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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이야기

[만화가 이야기] 하나자와 켄고 花沢健吾

by 대서즐라 2022.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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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하나자와 켄고(花沢健吾)의 작품 특징을 짧게 요약하면 ‘현실적인 루저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현실적이라는 특징은 작품의 소재에 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가 그린 네 편의 작품, 르상티망, 보이즈 온 더 런, 아이 앰 어 히어로, 언더 닌자 중에서 절반이 넘는 세 작품이 현실적이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죠. 하지만 캐릭터 설정이나 인물의 관계성, 상황 전개 등을 놓고 보면 ‘이게 현실이라면 정말로 이럴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가장 큰 요인은 그림체입니다. 하나자와 켄고의 그림체는 과장된 데포르메를 배제하고 대단히 사실적인 배경과 인물 묘사를 보여줍니다. 사실 만화 중에서도 이런 사실적인 그림체의 만화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그림체를 선호하는 일반적인 이유는 ‘오타쿠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더 확실한 표현을 쓰자면 ‘씹덕 느낌’이 없기 때문이죠.

 

하나자와-켄고-작품-아이-앰-어-히어로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이 보여주는 현실성의 또 다른 요인은 그의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비참함’의 묘사입니다. 그의 작품에는 대체로 사회 하층의 루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일이 안 풀리며 여러 가지 곤란과 비참함을 겪습니다. 이 비참함의 묘사가 큰 과장이 없으면서도 적당히 자극적이며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독자가 그의 작품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가장 핵심적인 강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자와 켄고는 지금까지 네 편의 작품을 그렸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데뷔작인 ‘르상티망’만 못 봤습니다. 이 책을 지금 구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국내 정식 출간되긴 했지만 절판되어 더 이상 팔지도 않고 중고책도 잘 안 보여요. 뭐 어떻게든 구하려고 작정하면 구할 수는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 미치도록 읽고 싶은 건 또 아니라서요. 그래도 제가 사는 지역의 알라딘 중고서점 매장에 혹시 들어왔나 싶어서 간간이 검색해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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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상티망 이후로는 ‘보이즈 온 더 런’을 그려서 큰 히트는 아니지만 마니아 층을 어느 정도 만들어냈고 그 후에 ‘아이 앰 어 히어로’를 그려서 19금 만화치고는 상당한 대중적인 히트를 기록합니다. 최근 연재하고 있는 ‘언더 닌자’는 앞의 두 작품보다는 호불호가 꽤 갈리는 작품이라 크게 인기를 끌지는 못하는 듯하고요.(그래도 애니메이션화까지 된 걸 보면 나름 인기는 있나 봐요.) 언더 닌자는 국내에 정식 출간도 안되었는데 소재의 특성상 영영 국내 출간은 안될지도 모르겠네요. 이러면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국내 출간이 안된 작품이 되는 거겠죠.

 

사실상 ‘보이즈 온 더 런’과 ‘아이 앰 어 히어로’ 두 작품이 하나자와 켄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 다 실사 영화로 제작되었고 보이즈 온 더 런은 드라마로도 나왔습니다. 물론 저는 두 작품 모두 만화뿐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까지 다 챙겨봤고요.

 

아이-앰-어-히어로-영화

 

두 작품 중에서 좀 더 대중적으로 히트하고 유명한 작품은 ‘아이 앰 어 히어로’이지만(참고로 이 작품의 국내 정발 제목은 '아이 앰 어 히어로'이고, 영화 개봉명은 '아이 엠 어 히어로'입니다), 저는 ‘보이즈 온 더 런’을 좀 더 좋아하고 이 작품이 하나자와 켄고의 최고 대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상현실, 좀비, 닌자 같은 비현실적인 소재를 다루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보이즈 온 더 런’만은 소재와 내용 전개가 모두 현실적입니다. 그리고 루저물이라는 장르 정체성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굉장히 마니악한 ‘루저물’이라는 장르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르 얘기를 하자면 이 작품은 ‘NTR’이라는 장르에서도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주인공 타니시와 엮이게 되는 두 명의 여자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이 두 캐릭터가 작품의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히로인 역할을 양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반부의 히로인 역할인 치하루는 사실은 충격의 NTR 전개로 주인공에게 거대한 시련을 안겨주는 페이크 히로인입니다. 치하루와 관련된 NTR 전개가 너무 충격적이고 자극적이라서 이 장르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맛보라고 추천할만한 ‘장르 표본’으로도 꼽힐 정도입니다. 저도 읽을 때 정신적 대미지가 꽤 있었어요.

 

NTR-페이크-히로인-치하루
보이즈 온 더 런

 

사실을 말하자면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은 은근히 변태적입니다. 노출이나 야한 장면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편도 아닌데 간간이 등장하는 성적인 상황의 묘사들이 대단히 현실적이고 자극적이죠. 특히 성의 ‘추한 일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데 능합니다.

 

본래 ‘성’은 양면적입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추하죠. 생명을 창조해내는 숭고한 행위이면서도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행위니까요.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에는 주로 사회 하층의 루저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들이 직면하게 되는 성적인 상황들은 대부분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행위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자와 켄고는 이런 성의 추한 일면을 관음 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려냅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성적인 묘사들은 단순히 야하다는 느낌보다는 뭔가 변태적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도 아주 ‘은근하게’ 변태적입니다. ‘보이즈 온 더 런’이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이 앰 어 히어로’와 ‘언더 닌자’에서도 이런 변태적인 면모는 불쑥불쑥 발현됩니다. 이런 특징은 비슷하게 루저물 장르의 대가인 만화가 ‘후루야 미노루’와도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화가 이야기] 후루야 미노루 古谷実

 

[만화가 이야기] 후루야 미노루 古谷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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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변태적인 특성은 그의 작품이 가진 하나의 요소일 뿐 그가 ‘야한 만화’를 그리는 작가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야하다고 할 수 있는 ‘보이즈 온 더 런’도 노출이나 성행위 장면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고 ‘아이 앰 어 히어로’와 ‘언더 닌자’는 소재와 장르부터 야한 쪽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니까요.

 

언더-닌자
언더 닌자

 

결국은 ‘루저물’이 그의 작품의 핵심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풀어서 표현하자면 ‘별 볼 일 없는 인간들이 현실의 풍파에 맞서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야기’라고나 할까요. 사실 현실의 풍파라는 게 경우에 따라서는 좀비 아포칼립스와 같은 대형 재난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좀비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다양한 현실의 풍파들로 시련과 곤경을 겪고 최악의 경우 죽기도 하니까요.

 

물론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 속 주인공들이 겪게 되는 시련들을 일반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말할 것도 없고, 보이즈 온 더 런의 타니시에게 일어나는 불행도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수준이니까요. 하지만 곤란한 상황들을 역부족인 능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모습은 대부분의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궁지에 몰렸지만 그 궁지를 해결할 힘이 없다 라는 게 굉장히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정말로 엄친아 능력치의 잘난 인간들이 아니라면 누구나 인생에서 ‘역부족’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살아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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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무리 루저의 비참함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고 해도 하나자와 켄고도 대중 만화를 그리는 상업 작가입니다. 비참함 외에도 작품 안에 작은 희망과 긍정적인 요소들을 담아냅니다. 물론 작품 전체에서 그려지는 시련과 비참함에 비하면 희망이라고 해봐야 정말 작은 수준이지만, 그 시련과 희망의 극단적인 비대칭도 은근히 현실적으로 와닿는 요소입니다. 이런 요소들에 하나자와 켄고의 사실감 넘치고 자극적인 표현과 연출들이 더해지면 작품 안에서 작은 비중으로 그려지는 희망적인 전개에도 사막 한가운데를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과 같은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즈-온-더-런-히로인-하나
보이즈 온 더 런

 

마지막으로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에서 제가 좋아하는 특징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바로 매력적인 여자 캐릭터입니다. 사실적인 그림체인데도 은근히 주요 여자 캐릭터들의 작화는 소위 ‘남성향 씹덕 만화’의 여자 캐릭터 못지않은 모에함을 보여줍니다. ‘보이즈 온 더 런’의 ‘치하루’의 캐릭터가 굉장히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반전 NTR 전개가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고, 그 후 진 주인공으로 등장한 ‘하나’가 치하루를 능가하는 매력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NTR 전개로 인해 입은 내상을 치유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 앰 어 히어로’의 여주인공 히로미는 하나자와 켄고가 정말 공을 들여서 완성해낸 히로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부터가 작가 본인과 똑 닮게 생긴 오너캐 수준인데, 여주인공도 작가 스스로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디자인과 성격으로 완성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만큼 매력적인 여주인공이고, 특히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이 취향인 독자들에게는 더욱 매력이 극대화되어 보이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앰-어-히어로-히로인-히로미
아이 앰 어 히어로

 

현실성과 루저 스토리, 은근한 변태성, 여자 캐릭터의 모에함 등 하나자와 켄고의 작품은 확실히 열광적인 마니아 층을 가질만한 강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불량식품 같은 재미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하층의 어두운 이면을 적나라하게 조명하는 작품의 특성상 꽤나 철학적으로 깊이 있는 주제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크게 대중적인 사랑을 받기는 어려운 작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이 앰 어 히어로’ 정도의 성공이 최대치일 테고 최근작 ‘언더 닌자’는 더욱 대중성에서 멀어졌죠.

 

하지만 하나자와 켄고는 자신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만화가로서 앞으로도 흥미롭고 독창적인 작품들을 계속 그려나갈 것입니다. 이런 만화가들이 꾸준히 등장하고 활동해야 합니다. 마이너 한 영역에서도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이 만화 업계를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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