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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야기

[만화가 이야기] 이토 준지 伊藤潤二

by 대서즐라 202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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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伊藤潤二)는 호러 만화라는 장르에서 독보적인 성취를 이룩한 만화가입니다. 명성에 있어서는 우메즈 카즈오 정도를 제외하면 비교대상 조차도 없습니다. 현재 시점 기준으로는 아마 가장 유명한 호러 만화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용돌이 여주인공 키리에

 

어떤 창작 분야든 호러 장르를 전문으로 삼은 크리에이터가 큰 성공을 거두기는 쉽지 않습니다. 사실 호러 장르에서는 ‘성공’이라는 기준점이 다른 대중문화 콘텐츠들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이토 준지만 하더라도 역사상 가장 성공한 호러 만화가로 꼽힐 만 하지만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원피스 같은 최정상의 만화 히트작들과 비교하면 그가 이룬 성공의 정도는 초라할 뿐입니다.

 

솔직히 이토 준지 만화의 판매량이나 인세 수입 등이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호러 만화가로서 최고 수준의 명성을 가지고 있고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 마니아들이 굉장히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제 방 책장에도 그의 만화가 다수 꽂혀 있습니다. 작품 자체는 꽤 마니악한 성향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대중적인 명성과 영향력도 가지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토 준지의 만화는 호러 장르이면서도 대중적으로 폭넓게 선호될만한 매력적인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인 마니아들의 취향을 충족시켜줄 요소들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고요.

 

이토 준지의 작품이 대중적인 선호에 닿는 부분은 역시 미형의 캐릭터를 그려내는 특유의 작화 스타일입니다. 물론 데뷔 초기에 이토 준지의 작화 실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데생은 엉망이고 선은 거칠었죠. 기본적인 만화가로서의 스킬이 함량 미달이었습니다.

 

하지만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차츰 그림체가 다듬어지더니 어느덧 안정적인 퀄리티의 작화 실력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특히 빛을 발하게 된 것이 이토 준지만의 독특한 느낌이 살아 있는 미형의 캐릭터들입니다. 그가 창조한 캐릭터 중에서 가장 유명한 ‘토미에’를 비롯해서 작품 속 여러 여자(미녀)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다른 만화가의 작품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습니다. 미남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덜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 준지 작화 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마찬가지로 품고 있었고요.

 

토미에

 

이런 미형이 캐릭터들이 이토 준지의 음산한 세계와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공포 이미지의 한가운데에서 작품 전체에 기묘한 미적 균형을 부여합니다. 평범한 감각과는 동떨어진 뒤틀린 미적 감각이 희한하게 독자의 의식으로 스며들게 된달까요. 원래대로라면 그저 혐오감만을 느껴야 하는 이미지들인데 은근히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있다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죠.

 

저는 이토 준지의 작품에서 정말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이미지를 보면서도 동시에 매우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은 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토미에’에서 그런 장면이 많았죠. 그냥 토미에가 예쁘게 나오는 장면 말고 흉측하게 망가지거나 피범벅 고깃덩이가 된 장면에서도 말이죠.

 

토미에와 소년

 

이토 준지의 작화는 공포 만화로서 단지 혐오스럽고 끔찍한 이미지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호러-미학적인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특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 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의 감각으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아름다움의 영역입니다.

 

다만 정말 혐오감 밖에는 느껴지지 않는 장면들도 그의 작품들에는 많습니다. 사실 그런 장면들이 훨씬 많죠.(그것이 호러 만화의 본분이기도 하고요) 가장 대표적으로 유명한 장면이라면 얼굴에서 여드름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장면... 이건 너무 혐오스러운 이미지라 짤방화되서 커뮤니티 등에 많이 올라오며 유명해졌죠.

 

글리세리드

 

이토 준지 작화의 미적 측면이 공포 만화를 그리며 작화를 다듬고 완성하는 과정에서 기술적이고 감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공포 만화로서의 혐오스럽고 충격적인 이미지들은 순수하게 그의 상상력이 원천이 되어 나온 것입니다. 이토 준지는 장기 연재를 하는 보통의 인기 만화가들과는 달리 공포 만화라는 특성상 내용이 짧은 단편 위주로 작품 활동을 했고 현재까지 150편 정도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호러 만화가라는 점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편수입니다.

 

이토 준지가 이 모든 작품들에서 경이로운 상상력만을 보여준 것은 아닙니다. 흔한 괴담 느낌의 평범한 내용이거나 졸작 수준인 작품도 있습니다. 작품 편수가 워낙 많다 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의 평균적인 수준은 호러 만화로서 상당히 훌륭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졸작 수준의 작품은 극소수고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놀랄만한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이토 준지의 단편 작품들 중에서 특히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어서 저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작품을 몇 개만 꼽아보겠습니다.

 

가장 첫 번째로 꼽을 만한 작품은 역시 ‘달팽이 소녀’입니다. 혀가 달팽이가 되어버린 여고생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이토 준지 만화가 국내에 한창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에 그 유명세를 확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작품이죠. 저도 이 작품의 소문(?)을 듣고 이토 준지 만화를 처음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입에서 달팽이가 나오는 여자’라는 내용으로 당시에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거든요.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정말 충격적이면서도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섬뜩하게 느껴지면서도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싶은 위험한 충동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입니다.

 

달팽이 소녀

 

데뷔 초기에 그린 ‘벌집’도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벌과 교감하는 능력을 가진 소년이 등장하는데 한 벌집 수집가가 이 소년과 갈등하다 결국 소년을 살해하고 몰래 암매장합니다. 이후 그 수집가는 소년을 암매장한 장소 근처에서 큰 벌집을 발견하게 되고 무리해서 삽으로 벌집을 파내게 되지만 그 후 충격적인 반전이 드러납니다. 단순하지만 꽤 충격적인 상상력을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벌집

 

역시 초기 작품인 ‘허수아비’도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무덤 앞에 세우면 허수아비가 점점 고인의 생전 모습과 닮은 형상이 된다는 기괴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작품입니다. 뭔가 구로사와 기요시 풍의 세기말 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허수아비

 

‘조상님’은 달팽이 소녀와 함께 이토 준지 만화의 초기 유명세를 이끌었던 또 다른 대표작입니다. 거대한 송충이와 닮은 뭔가를 보고 충격으로 기억 상실에 걸린 소녀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나중에 밝혀지는 그 송충이의 정체는 정말... 제목에 힌트가 들어있긴 하지만 어떻게 이런 상상력이 가능한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조상님

 

‘공포의 기구(교수기구)’는 제가 이토 준지의 단편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인류 멸망 아포칼립스 장르의 작품들을 원래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토 준지의 상상력은 제가 본 어떤 아포칼립스 작품에서도 본 적이 없는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에서 실사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요. 허접한 완성도의 저예산 영화라서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거대하고 절망적인 아포칼립스의 풍경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된 퀄리티로 다시 한번 실사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공포의 기구

 

이토 준지의 단편 중에서도 특히 내용이 짧은 ‘악마의 이론’이라는 흥미로운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죽음에 이르는 이론’은 이걸 듣는 누구라도 자살을 결심하게 되는 충격적인 내용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 내용이 뭔지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고 작가 자신도 모르겠죠. 다만 이런 이론의 존재를 상상한다는 것만으로도 섬뜩한 공포를 느끼게 만듭니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이론이 존재할 가능성은 없겠지만요.

 

악마의 이론

 

또 한 편의 내용이 굉장히 짧은 작품 중 ‘악식’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바이오 하우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극초기의 작품인지 작화 퀄리티는 최악이지만 내용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뱀과 거대한 곤충 등 끔찍한 식재료들을 둘러싼 난장판 소동이 벌어진 후 ‘먹을 게 쌓였어요’라고 말하며 쿨하게 떠나는 여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이 매우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바이오 하우스

 

그 밖에 어린 소녀가 가학적인 쾌락에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의 ‘학대’, 인간의 속마음을 담은 부유물의 등장으로 벌어지는 소동을 다룬 ‘부유물’, 아이스크림에 중독된 아이들이 결국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버리는 내용의 ‘아이스크림 버스’ 등 섬뜩하고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인상적인 작품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리고 이토 준지는 내용이 짧은 단편뿐 아니라 단행본 1~3권 정도 분량으로 제법 긴 내용의 작품도 그렸습니다. 이 정도 분량의 작품들은 특히 단편들보다 완성도가 높고, 이토 준지의 대표작이자 최고의 작품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토미에’입니다. 사실 토미에는 하나의 긴 플롯을 담은 장편이라기보다는 토미에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스토리를 단편 옴니버스 형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토미에라는 캐릭터 자체가 작품의 중심이고 정체성이기에 이 캐릭터의 설정에 충실하기만 하다면 어떤 내용이 나오든 상관없는 것이죠. 토미에는 실사 영화로 여러 편 제작되었는데 영화의 내용도 이토 준지가 그린 만화들과는 다른 오리지널 내용입니다. 오직 토미에만 원작 캐릭터 설정대로 묘사하면 원작과 비슷한 공포와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토미에의 매력

 

그런데 모두가 공감하겠지만 토미에 실사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토미에의 느낌을 원작과 비슷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배우를 찾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에서는 잘 나가는 여배우들이 대부분 동글동글 귀여운 인상이기에 토미에 같은 냉미녀 느낌의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았죠. 그나마 토미에를 연기한 배우들 중 평가가 가장 좋은 게 칸노 미호이고 그 외에는 토미에 역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배우들 뿐이었습니다. 칸노 미호도 사실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고요.

 

칸노 미호의 토미에

 

토미에라는 캐릭터는 냉미녀의 표준적인 이미지 중 하나를 제시해주기도 했습니다. 냉미녀 느낌이 나는 국내외 연예인들에 대해 ‘토미에 닮았다’라는 반응이 종종 나옵니다. 한예슬과 블랙핑크의 제니가 이런 반응이 나온 대표적인 국내 연예인입니다.

 

단편 옴니버스가 아닌 긴 분량의 기승전결을 제대로 갖춘 이토 준지의 장편 작품들은 모두 굉장한 걸작들입니다. 이 중 그야말로 이토 준지의 최고 걸작이자 대표작들로 꼽히는 세 작품이 있는데 바로 사자의 상사병, 소용돌이, 공포의 물고기입니다.

 

사자의 상사병은 단행본 한 권 분량으로 비교적 짧은 편이고, 소용돌이는 세 권, 공포의 물고기는 두 권 분량입니다.

 

사자의 상사병은 ‘사거리 점’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루는 작품입니다. 소용돌이나 공포의 물고기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아니고 흔히 있을 법한 괴담스러운 이야기를 정교하고 완성도 높은 플롯으로 그려낸 작품인데요.

 

사거리의 미소년

 

사거리에서 만난 낯선 사람에게 고민 상담을 받는 ‘사거리 점’이 유행하는 어느 마을에 사거리 점을 보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답변만을 해주는 검은 옷을 입은 미소년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이 미스터리한 존재는 ‘사거리의 미소년’이라고 불리는데, 이 존재로부터 사거리 점의 답변을 들은 사람은 대부분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끔찍한 파멸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도록 사랑해

 

무섭고 혐오스러운 내용의 공포물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슬픈 로맨스 드라마 같은 성격을 가진 작품입니다. 물론 무섭고 끔찍한 내용과 장면들도 나오긴 합니다. 사거리 점을 보는 사람 중에는 주로 연애 상담을 하는 여성들이 많은 편인데요. 결국 작품에 등장하는 주된 내용도 남녀 관계에서의 광적인 집착과 질투심 등 극단적인 연애 감정에 의해 일어나는 파멸들입니다.

 

이토 준지 작품에서 은근히 남녀 간의 연애가 주요 스토리로 많이 등장합니다. 남녀가 서로의 매력에 강렬히 끌리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집착과 질투심 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토 준지는 공포를 끌어내는 재료로써 잘 활용합니다. 남녀가 서로에게 끌리고 집착하는 마음을 일종의 정신병적인 양태로서 표현하는 것인데 생각보다 설득력 있는 접근법이라 이것이 대중들이 이토 준지의 작품에 공감하게 되는 큰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토 준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내용이 긴 ‘소용돌이’에서도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꽤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소용돌이의 여주인공 ‘키리에’는 이토 준지의 작품 속 여자 캐릭터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토미에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미형의 캐릭터인데 키리에가 좀 더 제 취향입니다. 거기에 희대의 악녀인 토미에와는 달리 남자친구 슈이치와 견실한 연애관계를 이어가는 키리에는 아주 모범적인 호러물의 여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용돌이

 

이토 준지가 이 작품을 통해 탐구한 ‘소용돌이’라는 소재는 인간이 어떤 대상을 향해 가지는 ‘광적인 집착’에 대한 메타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소용돌이에 집착하고 소용돌이에 의해 미쳐가는 작중 인물들이 그대로 작가 본인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소용돌이에 대한 어마어마한 집착이 이런 걸작 호러물을 완성하게 해준 것이죠.

 

슈이치의 아버지

 

이토 준지의 작품 중에서 가장 내용이 긴 작품답게 스토리가 빌드업되면서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전개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특히 최후반부의 전개는 흡입력이 정말 엄청납니다. 마지막에 키리에와 슈이치가 서로 몸을 둘둘 감은 소용돌이의 형상이 되어 기괴한 로맨스물의 결말을 맞이한 장면이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소용돌이도 실사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저는 이 영화판 소용돌이를 어릴 때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VHS)로 빌려 봤습니다. 아마 이토 준지 만화 원작의 실사 작품들 중에서 유일하게 국내에 정식 수입된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배우인 신은경이 출연했기 때문에 국내에 정식 수입될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완성도는 B급 영화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나름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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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물고기’는 정말 충격적인 작품입니다. 이토 준지의 후반기 작품으로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라 나름 소소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 판도 기대 이상의 완성도와 원작과는 다른 선정성으로 꽤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포의 물고기

 

공포의 물고기는 제가 ‘울프 가이’와 함께 ‘여주인공이 험한 꼴 당하는 만화’ 양대산맥으로 꼽는 작품입니다. 이 만화에서 여주인공 ‘카오리’에게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같은 이토 준지 대표작의 히로인인 소용돌이의 키리에는 공포스러운 소동들이 벌어지는 가운데서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는데... 카오리도 처음에는 키리에나 토미에처럼 상당한 미녀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약간 키리에와 토미에를 반반씩 섞은 것 같은 분위기의 외모예요. 그런데 이런 미형의 캐릭터가 작품의 내용이 진행되면서 차마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로 끔찍한 형상으로 변해갑니다. 이 작품은 내용 자체가 충격적이고 혐오스럽기도 하지만 여주인공에게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을 보는 것이 무엇보다 괴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포의 물고기 여주인공 카오리

 

이토 준지는 이 작품을 통해 가장 이토 준지 스러운 인류 멸망 아포칼립스의 상황을 그려냈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에 의해 인류의 문명사회가 붕괴하고 인간은 기계장치에 결박된 채 에너지 공급원이 되어버린다는 설정은 흡사 매트릭스와도 닮았지만, 이토 준지의 놀라운 상상력은 매트릭스보다 훨씬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멸망의 풍경을 독자에게 보여줍니다. 저는 이토 준지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실사 작품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지만, 공포의 물고기만은 설령 실사 영화로 제작된다고 해도 보러 갈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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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의 작품 중에서는 유명한 고전 문학의 코미컬라이징 작품도 있습니다. 바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입니다. 두 작품 모두 이토 준지만의 독특한 표현력과 묘사에 잘 어울리는 내용이라서 만화판도 상당히 읽을만한 작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원래 내용이 재미있는 걸작 고전 문학들이라서 이토 준지의 오리지널 작품들과는 또 다른 재미를 맛볼 수가 있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이토 준지는 모든 만화가들의 기본 소양인 재치 있는 유머 감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익살스러움’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이런 이토 준지의 익살스러움이 최고로 잘 드러난 작품은 역시 ‘소이치 시리즈’입니다. 소이치는 이토 준지가 창조한 가장 개그스러운 캐릭터인데, 사실상 작가 본인의 오너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이치가 인기를 끌고 시리즈가 계속 나오면서 나중에는 성인이 된 소이치까지 등장하는데, 성인 소이치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소동들도 나중에 어린 소이치가 꾼 꿈이었던 것으로 뭉게 버린 게 작가의 뻔뻔스러운 익살을 잘 보여준 전개였던 것 같습니다.

 

소이치

 

이토 준지의 독특한 작화 스타일과 기괴한 상상력은 후대의 많은 만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한국에서도 기안84 등의 웹툰 작가들이 이토 준지 스러운 작화나 연출을 많이 따라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토 준지와 비슷한 공포 만화의 거장이라고 부를 만한 만화가는 아쉽게도 이토 준지 이후로는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작풍의 만화가들이 몇몇 있긴 하지만 이토 준지 만한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만화가는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이토 준지의 재능은 만화라는 매체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독보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포 만화라는 장르에서 이토 준지만 한 재능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까요?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토 준지에 필적하는, 혹은 능가하는 재능의 공포 만화 작가가 등장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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