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 시대가 된 이후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달라진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모비우스’ 같은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이제 이런 영화는 극장에 보기가 돈 아깝게 느껴진다.’
영화에 대한 감상-리뷰로서 앞 문단의 내용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최악이다 라거나 돌직구로 재미없다 라고 하는 것 보다도 돈 아까운 영화라는 말이 뭔가 더 비수를 꽂아버리는 표현 같습니다.
물론 모비우스가 정말 최악으로 형편없는 영화인 건 아닙니다. 사실 이 정도 완성도의 영화는 극장에서 수도 없이 봤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언급했듯이 과거와 달리 지금은 소위 OTT 시대라는 것이 되었고, 이제 모비우스 정도의 규모와 완성도의 상업 영화는 극장보다는 OTT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OTT 콘텐츠를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당장 얼마 전에 열린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OTT인 애플TV 플러스의 영화 ‘코다’가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고, 넷플릭스의 ‘파워 오브 도그’는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OTT 시대’란 건 이제는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OTT 콘텐츠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달 구독료를 내면서도 OTT의 개별 콘텐츠에 대해서는 뭔가 돈 주고 본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게 현실입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을 극장에서 봤을 때와 OTT로 봤을 때는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OTT로는 뭘 보더라도 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요. 돈 아깝다는 생각이 안 드니 영화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부담 없이 꺼버리기도 합니다. 극장이라면 돈 아까워서라도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도 끝까지 봐야 하고요.
모비우스가 왜 돈 아까운 영화인가- 캐릭터가 매력이 없는가, 플롯이 식상한가, 볼거리가 기대 이하인가... 같은 면들 보다는, 더 본질적인 측면을 얘기하고 싶습니다. 이 포스팅의 제목에 그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스파이더맨 없는 스파이더맨 빌런 유니버스’
이 표현은 말 그대로 스파이더맨이 등장하지 않는 영화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핵심이 빠진 영화’라는 비유적인 의미로 쓴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 공허하고 비어 보이는 영화입니다. 물론 이 영화가 비어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스파이더맨이 없는 스파이더맨 유니버스 영화라는 것이 핵심 이유이기도 합니다.
모비우스는 스파이더맨에 등장하는 빌런입니다. 그리고 안티 히어로 캐릭터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베놈’과 같은 겁니다. 소니는 스파이더맨이 MCU에서 활약하고 있을 때 자기들이 가진 스파이더맨 코믹스 IP를 가지고 독자적인 유니버스를 구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제는 이 유니버스를 SSU라고 부르는 모양이더군요.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라나 뭐라나.
그놈의 유니버스. 솔직히 우리가 지난 십수 년 간 MCU에 열광해왔고 DCEU가 MCU만큼 잘 풀리지 않았던 상황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갖가지 유니버스 세상이 영화판에서 굴러가는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슬슬 피로감이 쌓이고 있습니다. 특히 디즈니 플러스 서비스가 시작되고 MCU 작품들을 OTT 드라마로까지 챙겨봐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이러한 피로감이 더욱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모비우스는 전형적인 ‘유니버스 쌓기용’ 콘텐츠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더 굵직한 메인급 팀업 콘텐츠가 나올 때 거기에 모비우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장면을 더욱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한 재료인 것입니다. 나중에 소니에서 메인 팀업 무비를 만들면 그걸 더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라도 모비우스는 챙겨봐야만 하는 영화인 겁니다.
저는 이런 식의 유니버스 쌓기용 콘텐츠를 감상하는 양상에 길들여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영화가 특별히 재미있지 않아도 이제는 별 생각도 없습니다.(물론 돈 아깝다는 생각은 합니다만)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고 재미가 있는지는 별 관심도 없고, 모비우스라는 캐릭터의 성격과 설정, 능력 같은 것만 눈여겨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제가 ‘더 배트맨’을 혹평하는 리뷰를 블로그에 썼었는데요. 모비우스를 보고 나니 더 배트맨 같은 영화가 엄청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사실 여전히 기존 스나이더 세계관에서 벤 애플렉의 배트맨이 이끄는 저스티스 리그가 다크사이드와 결전을 치르는 내용의 영화를 꼭 보고 싶다는 입장이긴 한데요. 하지만 ‘더 배트맨’을 통해 보여준 DC의 방향성... 이것을 아주 긍정적으로 정의하자면 그저 유니버스 쌓기용 재료 수준의 영화는 결코 만들지 않겠다는 의도는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물론 ‘어벤져스: 엔드게임’같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유니버스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란 것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지금 같은 상황으로 전개된다면 엔드게임 같은 콘텐츠는 DCEU 보다는 소니 유니버스에서 나올 확률이 더 높겠죠. 물론 엔드게임 수준에는 한참 못 미칠 거라 예상하지만 최소한 비슷하게라도.
그럼 모비우스 같은 영화를 보고 난 아쉬움은 고스란히 소니 유니버스가 준비 중인 대형 팀업 콘텐츠에 대한 기대감으로 치환됩니다. 이렇게 수고롭게(?) 유니버스 쌓기 콘텐츠를 하나하나 섭렵해가고 있으니 그 끝에 타당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감이죠.
이 기대감이 막연한 것은 아닙니다. 개별 콘텐츠로는 그저 그렇고 돈 아깝게 느껴지더라도, 뭔가 가능성이 있는 매력적인 재료들이 쌓이고 있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습니다. 베놈 1,2편이 그랬고, 이번 모비우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니 유니버스 영화들의 특이한 점은 주인공뿐 아니라 여주인공 캐릭터까지 능력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아주 경제적인 방식이네요! 성평등적이기도 하고요. 베놈에서 등장한 미셸 윌리엄스의 쉬-베놈이 아주 끝내주게 매력적이었지 않습니까. 천하무적의 MCU 세계관에서 유일한 약점이 여성 캐릭터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이 쪽은 PC주의의 영향이 너무 강해서 여자 캐릭터가 등장해도 섹시하고 핫한 캐릭터보다는 ‘다양한 가치관’을 반영한 캐릭터를 많이 만들고 있죠. 곧 디즈니 플러스 드라마로 공개될 ‘미즈 마블’같은 캐릭터.
문나이트와 미즈 마블 – MCU의 새로운 히어로가 온다
그 반면 DC는 갤 가돗의 ‘원더우먼’이나 마고 로비의 ‘할리 퀸’, 앰버 허드의 ‘메라’같은 죽여주는 눈나들이 등장하고 소니 유니버스 역시 미셸 윌리엄스의 쉬베놈에 이번 모비우스의 여주인공 아드리아 아르호나도 아주 훌륭합니다. 모비우스의 속편이나 소니 유니버스의 팀업 무비에서 과거 ‘언더월드’ 시리즈의 뱀파이어 여전사 케이트 베킨세일과 비슷한 느낌의 캐릭터를 아드리아 아르호나가 선보일 거 같아서 상당히 기대가 됩니다.
마블 vs DC, 영화 속 여자 캐릭터(여배우) 대결 (비교분석)
그러니까, 최소한 이런 기대감 정도는 형성해 주었다는 점에서 모비우스가 유니버스 쌓기용 콘텐츠로서 제 역할을 해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레드 레토의 모비우스 캐릭터도 괜찮았고요.
쿠키 영상도 중요하죠. 쿠키 영상이 2개 있는데, 고맙게도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오는 게 아니라 쿠키 2개 모두 크레딧 중간에 나옵니다. 쿠키 내용은 MCU에서 벌어진 멀티버스 사태로 인해 벌처(마이클 키튼)가 소니 유니버스로 넘어오는 것이 첫 번째 쿠키이고, 두 번째 쿠키는 벌처와 모비우스가 만나게 되고 벌처가 빌런 연합인 시니스트 식스 떡밥을 던지는 내용입니다. 유니버스 쌓기 재료로서 이런 쿠키 영상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번 쿠키에서는 정말 핵심적인 내용이 나왔다고 할 수 있죠.
이 내용이 유니버스에서 핵심적인 재료인 이유는 향후 현재의 ‘스파이더맨 없는 유니버스’가 ‘스파이더맨 있는 유니버스’로 완성될 미래를 제시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한 영화에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모습을 봤으니 동시대에 2개의 유니버스에서 활약하는 2명의 스파이더맨을 보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예 멀티버스를 적극 활용해서 톰 홀랜드가 2개 유니버스를 오가는 상황도 불가능은 아니지만 평범하게 생각하면 역시 별개의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앤드류 가필드의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고 있는데 저는 아예 새로운 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이제는 이런 유니버스 재료쌓기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모비우스는 확실히 개별 콘텐츠로서는 극장에서 보기에 돈 아까운 영화입니다. 하지만 소니가 현재 거대한 계획을 진행 중에 있고 향후 엔드게임 같은 어마어마한 콘텐츠가 나온다면 그 재료로서 모비우스는 분명히 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캐릭터의 소개에 치중하는 단순한 플롯과 거대 유니버스의 떡밥을 던지는 쿠키 영상까지. 이런 핵심 재료들만 낼름 획득하면 되는 겁니다. 포켓몬빵 띠부띠부씰 챙기는 것처럼요. 영화가 재미있는지, 빵이 맛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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