카는 일단 소설의 이미지에는 상당히 부합하는 캐스팅입니다. 이 레이카라는 캐릭터가 사실은 소설에서 굉장히 중요한 캐릭터입니다. 어찌보면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더라도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하스미이고 실제로 그렇지만, 하스미를 나이트메어의 프레디나 13일의 금요일의 제이슨 같은 역할로 생각한다면 그런 괴물 살인마에게 최후까지 도망다니며 저항하는 호러퀸 역할을 하는 것이 레이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지션적으로는 그런데, 실제 레이카는 그런 호러퀸 스러운 활약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포지션적으로 주인공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주인공이 아닌 것이죠. 하스미 외에는 주인공이라고 할 만한 캐릭터는 없는 겁니다. 

레이카가 호러퀸이자 주인공 포지션의 캐릭터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특별한 능력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이 뭔가 애매합니다.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는 알 수 없어요. 정확히는, 레이카가 이 능력을 바탕으로 뭔가 결정적인 행동에 나서지를 않아요. 레이카의 이런 소극적인 행동은 굉장히 현실적인 전개이기도 합니다. 


레이카가 가진 능력이란 특정한 인간이 가진 ‘위험성’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초능력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뛰어난 관찰력과 직관력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레이카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위험한 인물을 파악해낼 수 있습니다. 레이카는 그런 인물에 대해 ‘무섭다’고 느낍니다. 이것이 하스미와 같은 악인의 ‘악한 본성’을 파악하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예를 들어 레이카가 무섭다고 느낀 인물 중에서 체육교사인 소노다가 있는데, 이 인물은 악인은 아니거든요. 다만 소노다는 하스미가 ‘학교가 아닌 격투기 경기장이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평할 정도로 거의 인간 흉기 수준의 격투기 달인인지라, 그런 인물이 학생 지도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일이라 느껴 레이카의 레이더가 발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소노다는 반항하는 학생을 지도하다가 학생이 피를 흘리게 만들기도 했으니까요.

레이카는 하야미와 친합니다. 거기에 나고시 유이치로 라는 남학생 한 명이 더 끼어서, 이 3인방이 학교에서 단짝처럼 어울립니다. 날라리 끼가 있는 하야미와는 달리 레이카와 나고시는 비교적 평범한 학생입니다. 물론 레이카와 나고시 역시 나름의 비범함을 가지고 있고 그 점이 하야미 같이 튀는 학생이 이들과 단짝으로 어울리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가장 평범하고 별거 없는 캐릭터로 보였던 나고시가 최후에는 하야미도 레이카도 못해낸 일을 해냈기 때문에(하스미를 속이는데 성공함) 결국은 이 3인방 모두 핵심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영화판에서는 레이카의 비중이 상당히 축소되었습니다. 하스미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다 그렇지만 이 캐릭터가 특히 더 그래요. 소설에서 레이카에게 포지션상 주인공의 지위를 부여하는 특수한 능력은 영화에서는 언급도 되지 않습니다. 그저 하야미가 하스미에 대해 조사하는 걸 ‘그만두는 게 좋겠어’ 하고 걱정하는 수준이죠. 물론 소설에서도 레이카가 별 역할이 없는 건 동일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결정적인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 캐릭터거든요. 그나마 나서서 한 행동도 미야가 시바하라에게 성희롱 당하고 있다고 하스미에게 알린 것이었는데, 이로 인해 하스미와 미야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것이 후반부의 참극이 벌어지게 된 원인이 된 걸 생각하면 오히려 레이카의 이 행동이 큰 불행을 불러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따져보면 꽤 흥미로운 캐릭터입니다. 레이카는 하스미의 위험성을 가장 잘 인식하고 있었으면서도 제대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물론 행동에 나섰던 츠리이와 하야미는 죽었고 레이카는 살았으니, 어찌 보면 현명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 현실적인 선택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위험을 인지하면 그것과 거리를 두고 안전을 도모하려고 하지, 그 실체를 파악하고 해결하려고 들지는 않거든요. 더군다나 아무 힘도 없는 고등학생이기에. 


거기에 하스미 같은 비현실적인 괴물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아무리 감정적으로 느껴도(공포)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인류의 역사에서 하스미 같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은 수도 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괴물이 내 주변에, 내 생활 반경에 존재한다는 건 역시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죠. 소설에서도 하스미가 끔찍한 살인마일지도 모른다는 정황이 레이카의 직감과 하야미의 조사로 조금씩 드러나지만 레이카도 하야미도 ‘그래도 설마...’ 라며 판단을 주저하거든요. 둘 다 죽음이 코 앞에 닥치고 나서야 ‘우리가 안일했구나’ 하고 반성하게 되죠. 이미 늦었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결국 레이카도 하야미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것은 3인방 중 눈에 띄는 특별함이 없는 캐릭터인 나고시입니다. 별 거 없어 보이던 캐릭터가 결정적인 순간에 반전 활약을 하는 건 장르물에서 흔한 클리셰이긴 합니다. 하야미와 레이카같이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는 학생들도 하스미에게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는데 비교적 평범했던 나고시가 사용한 속임수를 하스미는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최흉 최악의 괴물의 허무한 패배였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하스미를 쓰러뜨린 것은 나고시의 속임수가 아닙니다. 하스미가 나고시의 속임수를 간파하고 나고시와 레이카를 죽였다 하더라도 하스미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가 두 가지나 더 존재하고 있었거든요. 그 두 가지는 바로 자동제세동기에 녹음된 하스미의 목소리와 미야의 생존입니다. 물론 미야의 경우 살아남기는 했어도 큰 부상을 입었고 맨 정신을 회복하고 하스미의 범행을 증언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을 테니 그 사이에 어떻게든 하스미가 손을 쓰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제세동기에 녹음된 음성은 정말 빼도 박도 못할 결정적인 증거라서 하스미가 빠져나갈 여지는 아예 없습니다. 실제로 작품 내용에서도 나고시와 레이카의 증언이 아니라(나고시와 레이카는 범인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세동기에 녹음된 내용이 밝혀지면서 하스미가 체포 됩니다. 

하스미는 현재 근무 중인 신코 마치다 고등학교에서 벌인 사건 이전에도 살아오면서 숱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그 많은 범죄들(그 중 상당수가 살인이거나 미수)을 저질러 오면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상당한 운이 작용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스미는 굉장히 머리가 좋고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는데 도움이 되는 많은 지식과 대담한 실행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스미와 대립하는 존재들 중에서 그 만큼 뛰어나거나 그 이상인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실제로 하스미는 미국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나 패배하고 맙니다. 패배의 대가로 하스미가 죽거나 감옥에 간 건 아니었지만 두 번 다시는 미국 땅을 밟을 수 없는 처지가 되고 이로 인해 하스미의 인생은 상당히 꼬여 버리게 되죠.


하스미를 쓰러뜨린 상대는 전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미국 월가의 거물급 자본가이자 권력자입니다. 안 그래도 전 세계의 내로라 하는 괴물들이 모여드는 곳이 미국의 월가인데 거기서도 거물급인 인물이니 하스미보다 한 수 위인 실력자인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스미는 이 패배로 절대 포기 하지 않았고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이 권력자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해서 하스미가 미국에 아예 입국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실제 하스미의 복수는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에게도 미국에 입국하지 못하게 된 것은 상당히 신경 쓰이는 제약인데(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언제 미국에 가야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요) 하스미 처럼 능력 있고 욕망이 가득한 인물에게 이런 상황은 엄청난 타격이죠. 인생을 전면적으로 재설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하스미는 여러 궁리를 해보지만 마땅한 해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척의 권유로 교사 일을 하게 되는데 하스미는 여기서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스미의 삶의 목적은 그저 노골적인 욕망의 충족입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삶에서 추구하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은 바로 부와 섹스입니다. 일반적으로 교사라는 직업은 부를 추구하는 데는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하스미는 작중 교사라는 지위에 있으면서 많은 부정과 부조리를 저지르고 있었지만 아직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스미는 교사 생활에서도 많은 기회가 있을 거라고 보았고 학교에서 음지의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해가며 최종적으로 학교를 뒤에서 완전히 지배하는 단계까지 가면 돈도 얼마든지 많이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교도 많은 이권이 움직이는 사업체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 사이에 발생하는 눈 먼 돈들을 긁어 모으는 것이 하스미의 앞으로의 계획이었죠. 물론 그 외에도 다양한 방법들이 있을 테고(세상에는 돈을 벌 수 있는 무궁한 방법들이 존재하니까요) 그 중 하나는 작중 실현되기도 합니다. 부자집 아들이자 동성애자인 미술 교사 구메가 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걸 알아내어 그를 협박해 돈을 갈취한 것이죠.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욕망, 바로 섹스입니다. 작중 하스미는 한창 결혼 적령기인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나 진지한 연애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며, 매력적인 여성에 대해서는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대상이라는 관점으로만 바라봅니다. 하스미에게 학교는 그런 성적 욕구의 해소 대상을 물색할 수 있는 좋은 사냥터입니다. 학생과 교사 모두 대상이 되죠. 교사가 학생을 그런 대상으로 여긴다는 자체가 이미 상당히 비도덕적이지만 애초에 하스미라는 인간이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 이런 부분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 없는 노릇입니다. 사실 이런 범죄 스릴러 장르가 아니라도 멀쩡한 학원 로맨스물에서도 교사와 학생의 연애 이야기는 흔하게 다루어지기는 하지만요. 

물론 하스미가 학교에서 물색한 상대와 맺게 되는 부적절한 관계는 흔한 학원 로맨스물에서 그려지는 평범한 연애가 아닙니다. 하스미와 작중 관계를 맺게 되는 여학생인 야스하라 미야는 하스미에게 아예 애완동물 취급 당합니다. 그냥 대놓고 하스미가 미야에게 ‘나는 펫입니다’ 라고 말하도록 시키죠. 물론 미야는 연인 사이의 장난이라고 받아들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교묘하게 가스라이팅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성욕 해소를 위한 애완동물로 길들여 버리는 것이죠. 


하스미는 교묘한 정치질로 반 배정에서 자기 반에 학교에서 소문난 미녀들을 다수 들어오게 만듭니다. 하스미의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야스하라 미야 외에도 미소녀 여학생 여러 명이 그의 마수에 걸려 애완동물이 되었을 겁니다. 여교사도 마찬가지죠. 일단 하스미는 보건 교사인 타우라 준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타우라 라는 교사도 남녀 관계에 있어서는 하스미 못지않게 비도덕적인 인간입니다. 여학생을 노리는 하스미 처럼 타우라도 작중에서 남학생과 그런 관계를 맺고 있거든요. 이 남학생이 하야미인데, 타우라는 심지어 하야미와 대마초를 함께 즐기기까지 합니다. 교사가 학생과 성관계에 대마초까지.. 만만치 않은 막장이죠.

아무튼 이런 타무라 외에 상담 교사인 미즈오치 사토코도 하스미가 공략 대상으로 보고 있는 여성입니다. 사실 야스하라 미야는 의도치 않게 얻어 걸린 경우이고, 처음부터 하스미가 꾸준히 공략 대상으로 노리고 있던 건 미즈오치였습니다. 다만 이 공략 계획이 조금씩 진행되는 도중에 큰 사건이 터져버리며 미즈오치는 다행히 하스미의 마수에 걸리지 않게 되었죠. 이건 소설 기준이고, 앞에서 언급했듯 미즈오치의 비중이 늘어난 드라마 판에서는 결국 하스미와 가까워진 후 그의 비밀을 알게 되어 미즈오치도 살해당하고 맙니다. 


결국 하스미의 궁극적인 목표는 학교를 자신의 ‘작은 왕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이기에 교감이나 교장 등 공식적인 권력자가 될 수는 없지만 능숙한 정치질과 가스라이팅으로 학교에 영향력이 있는 인물 상당수를 자신의 사람으로 포섭 내지는 길들여서 실질적으로 학교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는 것. 물론 미국 월가에서 성공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그 보상이 극도로 적을 수 밖에 없지만 애초에 하스미가 교사 일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는 데다 미국 입국 금지라는 치명적인 제약에 의해 인생의 선택지가 엄청나게 줄어들어 버린 사정도 감안을 해야 합니다.(이런 상황 때문에 하스미는 교사가 되기 전에 야쿠자 같은 범죄 조직 쪽의 진로를 고민해보기까지 합니다) 물론 하스미는 자신을 패배시킨 미국 월가의 권력자에게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계획을 품고 있었으니 영원히 학교라는 세상에 머물기 보다는 언제가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다른 계획을 위해 교직을 떠날 생각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다만 당장은 학교라는 세계에 몸 담고 있으니 여기서 최대한 자신의 욕망 실현에 매진하는 것 뿐이고요.

하스미는 학교를 지배하는 것 쯤은 난이도가 별로 높지 않은 시시한 게임이라고 여깁니다. 세계 각국의 괴물 같은 인재들이 몰려드는 미국 월가에서 목숨을 건 게임을 해온 그에게 학교 라는 공간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될 순진한 양들이 모여 있는 여유로운 목장과도 같았죠. 하지만 결국 이것은 하스미의 큰 착각이었습니다. 교사들이라면 하스미의 판단이 대체적으로 맞지만, 학생들의 경우는 다릅니다. 당장 하스미 본인도 중학생,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적이 있고, 월가의 괴물들 역시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모두, 한때는 학생이었습니다.

한 학교에 다니는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 중에서 몇몇은 훗날 국가와 세계를 움직이는 거물급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다양한 능력과 재능의 학생들이 몰려드는 곳이 학교인데, 그런 학생들의 잠재력을 결코 안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하스미의 가장 기본적인 속임수.. 그것은 자신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능력있는 교사로서 주변 사람들의 신뢰와 환심을 얻는 것입니다. 이 속임수가 학교의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통했지만, 끝까지 속지 않고 하스미의 본성을 간파(혹은 의심)한 사람이 꾸준히 나타났습니다. 하스미가 신코 마치다에 오기 전에 근무했던 고등학교에서도 그런 학생들이 있었고, 결국 그들은 하스미에게 살해당합니다. 신코 마치다에서는 교사인 츠리이와 학생 중에서 레이카, 하야미가 하스미의 속임수를 간파합니다. 물론 이들 중 누구도 하스미의 완전한 정체(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를 파악하지는 못 했지만, 속지 않고 의심한 후 조사했다는 점만으로도 이미 하스미에게 살인으로 해결해야만 할 외통수의 위협이었던 것입니다.

하스미는 자기가 완벽한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착각이었던 셈입니다. 하스미는 나이가 들고 (들키지 않은)범죄 경력이 누적되어 갈수록 지나치게 대담해졌고, 운을 자신의 실력으로 착각하는 자기 과신을 범합니다. 근무 중인 학교에서 자신의 속임수를 간파한 학생들이 꾸준히 나타났음에도 여전히 학교라는 세계를 만만하게 봤고 경계심 없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애초에 하스미의 주요 계획 중 하나인 학교에서 성욕 해소의 대상이 될 애완동물을 물색하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해도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입니다. 창작물에서야 교사와 학생의 연애가 흔하게 다루어지지만 현실에서는 매우 비도덕적이고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입니다. 교사와 학생의 연애를 다루는 창작물이 쏟아져 나오는 일본이라 하더라도 이런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하스미가 자신과 미야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이 발각될 경우 큰 타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어쩌면 교직을 잃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죠. 

물론 하스미가 학교의 여학생들을 잠재적으로 성적 욕구의 해소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다 하더라도 작중 하스미와 미야의 관계는 오히려 미야가 먼저 시작한 것이긴 합니다. 앞에서 언급했듯 하스미에게 이 관계는 얻어걸리다 시피 시작된 것이었고, 하스미가 능동적으로 공략 대상으로 삼았던 상대는 학생이 아닌 교사인 미즈오치입니다. 하지만 결국 미야와의 관계가 시작되어 버렸고 그 때부터는 하스미도 능동적으로 미야를 성욕 해소를 위한 애완 동물로 길들이기 시작합니다. 비슷한 시점에 미술교사 구메가 남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라는 걸 알아내어 그를 협박해 미야와 밀회를 즐길 아지트도 확보합니다. 구메는 부잣집 아들이라 집도 여러 채 있고 고급 승용차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하스미가 미야와 데이트를 즐길 목적으로 구메를 협박해 마치 자기 것 처럼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당연히 하스미는 미야와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주의했지만 원래 이런 관계는 한 번 시작되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담성이 커지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미야가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학교의 누군가가 목격해버린 데다 미야 본인도 교사와 사귄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은근히 흘리고 다니는 판인데 하스미는 그런 상황들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도 수학여행 도중 따로 방을 잡고 미야와 밀회를 즐길 정도로 과감한 행동들을 벌이게 되는데요. 축제 준비를 위해 하스미의 반 학생들이 전원 학교에서 합숙 하는 날에는 분명 미야와 학교에서도 대담하게 성관계를 가질 계획이었을 겁니다.(물론 학교에서 학생과 대담하게 성관계를 가지는 것은 보건교사 타우라와 체육교사 시바하라가 이미 하고 있는 짓거리입니다) 다만 그 전에 미야가 하스미의 비밀 중 하나를 알아버리는 바람에 결국 밀회가 아닌 살인으로 계획이 바뀌게 되지만요.

하스미가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것은 대부분이 문제가 생겼을 경우의 수습의 차원입니다. 살인 이라는 최악이 죄목을 빼놓고 보더라도 하스미는 사회가 정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투성이의 인간인 셈입니다. 사악하고 부도덕한 짓을 마구 저지르고 다니니 아무리 선량한 인간의 탈을 쓰고 주위를 속이며 살아도 어딘가에서 예민한 반동은 터져 나오기 마련이고 그럴 때마다 하스미는 더 사악한 범죄로 대응하거나 궁극적으로는 살인도 불사했습니다. 그야말로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 버틴 거였다고 보는 게 타당합니다. 정교하고 대담한 계획들을 세우고 잘 실행하고 다녔지만 결국 악의 교전 본편 시점의 사건들에서는 줄줄이 한계를 드러내 버리죠.

후루야 미노루의 만화 ‘낮비’에 등장하는 살인마 캐릭터 ‘모리타’는 하스미와 달리 머리도 나쁘고 주변 사람들을 속이는 재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상당히 오랜 기간 잡히지 않고 많은 살인을 저지르고 다니는데 이에 대해 모리타를 쫓는 형사는 이런 식으로 분석하기도 합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잡히지 않는 것인가?”

낮비


전혀 다른 유형이기는 하지만 하스미와 모리타의 공통점은 살인과 같은 강력 범죄를 대담하게, 거침없이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달라도(모리타의 경우는 이미 미래를 포기하고 언제든 자살할 계획이었습니다) 대담성은 동일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사건의 전형성과 패턴화를 흐리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그런 효과의 이면에 불안정한 리스크들이 많고 이로 인해 하스미와 모리타 모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악의 교전의 클라이맥스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내용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살인도 이만한 대담성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황당무계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제가 만약 이 소설을 쓴 작가라면, 이런 내용을 쓰면서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매우 걱정스러웠을 것 같습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충격적이기도 한 내용이니까요.

저는 영화-만화-소설 순으로 이 작품을 접했는데, 영화를 볼 때 당연히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경악을 했습니다. 드류 고다드의 ‘캐빈 인 더 우즈’를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니, 그보다 더 했죠. 캐빈 인 더 우즈는 사전에 영화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보기도 했고 충격적인 후반부에 대한 소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조금은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악의 교전은 후반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영화의 기본적인 시놉시스도 모른 채 본 거였습니다. 사이코패스 살인마 교사가 등장하는 내용이라는 것도 전혀 몰랐죠. 그냥 학교를 배경으로 끔찍한 범죄 같은 일이 벌어지는 스릴러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캐빈 인 더 우즈


본질적으로 이 작품은 초반부 까지는 어느 정도 추리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학교에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누구인지(혹은 무엇인지) 처음에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독자가 다양한 관점에서 여러 캐릭터들을 의심하게 만들거든요. 물론 범인의 정체를 최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내는 일반적인 추리물과는 달리 이 작품은 하스미의 정체가 비교적 일찍 밝혀지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시작부터 다 까버리는 것은 아니고 추리물 같은 재미를 초반에 조금은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이 작품은 일반적인 미스터리물이 제공해 주는 재미와는 전혀 다른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독자가 흥미와 궁금증을 품을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그 수수께끼가 밝혀지는 순간의 임팩트와 흥분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는 데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작품이죠. 이 작품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는 두 가지 입니다. 하스미 세이지라는 강렬한 살인마 캐릭터에 대한 탐구심, 그리고 후반부의 엄청난 전개의 충격.

고등학교의 교사가 특정 반의 학생 전원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은 없을 겁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런 일을 벌인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자체도 절대 불가능하겠죠. 미친 사람은 책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집니다. 학생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도 자살. 이것이 하스미가 세운 시나리오였습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 한 교사가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려서, 야밤에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 전원을 죽여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미친 교사는 남학생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던 동성애자 미술교사인 구메다. 하지만 진짜 범인은 하스미이고, 그는 전혀 미치지 않았죠. 물론 다른 의미로는 미쳤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정신이 나갈 정도의 흥분 상태가 아닌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대학살. 창작물에서 강한 임팩트를 주기 위한 확실한 내용 전개 중 하나가 바로 대학살입니다. 최근 작품들 중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왕좌의 게임의 ‘피의 결혼식’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원작 소설이 있는 작품이라 드라마에서 이 내용이 나올 거라고는 다들 예상하고 있었지만, 실제 영상으로 만들어진 피의 결혼식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죠. 

‘피라냐 3D’ 같은 동물 습격 재난물에서도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대학살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피라냐 3D의 후반부 대학살 장면은 역대 영화 속 학살 시퀀스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의 잔인함과 기상천외함, 스펙터클함을 보여줍니다.

피라냐 3D


그런데 악의 교전이 보여주는 대학살 전개가 충격적인 이유는 다른 창작물 속 대학살 장면과 차별화되는 유니크한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와 비슷한 내용 전개를 다른 창작물에서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나마 비슷하다고 느낀 작품은 악의 교전 못지 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충격적인 작품인 ‘배틀 로얄’입니다.

‘한 학급의 학생이 몰살되는 내용’이라고 단순하게 요약한다면 악의 교전과 배틀 로얄은 확실히 닮은 작품입니다. 다만 악의 교전은 그런 학살을 저지르는 범인이 담임 교사 한 명이지만 배틀 로얄은 학생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내용이라는 점이 큰 차이점이죠. 하지만 배틀 로얄에서도 하스미와 비슷한 유형의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학생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강요 당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은 그런 짓을 쉽게 저지르지 못하죠. 그런데 학생들 중에서도 전혀 망설임이 없이 다른 학생들을 마음껏 죽이고 다니는 학생이 두 명 있습니다. 바로 소마 미츠코와 키리야마 카즈오 입니다.

소마 미츠코는 배틀로얄에서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인물입니다. 물론 결국 카즈오에게 패배하고 먼저 사망해버리기에 최종보스 포지션은 카즈오가 먹어버렸지만, 작품 전체에 걸쳐 보여준 임팩트는 오히려 미츠코가 카즈오를 압도하는 면이 있습니다. 카즈오의 캐릭터가 이상하게 변해버린 영화판에서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배틀로얄


학생 캐릭터가 많이 나오는 영화라서 당시 ‘어린 유망주 배우’들이 많이 출연했는데 그 중 주인공 나나하라 슈야 역의 후지와라 타츠야와 소마 미츠코 역의 시바사키 코우가 이 영화로 최고의 수혜를 입었습니다. 후지와라 타츠야는 그 이후 현재까지도 일본의 가장 유명한 남배우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정상급 배우로 활약하고 있고 시바사키 코우는 현재는 여배우로서의 전성기가 어느 정도 지난 느낌이지만 배틀로얄 이후 2000년대까지는 젊은 여배우 중에서 톱클래스로 꼽히며 다양한 작품들에서 종횡무진 활약했습니다.

그 외 또 한 명을 꼽자면 쿠리야마 치아키인데 그녀가 연기한 치구사 타카코는 슈야나 미츠코에 비하면 비중이 떨어지는 캐릭터이지만 영화 속에서 짧지만 엄청난 임팩트를 보여줘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영화를 좋아하기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에게 캐스팅 되어서 ‘킬빌’ 1편에 고고 유바리 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여기서도 배틀로얄과 마찬가지로 짧지만 강렬한 임팩트를 보여주게 되죠. 물론 그 후 배우로서 크게 대성한 건 아니라 조금 아쉽긴 하지만요.

킬 빌


아무튼 미츠코 역을 연기한 시바사키 코우는 확실히 후지와라 타츠야와 함께 배틀로얄 출연으로 빵 뜬 케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역이자 주연이었던 후미와라 타츠야와는 달리 시바사키 코우는 악역을 연기하고도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냈던 것입니다. 그만큼 소마 미츠코라는 캐릭터가 매력적이었고 시바사키 코우가 완벽하게 캐릭터를 표현해냈기 때문이겠죠.

배틀로얄의 소마 미츠코와 악의 교전의 하스미는 작품 내에서 목적과 행보가 완전히 동일합니다. 제한된 공간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하나씩 찾아내서 죽이는 것. 물론 배틀로얄에서는 미츠코 뿐 아니라 모든 학생들에게 동일한 목표가 주어지지만, 그걸 망설임 없이 제대로 차근차근 해나간 것은 미츠코와 카즈오 둘 뿐입니다. 사실 미츠코 뿐 아니라 카즈오도 어느 정도 하스미와 닮았다고 할 수 있겠죠. 미츠코와 카즈오를 섞어 놓으면 하스미와 비슷한 캐릭터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악의 교전과 배틀로얄에 나오는 대학살의 가장 큰 공통점은 많은 사람을 죽이는 과정이 일종의 ‘사냥’처럼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살인과 마찬가지로 사냥도 실제로 성과를 내기가 쉽지 않은 행위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아마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 사냥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지만, 총이나 여타의 도구를 가지고 야생 동물을 사냥한다고 했을 때 상당한 수준의 경험과 기술이 없으면 몇 날 며칠을 노력해도 단 한 건의 사냥조차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그 사냥의 대상이 멧돼지나 그보다 위험한 동물이라면 사냥의 성공은 고사하고 안 다치고 무사히 돌아오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야겠죠. 

배틀로얄


악의 교전과 배틀로얄에서 사냥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간입니다. 어찌 보면 멧돼지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험한 대상이죠. 야생 동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지성이 있고 도구까지 사용하니까요. 사냥 대상이 인간이라면 사실상 사냥하는 당사자 역시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사자나 호랑이 같은 포식자를 대상으로 한 서로 죽고 죽이는 승부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 죽고 죽이는 승부와 같은 긴장감이 악의 교전과 배틀로얄에서 하스미와 미츠코가 벌이는 사냥 행위에서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다만 같은 인간이라도 이 둘은 사냥의 대상인 다른 인간들에 비해 상당히 강한 개체라서 그 긴장감이 아주 크지는 않지만요. 물론 미츠코는 여자이고 자기보다 더 강한 개체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결국 사냥당하고 말았지만, 하스미는 말 그대로 그 사냥터에서 범접할 수 없는 최강자였습니다. 

그러나 하스미에게도 미츠코의 상황과 비교했을 때 더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 큰 핸디캡이 있었습니다. 바로 시간과 장소입니다. 며칠 정도의 시간 여유가 있었던 미츠코와는 달리 하스미는 불과 한두 시간 내에 모든 사냥을 완료해야 했습니다. 거기에 외부의 개입이 차단된 완전히 고립된 공간이었던 배틀로얄의 섬과는 달리 하스미의 사냥터는 조금만 방심해도 사냥감들이 탈출해서 멀리 달아나 버릴 수 있는 개방된 공간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건 결국은 생존자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서로 죽고 죽이는 사냥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배틀로얄의 참가자들과 달리 하스미의 사냥감이 된 학생들은 굳이 하스미와 싸울 필요 없이 외부의 도움이 올 때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된다는 점입니다.

두 사냥 중 어느 쪽이 완수하기가 더 어려운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역시 더 어렵다고 느껴지는 쪽은 미츠코입니다. 하스미 역시 학생들의 반격에 대한 위협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배트로얄의 룰 안에서 다양한 무기를 가진 학생들이 모두가 서로를 죽고 죽이는 상황에 놓인 미츠코는 단연 하스미보다 압도적으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스미로서는 시간 내로 모든 사냥감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일 뿐 찾아낸 사냥감의 저항 자체는 크게 문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츠코는 사냥감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 또한 사냥감이 되어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강렬한 저항과 위험에 매 순간 직면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스미의 사냥도 시간과 공간 면에서 미츠코에 비해 압도적으로 불리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미츠코에 비해 녹록한 상황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배틀로얄


결과적으로 하스미와 미츠코 모두 사냥을 완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패배의 결과는 매우 차이가 컸죠. 미츠코는 사망했고, 하스미는 경찰에 체포되었습니다. 물론 하스미도 사형 제도가 존재하는 일본의 사법 시스템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이 사냥에 실패한 일차적인 결말은 아닙니다. 실제 사형 선고가 내려질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고요. 체포된 순간부터 하스미는 이미 미친 척을 하며 사형을 면하고 감옥이 아닌 정신 병원에 수감되기 위한 새로운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후일담이 더 길게 나오는 만화 판에서는 결국 하스미가 의도한 대로 판결이 나오게 됩니다. 

‘재판’이라는 새로운 게임이 바로 이어지긴 했지만 사실상 이 작품의 최후의 게임이었던 학교 안 대학살은 결국 하스미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사실 악의 교전을 영화로만 본 사람이라면 최후에 하스미가 벌인 게임이 정말 황당무계하고 개연성이 없다고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이유로 이 영화에 평점을 낮게 주는 리뷰가 상당히 많습니다. 사실 영화판은 소설 내용을 각색한 부분이 많은데 그 중 하나는 그냥 대놓고 하스미가 성공할 가능성이 애초에 없는 게임을 벌였다는 것을 인증해주기까지 합니다. 바로 양궁부 소속 학생인 카케루의 탈출입니다. 

카케루는 양궁부 소속으로서 엽총을 가진 하스미에게 그나마 저항할 수 있는 무기(활)와 기술을 가진 학생입니다. 하스미도 카케루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소설에서는 영리한 책략을 부려 카케루를 속인 후 제압에 성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영화판에서는 소설과 전혀 상황이 다르게 진행됩니다. 카케루가 짝사랑 하는 여학생인 사토미가 창틀에 묶은 밧줄을 타고 내려와 탈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 모습을 창문을 통해 확인한 하스미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그때 운동장에 있던 카케루가 사토미를 구하기 위해 달려와 하스미에게 활을 겨누고, 하스미도 표적을 사토미에서 카케루로 바꿔서 서로가 서로를 겨누는 상황이 됩니다. 먼저 발사한 쪽은 카케루였는데, 양궁부 에이스 답게 화살은 정확히 하스미를 향해 날아갔지만 하스미가 발사한 엽총 탄환이 화살에 맞는 바람에 빗나가게 되고, 카케루는 그대로 엽총 탄환에 적중해 사망하게 되죠. 눈 앞에 카케루가 사망하는 모습에 망연자실해 있던 사토미도 그대로 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소설에는 없는 영화판만의 흥미로운 대결 장면을 연출했지만(물론 소설에서의 카케루와의 대결 역시 몹시 흥미진진합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내용상으로 중요한 부분은 카케루가 학교 건물 밖 운동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스미는 학교에 있는 전원을 몰살시키기 위해 초반부터 용의주도하게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탈출 가능한 입구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초반에 탈출을 시도한 학생들이 하스미의 총격에 쓰러지자 결국 남은 학생들은 1층으로 내려오기를 포기하고 윗층의 숨을 만한 곳에 몸을 숨기거나 바리케이트를 쳐서 농성에 들어가게 되죠. 소설과 영화가 동일한 진행인데 유일한 차이점은 영화판에서는 카케루가 탈출에 성공했다는 점입니다. 이 상황은 뭔가 극적으로 연출된 장면도 없습니다. 그냥 최초에 탈출을 시도한 학생들을 하스미가 추격하는 동안 어느새 카케루가 건물 밖으로 빠져나와서 달리고 있거든요. 이걸로 하스미의 계획은 그냥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겁니다.


카케루는 학교 밖으로 빠져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행인에서 상황을 설명하고 경찰에 신고를 부탁합니다. 그 즉시 행인은 경찰에 신고를 하고 카케루는 사토미가 걱정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갑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 전개입니다. 카케루가 탈출한 그 자체로 이미 하스미의 계획은 망가진 것이고 거기에 행인에 의한 경찰 신고까지 신속하게 이루어졌죠. 그런데도 영화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스미의 사냥을 차근차근 전개시킵니다. 분명히 신고가 이루어졌는데도 경찰은 상황이 종결될 때까지 오지 않습니다.

물론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결국 하스미가 범인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은 자동제세동기에 녹음된 하스미의 음성이 확인되었을 때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하스미가 범인인 걸 몰랐으니 카케루가 학교로 돌아오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하스미를 범인으로 확정 지을 증언은 할 수가 없습니다. 경찰이 늦게 도착한 것도 이런저런 핑계나 설명을 붙일 수 있을 테고요. 하지만 이런 것들도 최대한 끼워 맞추고 억지를 부렸을 때 가능한 얘기고 그냥 딱 보면 상황이 말도 안 되는 게 눈에 보입니다. 

옥상 입구에서 학생들이 몰살당하는 상황도 여러모로 허술합니다. 하스미가 문이 잠긴 옥상 입구 앞 계단에서 갈 곳을 잃은 학생 십여 명을 신나게 엽총으로 학살하는데, 여기서 죽게된 학생들은 안타깝지만 다른 곳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도망칠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습니다. 범인이 어디에 있는지 뻔히 총소리로 확인이 되는 상황이고 그 위치가 최상층인 옥상 입구 쪽이니 아래층은 완전히 탈출이 가능한 사각지대입니다. 


이렇게 세부적으로 개연성을 따지고 들면 말도 안 되는 장면들이 영화에 참 많이 나옵니다. 나중에 영화의 이런 부분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면서 ‘아마 원작은 이렇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생각대로였습니다. 영화판에서 나온 개연성이 무너지는 대부분의 장면들은 원작에는 없는, 영화판에서 각색된 내용들입니다. 기시 유스케는 미스터리 장르의 거장 작가 답게 원작 소설에서는 세심하게 상황을 설정하고 거의 빈틈이 없는 내용 전개를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소설도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기는 찝찝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비현실적인 내용이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매일 뉴스를 통해 확인하듯이 현실은 허구보다 더 기이하고 괴상합니다. 현실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의 뉴스를 보며 스릴러와 미스터리 작가들이 더 분발해야 한다는 얘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죠. 

아무튼 영화판의 감독 미이케 다카시는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원작의 내용을 더욱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게 연출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나쁜 선택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뭘 어떻게 해도 이런 내용을 보는 관객이라면 비현실적이고 개연성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건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질구질한 설명과 개연성 확보를 위해 애쓰기 보다는 차라리 화끈한 살육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선택일 수 있습니다.


영화는 개연성을 포기한 덕분에 원작과 같이 차근차근 진행되는 사냥의 스릴은 많이 줄었지만 좀 더 속도감 있고 리듬감 넘치는 후반부 시퀀스를 완성했습니다. 소설보다 영화에서 더욱 중요한 것이 이런 리듬감입니다. 관객의 혼을 빼놓고 영화에 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기술. 미이케 다카시는 거장 감독이고 이런 기술 면에서 확실히 관록이 있습니다. 덕분에 이 영화의 후반부는 개연성을 다 날려 먹었음에도 엄청나게 재미있고 몰입감이 높습니다.

소설에는 없고 영화에는 있는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요소. 바로 ‘소리’입니다. 소설에서 하스미 세이지라는 캐릭터를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브레히트의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에 수록된 곡인 ‘모리타트(칼잡이 맥)’입니다. 이렇게 음악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작품은 소설로만 읽었을 때 그 느낌이 확실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독자라면 작중 언급된 음악을 찾아서 틀어놓고 들으면서 책을 읽는 방법을 선택할 테지만요. 하지만 영화에서는 음악을 그대로 쓸 수가 있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하게 음악이라는 요소가 효과를 발휘합니다. 

모리타트는 하스미 세이지라는 캐릭터에게 정말 끝내주게 어울리는 음악입니다! 가사의 내용도 그렇지만 그 묘하게 기분 나쁜(?) 선율... 영화에서 하스미가 휘파람으로 불어대는 ‘모리타트’는 그야말로 세상 모든 불길함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하스미의 휘파람 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모리타트의 불길한 선율이 작품 곳곳에 등장하여 관객을 괴롭힘과 동시에 몰입시킵니다. 역시 이 음악이 가장 효과적으로 쓰인 부분은 옥상 앞 계단에서의 학살 장면입니다. 좀 더 경쾌하게 편곡된 재즈 버전의 모리타트가 배경음악으로 깔린 가운데 하스미의 가차 없는 총질에 십여 명의 학생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하나둘씩 죽어갑니다. 학생들의 비명 소리, 화면 가득 뿜어져 나오는 피의 분수, 지옥의 천둥소리처럼 울리는 엽총의 발사음, 피의 축제를 벌이는 듯한 하스미의 악마 같은 모습... 그야말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재즈 버전 모리타트의 경쾌한 선율은 이 장면의 자극성을 극대화시킵니다.


악의 교전은 소설, 만화, 영화판이 모두 완성도 높게 잘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렇게 미디어 믹스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작품은 흔치 않습니다. 제가 이 작품의 소설, 만화, 영화판 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는지는 스스로도 판단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면 역시 영화판이 최고라고 결론 내리게 될 것 같습니다. 

악의 교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본 영화 TOP 10에 들어가는 작품입니다. 영화 자체가 굉장히 잘 만들어졌고 재미가 있습니다. 소설의 내용과 설정, 분위기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필요한 부분에서 과감한 각색으로 영화만의 매력과 리듬감을 잘 만들어 냈습니다. 미이케 다카시가 이제는 제게 ‘기복의 대명사’라고 여겨질 만큼 만드는 작품들의 완성도가 롤러코스터를 타는데, 악의 교전 만큼의 그 롤러코스터의 최정점의 수준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완성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훌륭한 완성도의 상당 부분의 원작의 뛰어남에 빚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원작이 뛰어나고, 그걸 각색한 영화판도 너무 훌륭합니다. 소설과 영화의 이러한 이상적인 미디어 믹스 사례가 문화창작 산업계 전체를 발전시키는 최고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서즐라
대중문화와 서브컬처를 즐기는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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